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79화 (179/223)

< --  2-6. 망자의 도시  -- >

자존심 탓일까.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분명 이성은 철수하는 것이 최선이라 속삭일 테지만, 1등급 이능력자로 군림해온 무수한 시간이 차마 발을 돌릴 수 없게 하는 모양이다.1등급 이능력자들이 만들어낸 불편한 침묵이 계속되자 2등급 이능력자들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험난했던 하루였다. 직접적으로 손에 피를 묻힌 건 아니었지만, 스트리고이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가 간신히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트루 블러드라는 존재들이 상황을 또다시 변화시켰다.

피의 의식이고, 제단이고. 막연하기만 한 것들이었지만 2등급 이능력자들은 한참 전부터 느껴졌던 불편한 기분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짓눌리며, 불길함이 온몸을 어루만진다. 왜곡이 일어난 지역에 들어갔을 때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왜곡과는 다르다.

왜곡은 최소한 이런 무력감과 압박감을 주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기에는 1등급 이능력자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하다. 견디고 견뎌내보지만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미즈히나양!"

일본의 2등급 이능력자 미즈히나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창백한 안색으로 질린 그녀는 곁에 있던 또다른 이능력자의 도움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것을 면했다.

"결계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군요."

민용모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1등급 이능력자인 리옌제까지 무력화시킨 결계다. 물론 스트리고이 혈족의 피가 잔뜩 묻어 그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황룡에서도 이름이 높은 그가 병에 걸린 사람처럼 무력해질 정도의 결계다.2등급 이능력자들이 이제까지 버틴 것이 용할 지경이다. 그나마 김도연과 미즈히나가 중첩시킨 결계 탓에 이 정도나 버텼다고 할까.

하지만 그 축을 이루는 미즈히나가 쓰러졌다. 중첩된 결계로도 영향을 피하지

못했는데, 이제 남은 결계 하나로는 제단의 결계가 떨치는 맹위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야... 겠군요."

미즈히나와 꽤나 가까워보였던 아야나미 로유미가 결국 철수를 입에 올렸다. 그간 눈에 보이지 않았던 제단의 결계로 인해 2등급 이능력자 한명이 실신하자, 결국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그녀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그녀가 철수를 표면화 시키자 다른 이능력자들도 마지 못해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준이 그런 그들의 의견을 아울러 철수하는 인원들을 다독였다.

"이번 일은 불가항력입니다. 인간도 아닌 것들의 전쟁에 휘말려 쓸데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습니다."

침착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다른 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철수하겠습니다. 방향은 남쪽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가겠습니다."

그 모습이 과연 백전을 걸친 이능력자다워 모두가 속으로나마 감탄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알까.

지금 김형준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무력감을. 반드시 블라가만큼은 스스로가 처단하겠다 결심한지 이제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다.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이 넘는 이들의 운명을 장난처럼 비틀어버린 시궁창의 왕. 오물투성이 왕좌가 눈 앞에 있다면 가장 먼저 달려들어 박살을 냈을 그다.

그 모든 것을 내색하지 않고 그는 일행들을 다독여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하지만 이미 결계가 활성화된 루마니아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민용모의 말대로 트루 블러드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았다.

만월이 되어야 시작된다는 피의 의식이건만, 벌써부터 2등급 이능력자들이 실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즈히나 하나만 신경쓰면 됐을 것이, 이제는 어지간한 이능력자들이 모두 실신해버렸다.

덕분에 1등급 이능력자들의 어깨에는 한명에서 세명이나 되는 일행이 엎혀있

거나 안겨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이라고 돌아가는 길에 만난 진성 뱀파이어들. 그들은 트루 블러드들처럼 강대하진 않았으나 일행의 발목을 잡을 정도로 집요하고, 교활했다.

가까이 오지 않으면서도 멀리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그것만으로 정신적 피로가 가중되어 2등급 이능력자들 중 제대로 서 있는 자는 민용모와 비맥의 신승대뿐이었다.

이제는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1등급 이능력자들은 많은 이들을 부담해야 했다. 섣불리 능력을 쓰기에는 그들이 느끼고 있는 압박감 역기 만만치 않았다.

피도 묻히지 않은 2등급 이능력자들이 실신할 정도의 영향력, 강대한 1등급 이능력자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지원을 요청했으니, 뭔가 응답이 올 겁니다."

결국 결단을 내린 김형준은 통신기를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계가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마당에 외부에서의 도움이 얼마나 힘이 될까.

의문은 접어두고 남은 이능력자들을 독려했다.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 것은 루마니아의 중심을 벗어날수록 결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인지, 압박감이 더해지진 않는 다는 것 정도였다.

느리지만 확실한 발걸음으로 김형준을 비롯한 일행들이 루마니아의 남부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만월이 뜨기 전에 루마니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나 보다.

멀리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몇몇 뱀파이어들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발견하고도 1등급 이능력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장 달려들지 않는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이동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탓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뱀파이어. 어둠의 귀족이라 세간에 불리는 이들이다. 그들과 관련하여 수많은 소설과 영화등이 만들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이 존재들은 허구보다 더욱 까다로운 존재들이었다.

어둠과 동화되어 지척에 나타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안개처럼 변해 머리 바로 위를 유영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신경이 두꺼운 이능력자들이라 하나, 그런 그들의 행동은 굉장한 압박감으로 돌아왔다.

"날파리 같은 새끼들. 결계 밖에서 만나면 감히 눈도 못 마주칠 것들이."

카탈리나 에란쵸가 사납게 지껄였다. 쾌활했던 초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잔뜩 독이 오른 독사 같은 모습의 그녀가 눈을 빛내며 뱀파이어들을 훑어보았다.

뱀파이들 중 몇몇이 그녀를 보고 입맛을 다신다. 세간에 풍문에 의하면 그들은 미녀를 좋아한다더니 그녀의 외모에 회가 동한 모양이다.

"역겨운 새끼들."

카탈리나 에란쵸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녀의 거친 행동에 뱀파이어들이 아우성댄다.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민용모가 입을 열었다.

"저들은 스트리고이가 제물로 바쳐진 뒤에 떨어질 힘의 잔재를 찾아온 이들. 힘이 절실한 이들이 우리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지요. 당장 우리들 중 하나만 제대로 처리해도 트루 블러드에 편입될 수 있을 테니까요."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한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을 무렵, 뱀파이어 한 마리가 갑작스레 거리를 좁혔다.

금발에 창백한 피부, 모델처럼 쭉 뻗은 사지가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꽤나 호감이 갔을 법한 외모였지만, 파리한 입술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섬뜩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한 뱀파이어가 일행의 지척까지 다가섰다.1등급 이능력자들은 그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이제까지 계속 있었던 뱀파이어의 접근이었으니만큼, 이번에도 으레 물러가려니 했던 것이다.

결계의 영향으로 인해 육감이 약해진 것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그들은 방심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그 틈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왔다.

호라시오 베니치는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셋이나 되는 2등급

이능력자들이 어깨에 매달려 있음에도 갑작스레 어깨가 자유로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음?"

그리고 그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기척을 숨겼는지 방금 전의 뱀파그리고 그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기척을 숨겼는지 방금 전의 뱀파이어 한 마리가 그의 어깨에 얹힌 이탈리아의 이능력자 한명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꿀럭거리며 움직이는 뱀파이어의 울대를 보면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개새끼가!"

호라시오 베니치가 어깨에 매달고 있었던 이능력자들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뱀파이어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비록 급하게 내지른 공격이라지만 그 위력을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밀랍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의 이능

력자뿐. 축 늘어진 그가 몇 번인가 경련하다가 그대로 멈춰섰다.

"메디치!!"

호라시오 베니치가 처절하게 외치며 미이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이능력자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민용모가 외쳤다.

"멈춰!"

솨아아아아아!

메뚜기 때가 달려드는 듯한 소리가 사방을 에워쌓고 가뜩이나 어두웠던 사방에 더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이런 제길!"

호라시오 베니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바닥에 내려 놓은 두명의 2등급 이능력자가 어둠에 파묻혀버린 탓이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 제단의 결계가 그가 인식도 못 하는 사이에 평정심을 빼앗고 감각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2등급 이능력자 세명이 덧

없이 스러져 버렸다.

호라시오 베니치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푸른 불꽃이 그의 온몸을 휘감고 타오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주변의 어둠을 일순간에 내몰았을 만큼 찬란한 불꽃에 몰려들었던 어둠이 아우성을 쳤다.

"개 같은 새끼들. 그대로 태워주마."

그의 눈동자가 푸른 빛을 내며 번뜩였다.

화르르륵!

하늘로 솟구치던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크아아악!"

1등급 이능력자의 분노는 과연 무서웠다. 온 천지를 뒤덮었던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비어버린 공간에 남은 것은 불꽃에 휩싸여 타오르는 뱀파이어의 잔해들뿐. 처음 다가섰을 때보다 몇배는 멀리 물러선 뱀파이어들을 바라보는 호라시오 베니치의 눈가가 광기가 감돌았다.

"안돼!"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받은 아야나미 로유미가 외쳤지만, 호라시오 베니치는 섬뜩하게 웃었을 뿐이다.

"이렇게 된 김에 모조리 태워주마."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수하들을 잃은 탓인지, 유들유들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지독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을 한 그가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온 사방에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화염이 솟구치고, 욕설이 터져 나왔다.

"호라시오!"

김형준이 급박하게 외쳤다. 그의 기운이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 탓이었다. 기운을 잔뜩 담은 외침이 저 멀리까지 퍼져나갔지만, 호라시오의 기운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먼곳을 향해 사납게 달려갈 뿐.

김형준을 비롯한 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작품 후기 화요일짜 연재분 지금 올립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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