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트루 블러드로군."
모두가 갑작스레 나타난 존재에게 너무나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리옌제 탓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사이를 불쑥 파고 드는 마치 그르렁대는 듯한 음성 하나. 이능력자들의 시선이 민용모에게 옮겨갔다.
어느 사이엔가 늑대화를 이룬 민용모의 기세가 전에 없이 사나웠다.
"호오. 이게 누구야. 하얀 갈기 일족의 전사셨구만. 용케도 살아남아 있었어."
사내가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라면 우리를 잘 알고 있겠지? 이야기가 잘 통하겠어."
시뻘건 광망을 흘리며, 온 몸을 움찔거리는 민용모와는 다르게 사내는 기꺼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러가라. 우리 트루블러드를 안다면,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알고 있겠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대화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민용모를 향했다. 눈빛 가득 설명을 요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민용모가 그런 모두의 시선을 눈치 채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들은 진조 뱀파이업니다. 스트리고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고 조금 과장하자면 이들이야말로 흡혈족들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용모의 설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를 비롯한 트루 블러드를이 입가를 비틀며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나서지 않는 이들이, 이렇게 나설 때는 단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율법에 의한 숙청. 스트리고이가 무언가 이들이 정한 율법을 어긴 모양입니다."
민용모의 설명 끝나니가 무섭게 사내가 말을 받았다.
"말한대로야. 그리고 그대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트루 블러드는 블라가처럼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여서야 골치만 아
플 뿐이거든."
실제로 트루 블러드들은 외딴 성에 살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들의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부리는 금력과 권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민용모의 말에 사내를 비롯한 트루블러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과장된 인사를 취해 보인다.
"잘 알았다면 돌아가라. 선포하건데 루마니아는 피의 의식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가 그대들 앞에 나선 것은 어디까지나 호의. 루마니아를 떠나라. 의식은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 그가 목을 틀어쥐고 있던 리옌제를 내팽개쳤다.
"커억."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그의 모습이 1등급 이능력자라고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명심해라. 오늘 만월이 가장 높이 떠오른 순간, 루마니아는 피의 제단이 될 것
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루 블러드들이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그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리옌제에게 달려갔다.
"용모. 아무래도 일이 복잡해지는 것 같은데. 그 피의 의식이라는 게 뭐야."
김형준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민용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늑대화를 푼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우울했다.
"그들만의 행사지. 율법을 어긴 존재가 있다면 그 혈족까지 전부 다 쓸어버리는. 말 그대로 숙청행사야. 워낙 고상떨기 좋아하는 치들이라 말만 번드르르 할뿐 살육제와 다름없어."
민용모의 말에 아야나미 로유미가 몸을 떨며 말했다.
"우리가... 하찮은 그것들의 말을 굳이 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트루 블러드들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꽤나 상한 모양이다. 사실 밀려났다기보다는 그들이 나타났을 때와는 마찬가지로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대로 사라진 탓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이런 경험은 좀처럼 겪기 힘든 일이
리라.
"아마, 들어야 할 겁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민용모의 모습에 아야나미 로유미가 입술을 악다물었다. 민용모가 그런 그녀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만월이 가장 높이 솟아오르는 시간에 시작한다지만, 사실 그들의 행사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민용모의 시선이 잠시 리옌제를 스쳐갔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미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결계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리옌제씨가 이상할 정도로 무기력한 것도 그 이유겠지요."
피의 의식이 열릴 때면, 그들이 말하는 제단이라는 결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곳에는 붉은 피를 가진 모든 존재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데, 그 강제력이 어마어마 했다.
"음. 그렇다고 해도 저런 모습은 정말 너무한데."
김형준의 말에 아야나미 로유미가 대꾸했다.
"게다가 이번 피의 의식은 스트리고이가 제물. 스트리고이가 만들어낸 피조물들의 피를 뒤집어쓸수록 결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알다시피 그는 우리 중 유일한 권법가야."
접근하기도 전에 사위를 압도하는 전투를 선호하는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과 다르게 리옌제는 늘 감염자들의 한가운데를 휘젓고 다녔다. 그 덕에 온몸에 피칠갑을 한 모습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와도 같았는데, 그게 사단을 일으킨 모양이다.
"그리고 결계가 아니더라도 빠르게 루마니아를 이탈하는 게 좋을 겁니다. 피의 의식이 무서운 것은 진보 뱀파이어들과 결계 때문이 아닙니다."
피의 제단이 들어서면 혈족을 막론하고 모든 뱀파이어들이 몰려들었다. 제물이 가지고 있던 힘을 고스란히 꿀꺽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그 달려드는 이들 중 하찮은 뱀파이어나부랭이는 없었다.
잔챙이를 제외한 진성 뱀파이어들의 집결만 해도 인류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위기. 아무리 1등급 이능력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지만 소수의 무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깟 것들 다 쓸어버리면 될 것을."
자존심 탓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야나미 로유미의 모습을 보며 민용모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트루 블러드의 힘은 아까 본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의식에 모여드는 트루 블러드들이 몇일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아까 본 이들이 다 일수도 있고, 어쩌면 수백이 몰려들지도 모르지요."
피의 의식 말미에 열릴 과실이 달콤하기 그지 없으니, 얼마나 많은 뱀파이어들이 몰려들지. 민용모가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설 바에야, 검을 꺾겠습니다."
아야나미 로유미가 단호한 태도로 말하자 곤란해진 것은 김형준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자존심을 내세워가며 위험을 자초하고 싶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서린 기색이 단호하기만 했다.
"일단 연락을 해봐야겠군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져온 통신기를 꺼내든 김형준이 통신기를 켜보니 원활하게 연결이 됐다.
"AF-KOR, 블러드 써쓰터. 통신바랍니다."
국경지대에서 전해 받은 보안코드를 내세우니 통신기 저편에서 바로 응답이 왔다.
'통신코드 확인. 마스터 킴 무슨 일이십니까.'
군대와는 다르게 간단한 보안절차를 거친 후 김형준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민용모에게 들은 피의 축제와 결계, 진성 뱀파이어들의 집결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통신기 너머가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제 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상했던 대답이라 김형준이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윗선에 보고를 바란 것이 아닙니다. 1등급 이능력자의 권한으로 인근 지역에 대피령과 경계령을 내릴 것을 권유합니다. 이는 이번 작전에 동원된 모든 1등급 이능력자들에게 주어진 비상시 통솔권에 근거한 것이니 즉각적인 조처 바랍니다."
김형준의 말에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이 그런 것이 있었나 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몰랐던 눈치다.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역시나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통시기 너머의 음성이었다. 어딜 가나 절차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해먹겠다고 생각한 김형준이 막 목소리를 올리려던 순간, 낯익은 음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마스터 킴. 잘 지내셨습어요? 일전에 만났던 히어로즈의 캐더린입니다.'
당당하면서도 고운 음성이 낯이 익다 싶었더니 일전에 영입제의를 왔던 미국의 이능력자다.
"반갑습니다. 우즈양."
갑작스레 끼어든 그녀의 존재가 당황스럽긴 했지만, 용케 그녀의 성을 기억해낸 김형준이 마주 인사를 했다.
'네. 그보다 방금 전의 통신 본의 아니게 엿들었는데.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인근 국가 뿐만이 아닌 전세계 이능력자 단체에서 루마니아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수의 이능력자들이 루마니아의 남과 북에 집결, 대기중입니다.'
기대 이상의 대응이다. 김형준이 잠시 탄성을 내뱉는데, 저편에서 캐더린이 쾌활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이번에는 바티칸도 나섰답니다. 엉덩이 무거운 교황의 검들이 나섰으니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바티칸이라고 하면 탈국가적인 이능력자 단체다.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바티칸은 경계 너머의 존재들 중, 어둠에 속하는 존재들만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 알려진 것이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장 대외적인 움직임이 활발해질 때면 뱀파이어를 비롯한 어둠의 주민들이 숨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곳이기도 했다.'앙큼하게도 이번 사건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통보를 안했더라고요.
바티칸도 타락했다니까요.
'캐더린이 잠시 바티칸의 욕을 하다가 김형준을 격려했다. 김형준은 일이 점점 커져감을 느끼며 캐더린과의 통신을 종료했다.'
......... 마스터 킴? 마스터 킴?
'캐더린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기존에 통신을 나누던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듣고 있습니다."
김형준의 말에 통신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통신 상태가 고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상부에서 통신상태를 유지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순간 김형준은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통신을 하고 있는 이는 캐더린과의 통신 자체를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가 말한 윗사람이라는 것이 캐더린인줄 알았더니, 강제로 통신을 끊고 끼어들었던 것일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 김형준은 알았노라고 짧게 대답하고 통
신을 종료했다.
통신을 종료한 김형준은 자신에게 집중된 일행의 시선을 느끼고 상황을 설명했다. 캐더린의 난입 건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이능력자들의 집결과 바티칸의 활동등등. 듣고 있던 이능력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있는 이들은 대부분 몸을 쓰는 것에 익숙한 이들. 살아온 세월과 수행으로 인한 지혜가 얕지 않겠지만 복잡한 상황을 좋아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제길. 그래서 어떻게 하래요?"
카탈리나 에란쵸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의 그녀가 내던진 의문에 모두가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그건 저희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번 작전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저희들입니다. 명령을 받는 쪽이 아닌 내리는 쪽이 누구인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1등급 이능력자들에게 명령을 내릴 존재가 있기는 할까. 이번 작전 역시 전적으로 그들의 자율성에 기댄 작전. 시작은 다른 이들이 준비 했으나 그 끝은 1등급 이능력자들의 결정에 맏겨져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루마니아에서 물러날까요. 아니면 그대로 가보겠습니까."
김형준의 질문에 일행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늦었습니다. 예약템 하나 없는 글쟁이라 외출중에는 업뎃이 불가능하답니다. 양해바랍니다. 오늘 올린 분량은 11월 4일 분량. 즉 월요일 업뎃 분이고 아침까지 화요일분량 올라갑니다!
늦었습니다. 예약템 하나 없는 글쟁이라 외출중에는 업뎃이 불가능하답니다. 양해바랍니다. 오늘 올린 분량은 11월 4일 분량. 즉 월요일 업뎃 분이고 아침까지 화요일분량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