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76화 (176/223)

< --  2-6. 망자의 도시  -- >

수천, 수만은 될법한 감염자들의 파도와 또다시 맞닥뜨린 김형준 일행은 이를 악물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들처럼 밀려드는 감염자들의 모습에 이능력자들이 지쳐갔다.

체력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우스울 정도로 쉽게 무력화되는 감염자들을 처리하는 것은 각국의 내노라하는 능력자들인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다름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감염자들의 모습,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떠들었을 일반인이라는 그들의 정체가 이능력자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제길. 엿 같구만."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지거리.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몇 번째일지 모를 감염자들의 공격 같지 않은 공격을 이겨낸 직후였다.

감염자들이 쏟아낸 피로 진창이 되어버린 벌판이 수렁이 되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실제로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늪을 걷는 듯 발이 무겁

기만 했다.

"하아. 하아."

이능력자들의 숨결이 거칠기만 하다. 감염자들의 무력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지친 모습의 이능력자들이다.

어깨가 무겁다. 발이 무겁다. 숨이 가쁘다.

이능력자들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독스러울 정도의 피로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증세는 직접적으로 감염자들의 피를 손에 묻혔던 1등급 이능력자들이 더했다.

"괜찮아?"

잔뜩 굳은 표정의 민용모가 숨을 몰아쉬는 김형준에게 물었다. 하지만 김형준은 미처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 모습이 기이할 정도로 지쳐 보여 민용모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민용모의 손이 김형준의 어깨를 잡아가다가 이내 멈칫했다. 김형준 뒤로 보이는 능력자들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들이라고 하기엔 비정상적으로 지쳐 보였다.

아야나미 로유미의 얼굴이 시체처럼 파리했다. 항상 쾌활했던 리옌제의 얼굴은 마치 딴 사람처럼 굳어있다. 러셀피터의 얼굴은 마치 밀랍처럼 표정이 없고, 얀크스 뷔텐펠츠와 호라시오 베니치의 얼굴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카탈리나 에란쵸만이 그나마 창백한 얼굴이나마 생기가 있었다.

수천, 수만이 넘는 감염자들을 처리했으니, 그들이 정신적으로 몰린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계에 내몰린 정신 탓에 육체적으로도 피로도가 급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넋이 빠진 모습이라니.

민용모는 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일행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자신을 앞질러 걸음을 옮기는 일행의 모습, 뒤에서 보니 더욱 확연하게 지쳐 보인다. 직접적으로 손에 피를 묻힌 1등급 이능력자들을 제외하고도 다른 2등급 이능력자들 역시 생기 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민용모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몸을 떨었다.

"모두 멈춰!"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일행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발걸음 옮겨갈 뿐이었다.

제길. 이것이었나.

민용모의 입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이 떨려왔지만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누른 채 일행을 앞질러갔다.

일행 앞에 선 민용모의 모습이 어느새 새하얀 갈기를 바짝 세운 늑대의 모습이다. 인간도 늑대도 아닌 기묘한 모습을 한 그의 눈빛이 시뻘겋게 일렁였다. 사람 머리통 하나쯤은 우습게 삼킬 법한 거대한 주둥이가 활짝 열리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크아아아아앙!"

온몸을 떨어대다가 내뱉은 울부짖음은 온 사방을 진동시켰다. 민용모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방금 전보다 배는 길게 들이마신 숨결이 다시 내뱉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

그렇게 몇 번이나 포효가 반복되었다.

시체처럼 비칠거리며 이동하던 이능력자들의 걸음에 조금씩이지만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낯빛이 원래의 빛깔을 되찾고, 축 쳐졌던 어깨가 다시 넓게 펴졌다.

"어라?"

리옌제가 의문이 가득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를 따라 정신을 차린 일행들의 표정에 마찬가지로 의문이 가득했다.

몇 번이나 감염자들을 쓰러트리고, 스트리고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잔뜩 지치고 지친 마음이 당장에라도 쉬라 말했지만 필사적으로 견뎌내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심상이다.

어쩌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감염자들,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학살했다는 죄책감. 그 끈적끈적한 죄악감 속에서 마음 속에 피어올랐던 단 하나의 의지. 스트리고이가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저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나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공교로웠다.

잠시 의문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이능력자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각국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 중에서도 정예.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뭔가 놈이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얀크스 뷔텐펠츠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이능력자들이 몸을 떨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도 분노였지만, 자신들이 싸워야할 상대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놈의 별명은 시궁창의 왕."

아직도 늑대화를 풀지 않은 민용모가 말했다. 묘한 울림이 있는 음성에 일행의 시선이 단박에 집중되었다.

"자기가 있는 수렁의 수렁, 시궁창의 시궁창까지 우리를 끌어내리고. 정신부터 좀 먹히게 하고 지치고 자괴감에 가득한 우리를 그대로 꿀꺽하겠다는 심산이었

을 거요."

끔찍한 사실을 뱉어내는 그의 눈가에 아직도 시뻘건 광망이 번뜩였다.

"제길. 그저 힘뿐인 놈은 아니라는 말이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무력하기만 한 감염자들을 내몰 듯 자신들에게 밀어넣는 것을 보고. 죄책감에 손발이 무거워지고 숨이 막혀오게 만들 작정이었나, 하고 생각해 그 교활한 수법에 이를 악물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라면 그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스트리고이를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등급 이능력자가 이만큼이나 모였는데 상대 못할 놈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이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트리고이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감염자들을 이용해 그들의 정신을 극한으로 내몰고, 정신적으로 지친 그들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

몇 번이나 계속 되었던 감염자들과의 전투가 반복될수록 의식이 희미해졌었음을 깨달은 일행이 이를 악물었다.

민용모 덕분에 다시 깨어날 수 있었지만, 까딱 잘못했으면 넋 놓고 놈의 아가

리에 머리를 들이밀 뻔 했다.

그 섬뜩한 위기감에 이능력자들의 정신이 다시 단단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민용모는 그 모습을 보고 늑대화를 풀었다. 이 정도씩이나 경계를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스트리고이가 다시 수작질을 부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스트리고이에 대한 분노로 한구석으로 밀어넣은 죄책감은 여전하리라. 이 싸움, 이기더라도 여기 있는 이능력자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다.

수만이 넘는 감염자들을 학살하고도 맨정신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정상이 아니었다는 소리였으니까.

염려가 가득 담긴 민용모의 시선이 김형준에게 향했다. 쌍욕을 내뱉으며 부산을 떠는 김도연의 곁에 멈춰선 김형준의 얼굴이 역시나 어둡다. 4등급 이능력자에서 1등급 이능력자로 올라서기까지 그 시간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그다. 수백년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가뜩이나 짧은 인간의 일생, 그 중에서도 아직 젊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의 김형준.

이번 일이 그의 단단히 여물지 못한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네 덕분이다. 네가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김형준이 민용모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어색한 표정이나마 웃음을 내보였다. 그 모습이 의외로 괜찮아 보여 민용모는 마음을 놓았다.

김형준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사지와 벌판을 가득 채운 피웅덩이들. 꽤나 먼 거리였음에도 그의 눈에는 더 없이 선명하게만 보였다.

절로 이가 악다물렸다.

블라가. 네놈만큼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산산이 찢어발기고 그 육편마저 재 하나 남기지 않고 불 살라버리리라.

맹렬한 분노가 김형준의 가슴 속에서 몸을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분노를 내색치 않고 일행을 이끌었다.

"누렇고 빛나는 것을 가늘게 뽑고 뽑아 사방에 두르니 그 너머에서 침범할 것은 세상에 없더라!"

김도연의 나직한 진언과 함께 수십장의 종이조각들이 사방에 흩날렸다. 바람을 타고 치솟던 종이조각들이 허공중에서 불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사의 술법,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처럼 쉽게 마음을 뺏기진 않을 거야."

퇴마사니 영매사니 나름 그 영역에서 이름값을 떨쳤던 김도연이다. 육신 없는 것들이야 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농락하는 것들뿐이니, 나름 그 방면에 도가 텄다고 할 수 있는 그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스트리고이의 수작질에 인식도 못한 채 당해버렸다. 불같은 그녀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사방에 퍼져 나간 가늘디 가는 금실들이 일행의 주변을 완벽하게 감싸 안았다. 말이야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얼굴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으로 보아 꽤나 대단한 술법을 펼친 모양이다.

하긴 부적을 그렇게 소모했으니, 그게 하찮은 술법이어서야 부적이 아까울 지경이다.

김도연의 행동에 일행의 여기 저기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본의 이능력자 미즈히나가 온 사방에 물방울을 뿌리고, 카탈리나 에란쵸가 가볍게 허밍했다. 미즈하나가 뿌린 물방울이 금세 넓게 퍼져 투명한 막이 되어 금줄과도 같은 김도연의 결계 위에 덧 씌워지고, 카탈리나 에란쵸의 허밍에 일행의 정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가 두른 막은 신성한 막. 만약 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더 이상 저희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미약하기만 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은 미즈히나가 금세 아야나미 로유미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미즈히나의 말에 카탈리나 에란쵸 역시 자신이 발현한 이능을 설명했다.

"당분간은 아무도 우리의 정신에 간섭하지 못해요."

그 자신만만한 음성에 과연 1등급 이능력자 다운 패기가 가득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애초에 스트리고이가 부린 모종의 수작질에도 가장 평안한 상태를 유지했던 그녀다. 지금 역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자신만만한 빛이 가득했다.

조금은 호기심이 생긴 민용모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경험이 많으신가 봅니다."

카탈리나 에란쵸가 민용모의 위 아래를 훑어보았다. 일전에는 2등급 이능력자라 신경쓰지 않았다가, 이번의 활약으로 새삼 그를 다시 본 모양이다.

"여자에게 경험이 많다고 하다니, 실례예요."

그 뜬금없는 말장난에 민용모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죄책감과 분노를 억제하고 있는 다른 이능력자들과 다르게 그녀는 완벽한 평정 그 자체였다.

검을 차고 있더니, 사실은 정신계 이능력자였던가 싶어 민용모 역시 그녀 모르게 탐색을 했다. 하지만 1등급 이능력자가 괜히 1등급 이능력자가 아니다.

"그렇게 여자 몸을 훑어보는 것도 실례. 사과하셔야겠는데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일행 속에서 카탈리나 에란쵸의 장난스러운 음성이 퍼져 나갔다.

============================ 작품 후기 늦었습니다. 사죄의 말씀을 백번 드리는 것보다, 완결까지 빠른 연재로 사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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