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75화 (175/223)

< --  2-6. 망자의 도시  -- >

"움직인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이능력자들이 각국의 1등급 이능력자들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등급 이능력자들이 서로간의 시선을 주고 받는 가운데, 그 중심에 김형준이 있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국경이 그대로 뚫려버립니다."

김형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단호한 어투 뒤에 숨겨진 고뇌와 괴로움이 그대로 수면으로 떠올라 이능력자들의 가슴을 옥죄이는 사슬이 되어 버렸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대로 자신들이 자리를 피하면, 뒤에 남은 국경 경비대로는 감염자들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나라들, 얼마나 많은 일반인들이 희생될지도.

그나마 각국의 이능력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국경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던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지옥이 될 것이며, 이를 시작으로 유럽의 얼마나 많은 나라

들이 스트리고이의 영향권에 떨어질지 몰랐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어찌 억조창생을 구하겠는가."

이제껏 가벼운 모습만을 보여줬던 리옌제가 단호하게 말하자, 모두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준 역시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각오를 다졌다.

"전부 여기 남아있도록 해. 이번 일은 우리만으로 충분해."

은연중에 1등급 이능력자들이 자국의 수행원들을 뒤로 물리는 분위기다. 능력이야 이중 쳐지는 이가 하나도 없었지만, 굳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면 자신 하나로 족하다.

수만의 생목숨을 앗아간 업보는 최소한의 이들이 짊어진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1등급 이능력자들의 의식이 공명이라도 한 듯 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2등급 이능력자들을 뒤로 물렸다. 뒤로 물러난 2등급 이능력자들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호한 그들의 태도에 하는 수 없이 뒷걸음질 쳤다.

"나는 빼줘. 미니온들과의 전투라면 지난 시간동안 질리도록 해왔으니까."

괴로운 표정으로 물러서는 이들 사이에서 민용모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망설임 한점 없는 표정이라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해준다.

"저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리디 여린 외모를 지닌 일본의 이능력자 미즈히나가 한발 앞으로 나서다 아야나미 로유미의 제지를 받았다.

"너는 남아 있어라. 앞으로 네가 갈 길에 이런 피 내음은 어울리지 않아."

그녀의 권능은 전투보다는 정화에 가까운 것, 괜스레 나서서 혈로를 걸을 필요가 없었다. 아야나미 로유미의 단호한 말에 금세 울상이 된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다시 물러섰다.

"그럼 이번 전투에 나서는 것은 우리들뿐이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김형준이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이라고 어찌 아무 것도

모른 채 스러져갈 감염자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을까. 다만 다른 이들보다 수양이 깊고 정신이 굳건한 스스로를 인정하고 짐을 나눠들 생각인 것이다.

아야나미 로유미, 리옌제, 러셀 피터, 얀크스 뷔텐펠츠, 호라시오 베니치, 카탈리나 에란쵸. 각오를 다진 이들이 눈짓을 주고 받았다.

"중앙은 제가 맞겠습니다."

그의 말에 일렬로 늘어서 각자 맡을 구역을 나눈다.

그렇게 이능력자들이 피할 수 없는 전투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그래도 인간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던 이들이 많던 감염자들의 파도가 요란하게 들썩였다.

그저 핼쑥하기만 하던 얼굴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고, 움푹 파인 광대 아래로는 푸른 핏줄이 불거져 나온다. 어설프게 움직이던 사지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거북한 소음을 낸다.

단지 태양이 사라졌을 뿐인데, 인세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아귀와도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이능력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어오르는 그 꽃의 향기는 만리를 가리라."

김형준의 입에서 진언과도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제껏 그를 수많은 전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줬던 유물 찔래가시 꽃을 부르는 주문.

그 어느때보다 더욱 비통한 한마디가 끝나는 순간, 그의 전면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줄기들이 쏟아져나왔다.

검붉은 줄기를 탐욕스럽게 꿈틀거리며 온 사방으로 퍼져나간 가시덤불의 숲이 광폭하게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휩쓸어갔다.

이성이 없는 듯 맹목적으로 달려들던 감염자들이 순식간에 사지가 묶이고 비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따르는 감염자들은 망설임 한점없이 그 가시덤불에 몸을 던졌다.

"... 피어.. 라..."

그 끔찍스러울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에 김형준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온 세상에 혈화가 피어난다. 검붉은 피를 머금은 수천송이 혈화가 피어나고 짙은 혈향이 온 세상에 퍼져나간다. 그 지독스러울 정도로 깊은 생명의 향기에

김형준은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수십년을 맡아온 혈향이 지금만큼 역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 피냄새가 거북한 것인가. 아니면 저 너머에 스러져가는 감염자들의 최후가 거북스러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가시덤불 숲이 탐욕스럽게 피를 빨아대는 것이 거북한 것일까. 마치 시궁창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충만해져가는 활기에 더욱 역한 기분이 되었다.

아찔한 기분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직시했다.

민용모가 루마니아에 들어서기 전에 했던 말이 그의 귓가에 환청처럼 스쳐갔다.

'놈은 악마야. 그리고 악마를 잡으려면 우리도 악마가 되어야지.'

이것이었나, 용모.

핏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감염자들이 몸부림이 잦아드는 것을 노려보던 김형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곳에서는 아직 괴성이 한참이건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최후의 감염자가 던진 단발마 마저 사라져가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게 놈이 바란 것이겠지."

어느새 다가선 민용모가 김형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제 시작이야."

어설픈 위로 대신 던져진 한마디에 김형준의 표정이 조금씩 평온을 찾아간다.

"그래, 이제 시작이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더욱 험난할 것을 깨달은 그의 의식이 수면 아래로 깊게 침잠되었다.

비통함, 안타까움, 죄책감.

온갖 것들이 버무려져 있던 암울한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오직 단 한가지, 분노만을 내비친다.

"이것이 네 환영인사라면, 잘 받았다."

김형준의 눈이 저 너머를 노려보았다.

김형준과 민용모가 자신이 맡은 구역을 일소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이능력자들은 자신의 구역을 정리할 수 있었다.

수만에 달하는 감염자들을 불과 한시간도 안 되어 소탕했지만, 어느 하나 기쁜 기색을 떠올리고 있는 이가 없었다.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지만 수천의 목숨을 취하고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 자체로 이미 인성을 상실한 것이리라.

음울한 표정을 지은 1등급 이능력자들이 자국의 수행원들에게 돌아오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다른 이능력자들이 말 없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수천 생명의 업을 어깨에 짊어진 1등급 이능력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런 시선에 1등급 이능력자들이 오히려 어깨를 펴고 자국의 이능력자들을 토닥여준다. 그렇게 그들은 루마니아에 도착한 첫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루마니아로 진입한 인원들이 수만이 넘는 감염자들을 소탕했답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보고를 하는 남자의 모습에, 캐더린이 눈을 크게 떴다. 곁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녀를 대신하여 말을 받았다.

"실질적인 작전 시작일이 오늘이지 않았던가?"

사내의 말에 보고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인원들이 이틀 먼저 루마니아 국경 내로 들어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후발대와 합류하고 제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오

늘입니다."

남자의 말에 캐더린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스트리고이... 생각보다 교활하고 성질이 나쁜 놈이군요."

캐더린이 쓰게 내뱉은 말에 곁에 있던 사내가 대꾸했다.

"뭐, 이 정도로 무너질 놈들이라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심드렁한 사내의 말이 캐더린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 캐더린의 고운 미간이 잔뜩 좁혀지고, 그녀의 어조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수만의 생목숨입니다. 선택을 강요받았어야 할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래도 캐더린은 스트리고이의 교활한 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시간만 있었다면 원상태로 되돌리는 게 가능할 지도 몰랐을 감염자들이에요. 그런만큼 그들은 감염자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였겠지요. 수만의 인간을 자신의 손으로 학살한 셈이라고요!"

사내는 캐더린의 날 선 어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다.

"어차피 되돌릴 방법도 없다면서. 그럼 뭐 괴물인 거지. 수만 살리자고 수백만 죽이는 놈이 오히려 미친놈이지."

도무지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의 말에 캐더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지.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과연 그대로군요."

캐더린의 말에 필립 핸리 셰이던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과거 이야긴 하지 말자고.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니까."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인디언들을 학살한 사내답게 그는 오히려 기꺼운 표정으로 캐더린에게 이죽거렸다.

"이 작전이 끝나면 추모비라도 하나 세우라고 하던가 그럼."

작전의 시작부터 수만의 희생자가 생긴 루마니아.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감염자들과 일반인들이 그 여파에 휘말려들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지껄이는 말 치고는 지독스럽게 생명을 하찮게 취급했다.

캐더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사내쪽으로는 시선을 주지도 않고, 보고를 하고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탕에 나선 것은 대한민국의 김형준을 비롯한 각국의 1등급 이능력자들 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말에 그녀가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타국의 이능력자들이지만 존경 받을만 하군요. 스스로 가시관을 쓰다니."

그들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캐더린의 말에 남자가 막힘 없이 보고를 이어갔다.

"현시각 감염자들과의 전투가 있었던 지역으로부터 50키로미터 가량 북상하여 루마니아 중심을 향해 빠르게 이동중입니다."

의외로 바로 행동을 개시한 이능력자들 탓인지 캐더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말했다.

"과연.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려면 그러는 것이 좋겠죠. 어차피 스트리고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이 사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캐더린의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남자는 곁에서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립 핸리 셰이던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위성으로 확인한 결과 그들은 세시간 내로 또 다른 감염자 무리와 만나게 됩니다. 알려줄까요?"

남자의 말에 필립 핸리 셰이던이 코웃음을 쳤다. 이능력자들의 상황에 안타까워 하던 캐더린도 이때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녀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보고를 이어가던 사내. 필립 핸리 셰이던은 오히려 낄낄거리며 박장대소했다.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말고, 보고만 하도록 해요."

보고를 이어가던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고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작품 후기 연참 공수표를 날린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늘 그렇듯이 일은 불시에 벌어지더라고요.

현재 제 사무실이 건물의 전면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물주인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매장을 하나 들일 것이라며 제게 사무실을 옆으로 옮기고 축소하라고 하시더군요.

뭐 갑이 가라면 가야지 별 수 있습니까. 하루 종일 사무실 옮기느라 글을 이제야 쓸 수 있게 되었네요. 덕분에 또다시 독자님들께 드린 연참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오늘 하루는 업무 포기했으니 열심히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다 쓰는데로 한편 더 업뎃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옥희가 단이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많이 아플텐데 고민 정말 많이 하다가 결국 하기로 했는데, 제 욕심에 괜히 고통을 주는 것 같아서 내내 마음이 좋지 않네요.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신나서 차에 오르던 옥희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포경수술 가는 것도 모르고 신나 날뛰는 아들내미 보는 기분이기도 하지만, 미안함이 더욱 커서 속이 무척 상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이수술을 강행한 제 자신이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아마 도고 아르헨티노라는 종이 당연히 단이를 해야 한다고 클럽에서 세뇌를 받은 모양입니다.

여튼 그렇습니다. ㅜㅜ*카탈리나 에란쵸를 아는 분이 계시다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껄껄 후안 카스트로도 기억이 나시는지요. ㅋㅋㅋ 저는 고전게임 매니아라 지금도 고전게임은 소장중이랍니다.

*카탈리나 에란쵸를 아는 분이 계시다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껄껄 후안 카스트로도 기억이 나시는지요. ㅋㅋㅋ 저는 고전게임 매니아라 지금도 고전게임은 소장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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