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74화 (174/223)

< --  2-6. 망자의 도시  -- >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에 날고 기는 이능력자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추위와 더위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이들이건만 갑작스럽게 느껴진 한기에 몸을 떠는데, 민용모가 주변을 둘러 보며 다시 말했다.

"앞으로 이 이름을 부를 때는 주의해줘. 지금 느껴지는 한기가 보통 한기는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도 놈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릴 수도 있으니까."

민용모의 설명에 의하면 시궁창의 왕 블라가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의 존재가 더욱 명확해진다고 한다.

"아니, 제 놈이 무슨 신령스러운 존재라고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으로 그 난리야."

김도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지껄이자 민용모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지금은 정말 신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도시의 어둠에 숨어살 때도 강력한 놈이었는데 이렇게 나라 몇 개를 집어 삼켰으니 그 힘이 얼마나 늘었을지 상상도 안 가."

적의와 함께 느껴지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 어조에 은근하게 깔려 있었다.

"놈이 이번 괴수 등장과 관련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냥 혼란을 기회로 삼아 난동을 피우는 건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둬."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늑대인간족의 전사가 내뱉는 경고에 하나같이 얼굴 표정을 굳혔다.

"놈 덕분에 우리 하얀 갈기 부족도 유럽을 횡단해 아시아까지 흘러들어 간 거니까."

끝에 가서는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고 투지와 맹렬한 증오만이 남은 민용모의 한마디에 일행들이 각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제 막사로 돌아갔다.

모두가 막사가 돌아가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민용모의 태도에 김형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의 질문에도 한참이나 망설이던 민용모가 입을 열었다.

"형준아."

민용모의 말투가 어찌나 무겁던지 김형준이 영문도 모르고 얼굴을 굳혔다.

"이번 작전 아마 쉽지 않을 거야."

잔뜩 긴장해있던 김형준이 그 말에 피식 실소를 지었다.

"1등급 몬스터야. 단 한 번도 쉽게 잡은 적 없었어."

그간 그렌델과 미노타우르스를 거치며 단단해진 그의 정신이 민용모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런 김형준의 표정을 지긋이 바라보던 민용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까지 봐 왔던 그 어떤 광경보다 더 비참한 광경을 볼 거야."

그 진지하기 이를데 없는 말투에 정색을 한 김형준이 민용모와 눈을 마주쳤다.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보인 적이 없던 용맹한 늑대인간이 염려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껏 봐왔던 그 어떤 죽음보다 많은 죽음을 보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 광경은 분명 너를 평생 옭아맬 거야."

민용모의 말에 김형준이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각오하고 있어."

김형준이 대답했지만 민용모는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각오 정도로는 부족해."

말을 멈춘 민용모가 잠시 스트리고이-블라가가 있을 북쪽 하늘을 노려보았다.

"놈은 악마야. 그리고 악마를 잡으려면 우리도 악마가 되어야지."

그 지독스러울만큼 스산한 말을 김형준이 몸으로 체감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인근 국경지대의 감염자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참가한 그들은 무려 수백의 감염자를 더 걸러내고 나서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불가

리아 공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국경을 넘은 일행들은 국경 바로 너머에서 유럽의 이능력자들과 합류할 수 있었는데, 그 면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이올시다."

낯 익은 얼굴이 김형준을 알은 체 한다.

"베오울프경."

그렌델과의 전투에서 안면을 익혔던 베오울프가 김형준을 반갑게 맞이했는데, 그 뒤에 늘어선 이들 중 낯이 익은 얼굴들이 제법 눈에 보였다.

"잘 지내셨어요?"

그리스 유게네스의 메데이아 역시 이번 작전에 합류했는지, 그녀가 수척한 얼굴로 일행을 반겼다.

지난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들이기도 한 탓에 김형준 일행이 잠시 부산을 떨며 서로의 인사를 묻는 사이에 폐가에 숨어있던 또 다른 일행들이 얼굴 내밀었다. 그들은 새롭게 합류한 일행을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 중에서도 거인학살자로 명성이 높은 김형준을 보고 흥분을 금치 못했다.

동그란 얼굴이 소녀같기만 하지만 키가 어지간한 남자와 맞먹는 여인은 프랑스에서 온 1등급 이능력자 쟈베트 샹피뉴, 장신에 어울리는 긴 장검을 등에 맨 그녀가 어린 외모만큼이나 수다스럽게 김형준을 반겼다.

그 정신없는 수다스러움에 일행들이 곤혹스러워 할 틈도 없이 속속들이 다른 일행들이 모습을 보였다.

붉은 곱슬머리와 요염한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스페인의 1등급 이능력자 카탈리나 에란쵸를 필두로, 독일의 1등급 이능력자 얀크스 뷔텐펠츠, 이탈리아의 1등급 이능력자 호라시오 베니치.

앗시리아인의 피를 이었는지 새하얀 얼굴에 냉막한 인상이 인상적인 얀크스 뷔텐펠츠가 무덤덤한 태도로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화려한 복장을 한 호라시오 베니치가 일행들, 그 중 여성 이능력자들에게 과할 정도의 반가움을 표했다.

"어라? 이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새롭게 합류한 일행들의 수가 예상외로 적자 리옌제가 의아함을 표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탐색차 근방을 도는 중입니다. 저희도 이곳에 도착한지

이틀이 채 안되거든요."

호라시오 베니치가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아야나미 로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껏 사근사근하던 태도를 보이던 아야나미 로유미는 어찌 된 일인지 그의 태도에 얼음짱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네명의 1등급 이능력자들과 수행원들을 포함하여 스물이 넘는 일행이었지만 2등급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근방의 탐색을 나가 있는 탓에 폐가에는 1등급 이능력자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라 전체가 음산합니다. 이 곳에 들어온 이후로 햇빛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이능력자들이 하늘을 바라보니 과연 먹구름이 잔뜩 끼어 이른 시간임에도 저녁이라도 된 듯 사위가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일행들이 서로 소개를 하며 정보를 주고 받는 사이 탐색을 나갔다던 일행들이 돌아왔다.

"이쪽은 아시아에서 온..."

아시아의 이능력자들과 소개를 시켜주려던 쟈베트 샹피뉴가 그들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이들이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뭔가 발견한 건가?"

얀크스 뷔텐펠츠가 냉막한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그들을 다그쳤다. 그와 마찬가지로 앗시리아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네. 발견했습니다."

그가 턱짓으로 대답을 재촉하니, 사내가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근데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그가 답답했는지 뒤에 있던 또다른 이능력자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답답하기는. 저희는 이 근방 50키로미터를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셀 수도 없

는 감염자들을 발견했지요."

자신을 독일의 2등급 능력자라 소개한 이능력자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루마니아는 지옥입니다."

쉴 틈도 없었다. 새로운 일행과 합류한 아시아의 이능력자들은 탐색결과를 듣고는 바로 그들을 길잡이 삼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끄응..."

누구의 입에서 나왔을지도 모를 침음성이 일행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이건 말이 안 나오는군요."

이제껏 냉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아야나미 로유미가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각국의 정예 이능력자들이 침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덮어놓은 듯 부자연스러운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가리고 있는 아래, 수만은 가뿐히 넘을 듯한 인간들이 홀린 듯이 자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부 감염자인 건가..."

밝고 쾌활한 성격의 리옌제마저도 이번만큼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수만이나 되는 감염자들의 행렬은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릴 만큼 끔찍했다. 대다수가 멀쩡한 인간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을 유지 하고 있었지만,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이 예사고 온몸이 뒤틀려 인간이 맞는지조차 모호한 이들이 감염자들의 행렬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그들의 공통점은 벌겋게 충혈 된 눈빛과 날카롭게 돋아난 송곳니 사이로 흐르는 침이었다.

김형준이 저도 모르게 민용모를 힐끔 쳐다보자 마침 김형준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말 했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피가 넘칠 거라고."

김형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알 수 없는 기류 탓에 항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에서 스트리고이-블라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육로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육로를 수 많은 감염자들이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이동경로를 짐작이나 했음직 하군요."

이제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인도의 1등급 이능력자 러셀 피터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루마니아의 인구가 무한정이 아닌 이상에야 루마니아 전역에 이렇게 감염자들이 포진되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스트리고이가 어떠한 수단을 썼든지 간에 이들의 행로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루마니아의 광경에 일행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뚫고 나가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민용모가 말 끝을 흐렸다.

그의 말대로 이 자리에 모인 이능력자들이라면 평원에 모인 수만의 감염자들을 일소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염자들을 쓸어버리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인간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전에 인간이었었다는 사실과 어쩌면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의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 죽일 수도 없고, 이대로 우리가 지나쳐 가면 아마 국경이 뚫리겠죠?"

며칠의 시간을 머물렀던 국경의 경계인원이 떠오른 그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이능력자들과 군인들의 혼성부대라 전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 정도의 감염자들이 몰려간다면 막을 방도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골치 아프군요."

루마니아로 들어선 이후 부쩍 표정이 차가워진 아야나미 로유미가 이를 악물었다.

이능력자들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힘으로 이들을 쓸어봐야 남는 것은 자신들의 금 가버린 신념과 마음이라는 것을.

스트리고이만 아니었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을 법한 일반인들이다. 이들을 다 죽여서야 자신들의 정신이 온전하게 버틸 수 없었다. 나름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지만 수만의 일반인을 학살하고서도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감염자긴 하지만..."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단박에 모여드는 사나운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스트리고이의 환영인사인가."

김형준이 쓰게 내뱉었다.

"정말 지옥이로군."

종말이 온다면 이런 광경일까. 수만이 넘는 망자들의 행렬에 김형준을 비롯한 이능력자들의 표정이 더 없이 무겁다.

세상을 들어 엎을 능력을 가진 이능력자들이지만 수만의 감염자들 탓에 처음부

터 발이 묶여 버렸다. 머리로는 그들이 감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그들을 인간이라 인식하고 있는 이상 그들의 발길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행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사이에 먹구름 뒤편의 해가 조금씩 저물어간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먹구름 아래를 비춰주던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자 감염자들의 행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자꾸 휴재를 하게 되네요.

이제 섬머타임이 시작되어 한국과 시차가 정확하게 열두시간입니다. 앞으로 업뎃에 한결 여유가 생길테니 휴재는 최대한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재동안 생긴 벌충분은 오늘 연참으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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