< -- 2-6. 망자의 도시 -- >
"안됩니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와중에 김형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몸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던 1등급 이능력자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애들 장난 같은 유인책입니다. 알고도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죠?"
김형준의 말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워 일행을 갈라놓고 하나 하나 처리하겠다는 의도가 우스울 정도로 눈에 보였다.
"일등급 능력자가 몇인데 저깟 박쥐새끼들 무서워 몸을 사려!"
처음의 유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조급한 기색이 역력한 카탈리나 에란쵸가 외쳤다. 신경질 가득한 음성과 여유 한점 없는 태도, 이제는 김형준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평정심을 잊었다.
제길. 이럴 때 그녀만 있다면.
몇 번인가 겪어보았던 전지현의 파사능력이 지금만큼 절실한 적이 없던 그였다. 평소와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이능력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다. 스트리고이-발라가가 부린 수작, 대수롭지 않게 견디고 넘어가려 했던 포석이 제단의 결계와 합쳐져 이능력자들의 평정심을 앗아갔다.
"그렇다고 뻔한 수작에 넘어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김형준 역시 평소보다는 조금 날이 선 음성으로 카탈리나 에란쵸의 말에 대꾸했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요."
아야나미 로유미가 애써 담담한 어투로 말했지만, 저도 모르게 말 끝이 날카롭다.
"그럼 호라시오님을 버리겠다는 겁니까?"
갑작스레 끼어든 음성에 김형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도의 이능력자 러셀 피터다. 김형준을 비롯한 이들이 무의식중에 피해왔던 화제를 꺼내 단번에 가열시킨다.
"버린다라."
이 정도까지 말이 나오면 긍지 높은 능력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역시나 얀크스 뷔텐펠츠가 잔뜩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인다.
가장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지금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감정적인 얼굴이 되어있다. 김형준이 그가 입을 여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얀크스는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트루 블러드, 가볍게 부딪쳤지만 그 힘이 우리 못지 않음을 알겠어."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2등급 이능력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꼬리를 말 이유는 아니지."
호주머니에서 검은 가죽장갑을 꺼내 손을 찔러넣은 그가 차갑게 웃었다. 스산하기만 한 미소가 오히려 무표정할 때보다 더 위험스러워 보였다.
김형준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려는데 민용모가 고개를 저었다. 의문에 찬 김형준이 다시 그를 뿌리치고 나서려는데 민용모가 힘껏 내리 눌렀다.
그렇게 민용모의 제지에 김형준이 곤혹스러워 하는데, 1등급 이능력자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이들을 내려놓았다.
"나는 가겠어. 그쪽은 어떻게 할 거지?"
얀크스 뷔텐펠츠의 말에 러셀피터가 미소를 지었다. 얀크스의 그것과 지독스럽게 닮아있는 미소가 일행들의 얼굴로 퍼져나갔다.
"나, 당신, 그리고 당신. 나머지는..."
아예 작정을 했는지 얀크스 뷔텐펠츠가 아야나미 로유미와 카탈리나 에란쵸를 둘러보며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꼬리 말고 물러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뻔한 수작에 놀아나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네요."
차라리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아야나미 로유미가 일행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군."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카탈리나 에란쵸 역시 갑작스레 태도를 바꿨다.
얀크스 뷔텐펠츠가 그런 카탈리나 에란쵸에게 몇마디 이죽거리곤 러셀 피터와 함께 자리를 이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쟈베트 샹피뉴가 미간을 지긋이 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것도 스트리고이, 아니면 결계의 탓일까요?"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김형준도 아야나미 로유미도 아닌 민용모였다.
"둘 다겠지요. 보셨다시피 저 정도씩이나 되는 사람도 제 정신을 유지 못하는 결곕니다. 남은 우리라도 빨리 이탈하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겠
지요."
민용모의 말에 일행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에 늘어진 2등급 이능력자들을 살핀다.
한편 일행을 이탈한 호라시오 베니치는 낭패스러운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싼 뱀파이어들 사이에 선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일행을 팽개치고 이들을 쫓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포위를 당할 때까지 몰랐다니.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무언가 쫓기는 심정이었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신경 탓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을 쫓고 말았다. 2등급 이능력자들을 잃었다고 하지만 불가항력에 가까웠던 일.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쉬익.
마치 뱀의 그것과도 같은 혀를 날름거리는 수백의 뱀파이어들 사이에 선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놀아난 건가."
분노가 느껴지기 보다는 차라리 허탈할 지경이다.
그가 낮게 중얼거리자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몸에서 핏빛 안개를 뿜어낸다.
"제대로 얕보였군."
지척까지 압박해오는 붉은 안개를 멀거니 바라보던 호라시오 베니치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제길. 나 호라시오 베니치가..."
더 이상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낮아진 음성으로 지껄인 그가 사방을 쏘아보고는 허리를 쭉 폈다.
"그렇게 우습게 보였다는 거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그의 키가 몇배는 커진 듯 솟아오르며 천지가 뒤흔들렸다. 아니 그가 커진 것이 아니다. 그의 등 뒤에서 솟아난 후광과도 같은 빛이 몇미터나 하늘로 치솟은 것이다.
푸른 화염이 그의 등뒤에서 솟아 오르고, 그의 코앞까지 다가섰던 붉은 안개가 단번에 흩어지며 물러섰다.
"다 죽여주마."
호라시오 베니치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내뻗었다. 하늘로 솟구치던 화염이 방향을 바꿔 그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케에엑!"
그 단순한 동작에 수십은 될법한 뱀파이어가 녹아내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버러지 같은 것들."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손을 양손으로 휘저으며 알 수 없는 동작을 맺는다.
"프람벨지."
화염이 치솟는다. 넘실거리는 불길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이며 그의 주변을 쓸어간다. 피하고 자실 것도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둘러싼 수백의 뱀파이어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녹아내린다. 무심한 눈으로 화염에 파묻히는 뱀파이어들을 바라보던 그가 순간 누을 크게 떴다.
"꽤나 뜨거웠어."
언제 접근했을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그의 지척에서 속삭였다.
"크윽. 트루 블러드?"
창자를 휘젖는 듯한 격통에 이를 악물며 그가 말했다.
"모처럼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 그냥 지나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서 말이지."
새하얀 이가 어둠속에서 선명하게 번뜩였다. 호라시오 베니치의 눈에 불꽃이 튀기다가 이내 흐릿해져간다.
"빌어먹을 박쥐 새끼."
이렇게 죽나 생각했더니 화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이 없는 최후다. 호라시오 베니치가 자신의 배를 파고든 앙상한 팔뚝을 내려 보다가 피를 토했다.
그렇게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또다른 뱀파이어가 코를 밖고 게걸스럽게 혀를 날름 거렸다.
호라시오 베니치의 뱃속에 팔뚝을 쑤셔넣은 트루 블러드가 그런 뱀파이어와 호라시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콰직.
바닥에 흘러내린 피를 핥아대느라 정신이 없던 뱀파이어가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머리통을 잃었다.
"어디 하찮은 미니온 따위가."
낮게 혀를 차는 트루 블러드의 눈에 기이한 희열이 일렁였다. 마치 절정에 도달한 무엇처럼 그의 온몸이 세차게 떨리고, 호라시오 베니치의 몸이 조금씩 퍼석퍼석해진다.
"키힉."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가 벌어진 것인지 침을 흘리며 트루 블러드가 신음성을 내질렀다. 마치 성교라도 하듯 기묘한 기운이 가득한 신음성에 호라시오 베니치가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지만 배를 꿰뚫은 손아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호라시오 베니치는 흐릿해져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초점마저 사라진 눈에는 그저 허무한 빛만이 가득할 뿐이다.
============================ 작품 후기 오늘 저녁부터 비축분 시간 나는 대로 풀겠습니다. 홍보 일체를 맡았던 영화제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감에 따라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생겼
습니다.
오래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사죄하는 뜻에서 12시부터 연달아 비축분 풀도록 하겠습니다!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