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김형준 일행이 첫 감염자 무리와 조우하고 벌써 하루가 지났다. 그간 지나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의 죄책감과 죄악감도 이제는 많이 무디어졌다. 감염자들의 무리가 달려들면, 기계적으로 그들을 쓸어버릴 뿐 더 이상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 덕에 일행의 전진속도가 한층 빨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월해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새벽이 오기 직전에 마주쳤던 감염자 무리들은 이제까지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사납고 맹렬하게 이능력자들을 공격했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도, 몸통을 잃은 머리마저도 마지막까지 이빨을 딱딱거렸다.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2등급 이능력자들이 보는 것만으로 그 참혹한 현장에 질려버렸다. 그에 반해 처음에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1등급 이능력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염자들을 베어내고, 녹여버리고, 불태워 버릴 뿐이었다.
"음. 부적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는데."
김도연이 품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초반에 겪었던 기이한 죄책감과 무력감이
신경쓰인 나머지 결계를 유지하느라 너무 많은 부족을 소모한 탓이다. 결계를 보강했던 미즈히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도연의 말에 김형준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김형준을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은 말을 잃었다. 간혹 가다 알 수 없는 뭔가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스트리고이가 있을 북쪽을 바라볼 뿐, 카탈리나 에란쵸를 제외한 모두의 입이 굳게 닫혀있었다.
"지겹다. 지겨워. 이제 놈도 슬슬 방법을 바꿀 때가 돼지 않았나?"
카탈리나 에란쵸의 음성이 일행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우리의 정신을 좀 먹고, 극한까지 내모는 것이 이놈의 목적이었다고. 이제는 소용 없다는 걸 알텐데."
그녀의 말에 민용모가 쓴 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쾌활하다. 스트리고이가 부린 수작질이 아니었더라도 꽤나 충격을 받
았을 일을 겪은 이능력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쾌활했다. 그 모습이 수천 수만의 생명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민용모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 기색을 눈치 챈 것인지, 그녀가 태연스레 대꾸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어차피 인간으로 돌아오지도 못할 거고, 이런 걸로 흔들리기에는 그간의 경험이 결코 적지 않거든요."
다분히 도전적인 그녀의 태도에도 누구 하나 발끈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길이 그녀와 민용모를 스쳐갔을 뿐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도 있었다. 이미 그때 손에 피냄새가 베어버렸으니 이제 와서 새삼 유난 떨 것이 없다는 것이 그녀의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끄응."
민용모는 신음을 흘렸다. 인간이 아닌 자신이었지만, 1등급 이능력자들을 볼
때마다 지독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 이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김형준을 스쳐갔다.1등급 이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과도 같은 친우다. 여느 인간들처럼 고뇌하고, 후회하고 또 금세 희희낙락하는 김형준은 다른 이능력자들과 달랐다. 그것이 더욱 민용모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더욱 기껍게 여기는 이유였다.
힘으로는 자신이 비할 바 없는 경지에 이른 친우가 그저 지금의 모습을 지켜가길 바라는 마음. 우습지만 저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 그래도 검후와 이어지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김형준이다. 전지현 역시 처음에는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처럼 이질적인 존재였으나, 연아가 생기고 나서는 부쩍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것이 그들에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용모는 그 모습이 마냥 좋았다.
"나올 거면 빨리 나오고, 아니면 이제 좀 쉬었으면 좋겠네요."
쾌활하게 지껄여대는 카탈리나 에란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역시 1등급 이능력자는 정이 안 간다. 앞으로도 검후와 김형준을 제외하고는 가까이 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민용모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 일행은 그를 한참이나 앞질러 버렸다.
"빨리 와요!"
카탈리나 에란쵸가 손짓한다. 지금은 비인간적일지라도 저렇게 쾌활한 사람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도연! 결계를 강화 해!"
김형준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 부적이 흩날리고 주변을 둘러싼 금빛 선이 더욱 진하게 빛을 발했다. 미즈히나를 비롯한 이들 2등급 이능력자들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결계의 보강을 도왔다.
"제길. 용모, 후방을 부탁한다."
사납게 으르렁거린 김형준이 결계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그를 제외한 1등급 이능력자들은 사방에 흩어져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찌르고 베어내고 불 태워 버려도 감염자들의 무리는 끝이 없었다.
"이번엔 뭔가 다른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의 양상에 민용모가 눈을 빛냈다.
상황이 돌변한 것은 약 한시간 전 쯤이었다. 여느 때처럼 김형준 일행을 가로막은 감염자들의 무리, 이번에는 수도 몇백이 되지 않는 것이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부쩍 말이 없어진 리옌제가 감염자들의 무리로 뛰어들었다. 보기에는 위태로운 광경이었지만, 일행 중 그 누구도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리옌제 역시 1등급 이능력자였으니까.
그리고 리옌제가 오른손을 부드럽게 휘돌리며 감염자들중 몇몇을 밀쳐냈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리옌제의 공격을 받은 감염자들이 너무나도 쉽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위화감이 일행을 감싸안았다.
그래도 그가 잘 이겨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옌제도 일행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수백에 달하는 감염자들을 결국은 처치했다. 마지막 남은 감염자 열둘.
"크윽!"
그들과 충돌한 리옌제가 처음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일행은 그때까지만 해도 위기감보다는 의아함이 들었었다.
"제길! 뭐해! 가서 도와!"
누구의 외침인지도 몰랐다. 그저 리옌제가 몇 명의 감염자에게 사지를 붙잡힌 모습을 보았을 때, 상황의 심각함을 뒤늦게 인식했을 뿐이다.
1등급 이능력자들이 순식간에 리옌제를 돕기 위해 대열을 벗어났다. 위기감은 있었지만, 질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능력자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김형준을 제외한 모든 1등급 이능력자들이 달려들고도 감염자들의 기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에서 밀리는 1등급 이능력자들이 고전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명의 감염자에게 공격을 받고 있던 아야나미 로유미 같은 경우에는 보기에도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두 마리의 감염자가 남은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키이익!"
기이한 비명소리와 함께 감염자들이 결계와 충돌했다. 김도연과 2등급 이능력자들이 급하게 보강한 결계가 출렁이며 그 충격파가 안쪽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김형준은 번개처럼 뛰쳐나가 감염자들을 공격했지만, 그들은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너무나도 쉽게 그 공격을 피해버렸다.
방심했다고 생각하기엔 그들의 동작이 너무나도 빨랐다. 무언가 다르다. 이놈들은 이전까지 만났던 감염자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다.
김형준은 위기감을 느끼며 전신에 생명력을 휘돌렸다. 마침 결계를 두들기던 감염자들이 김형준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고 갔다. 일개 감염자들과 충돌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충격파다.
김형준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막 내질러오는 감염자의 길다란 손톱을 맞부딪치며 그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쉽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처음에 전투에 뛰어들었던 리옌제의 경우에는 이상할 정도로 힘을 못 쓰고 있었다.
스아악
귓가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소리에 김형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섬뜩한 기운이 머리 바로 위를 스쳐가고, 등가에 끈적한 기운이 느껴졌다.
쾅!
김형준은 어마어마한 충격에 내장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위기감에 반사적으로 발동시킨 피바라기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등판이 날아갔을 법한 강렬한 충격이다.
"밖으로 나오지 마!"
자신을 돕기 위해 결계를 벗어나려는 신승대의 모습을 보고 김형준이 소리쳤다. 이놈들은 2등급 이능력자들이 감당할 수가 있는 상대가 아니다. 황당하게도 1등급 이능력자가 고전할 정도의 감염자들이다.
이런 존재를 감염자라고 불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으나, 김형준은 이들을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비쩍 마르고 볼품 없는 육신에 창백한 낯빛이 여느 감염자와 똑같은 이들이었으니까.
다만 이제껏 보아왔던 감염자들보다 몇배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과 송곳니가 그들이 보통 감염자가 아님을 알려줄 뿐이다.
그때였다.
다른 이들이 전투를 하고 있던 곳 어디선가 새하얀 섬광이 터져나왔다. 눈이 부신 그 섬광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곳에서 붉거나 푸른 기운들이 넘실거리며 뻗어 나왔다.
"하찮은 것들이!"
아야나미 로유미, 능력자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녀린 모습을 보였던 그녀가 사납게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검에 휘감긴 새하얀 섬광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사방을 불살랐다. 그리고 그녀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능력자 역시 푸르고 붉은 기운을 사방에 뿜어대고 있었다.
따뜻하거나, 차갑다. 그리고 뜨겁다.
각기 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 떠오른 것은 분노다. 하찮은 감염자들에게 고전을 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필요 이상으로 기세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형준 역시 저도 모르게 생명력이 솟구치려 했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야."
그때였다. 낯 설은 음성 하나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여인의 음성처럼 간드러지면서도 탁하기만 한 기묘한 음성에 이능력자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1등급 이능력자들이 퍼부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없는 감염자들이 있었다. 수는 정확하게 열 둘. 한명의 감염자도 죽지 않았다.
"어디 하찮은 것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오셨나 했더니."
교태로운 음성으로 지껄이는 감염자의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불길했다. 어둠을 몸에 두른 듯 시꺼먼 기운이 가득한 감염자가 창백한 입술을 비틀었다.
"그냥 쓰레기들이네."
일순간 사방에 적막이 감돌았다. 아야나미 로유미를 비롯한 이능력자들은 감염자의 황당한 모욕에 할말을 잊었는지 입만 뻐끔댔다.1등급 이능력자들을 눈 앞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만했다. 스트리고이-블라가가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오만한 모습을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감히!"
아야나미 로유미가 사납게 일갈했다. 음성에 담긴 기운도 적지 않아 아군까지도 섬찟할 정도의 기운이었는데 감염자는 코방귀도 끼지 않았다.
"너희들 뭔가 착가하나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감염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리를 블라가 따위의 수하로 생각한 거 아니야? 설마 감염자로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리옌제의 앞. 여전
히 이죽거리는 듯한 어조로 불쑥 말을 내뱉은 그가 손을 뻗었다.
"컥!"
리옌제가 기이할 정도로 무력하게 그의 손에 잡혔다.
"우린 감히 너희따위가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존재거든."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그들이 어둠과 닮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작품 후기 내가 이능력자다. 완결 11월 30일.
(비축분 약 30화정도 보유중.)도살자. 재연재 개시 12월 01일.
(비축분 만드는 중.) 완결 12월 31일.
신작. 백야기담 11월 01일 연재시작. (비축분 보유중) 완결 미정.
차질없이 위에 고지한 스케줄대로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