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72화 (172/223)

< --  2-6. 망자의 도시  -- >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국경을 제대로 막지 않았던 국가들은 이미 국토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고, 국민들의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현지의 이능력자가 변명과도 같은 말을 해댄다.

"저 중에 스트리고이의 통제를 받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아야나미 로유미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물으니, 일행들의 시선에 조금은 주눅이 들어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상태로 구금해둘 거죠?"

그녀의 질문에 날이 서있다. 감히 본 적도 없는 1등급 이능력자의 서슬퍼런 시선에 남자가 한참 진땀을 빼고 있을 때, 김형준이 나섰다.

"그만하시죠. 다른 방법이 없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형준 본인의 표정도 편치는 않았다. 뭐라 더 말을 하려던 아야나미 로유미가 김형준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까지의 대화가 대부분 영어였던 관계로 자세한 대화내용까지는 알아들을 길이 없던 일행들이 각자 소곤거린다.

김형준은 그런 그들을 슬쩍 둘러보고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 하얀 막을 잠깐 해제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김형준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빛이 떠오른다.

"음, 갑자기 들이닥쳐서 마음대로 막을 지워버릴 수도 없고..."

김형준의 혼잣말에 뒤에 쳐져 있던 김도연이 한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거 오래 못 갈 거 같은데, 그냥 없애버리고 새로 치죠?"

나름 사람들 앞이라 말을 올리는 모양새가 꽤나 우스꽝스러워 김형준이 상황도 잊고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김도연의 눈썹이 솟구쳤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 제 성질대로 난동을 피우진 못했다.

"방법이 있어?"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도연의 얼굴에 김형준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역시 단순한 성격의 그녀답게 금방 표정이 풀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허접한 거 말고 제대로 내가 칠 수 있으니까, 뭔가 짚이는 게 있으면 확 찢어버려요. 이런 막 따위."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곁에 있던 남자에게 의향을 물었다.

"이 막 해제해도 되겠습니까? 볼일이 끝나면 제 일행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을 겁니다만."

조심스러운 그의 질문에 남자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1등급 이능력자들 중에서도 거인살해자, 미노타우르스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남자가 너무 평범한 이능력자였던 모양이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김형준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그저 장난 같은 손짓이었을 뿐이지만 결과는 결코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의 손 끝에 닿은 하얀 반구가 그대로 찢겨나갔다.

김도연은 허접스럽다 표현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하얀 반구가 너무도 손쉽게 찢겨나가자, 일행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뱉었다. 김형준을 안내했던 남자가 그 모습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일행들의 면면이 지나치게 대단해서 그렇지 남자 역시 이쪽 경계에서는 책임자 급에 가까운 3등급 이능력자였다. 그런 남자가 상관으로 모시는 이능력자가 공들여서 친 결계를 너무도 쉽게 해제해버린 김형준의 능력에 그 역시 탄성을 내뱉었다.

일행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김형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반투명한 막이 사라지자 한층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온다. 며칠을 씻지를 못했는지 잔뜩 지저분해진 몰골을 한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해 마치 뉴스에서 본 난민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저희 탓이 아니라 저 사람들 올 때부터 저런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이

곳에 억류된지 이제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요."

일행들이 또다시 남자를 사납게 노려본 모양인지 김형준의 등뒤로 남자의 변명이 들려왔다.

엄마의 품에 꼭 안긴 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 푸석푸석한 금발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추래한 꼴의 사람들이 오들오들 떨며 자신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연민이라도 생길만 하건만, 김형준은 처음과는 다르게 냉정한 표정으로 그들을 하나 하나 날카롭게 살펴본다.

당장에라도 뭔가를 할 것 같았던 김형준이 막상 막을 해제하고 나자 아무런 행동이 없으니 일행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 안에서 김형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언제 멈춰있었냐는 듯이 막상 움직이기 시작한 김형준의 걸음이 거침이 없었다.

"마스터 킴?"

일행들 중 누군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김형준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일가족의 앞에 섰다.

"아이를 이쪽으로 건네주십시오."

어미의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여자 아이가 김형준의 말에 어미의 가슴 속으로 더욱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비록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모습을 했지만 결연한 표정을 지은 사내가 김형준의 앞을 막았다.

"우리 아이는 왜..."

아이의 아버지인지 김형준의 앞을 막고 선 그의 표정이 조금씩 사나워진다.

"해치지 않습니다. 걱정 마시고 아이를 이쪽으로 건네시고 저쪽으로 따라 나오시죠."

김형준의 난데없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주의 깊게 일가족을 살펴보았다. 김형준의 위엄에 눌린 것인지, 해치지 않는다는 말에 넘어간 것인지 일가족이 비틀거리며 김형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제가 안고 있을게요."

잔뜩 갈라지고 날이 선 음성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워낙에 겁에 질린 눈빛이라 김형준도 더는 권하지 못하고 그녀와 가족들이 일어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쪽으로."

김형준이 손으로 일행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자 일가족이 망설이면서도 군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들이 혹시?"

리옌제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일가족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찾지 못하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김형준에게 물었다.

"금방 알게 될 겁니다."

리옌제에게 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일행 전체에게 하는 말이라 리옌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천성이 가벼운 그의 입장에서는 호기심을

참기 힘들었는지 입가가 몇 번이나 실룩였다.

"당신들도 저쪽으로 가세요."

처음의 일가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중에 지목당한 남녀도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남녀가 일행들의 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던 김형준이 다시 시선을 돌려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릴 수 있는 건 이들 뿐인가..."

안타까움 가득한 그 어조에 사람들이 주저앉아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트리고이에게 감염되지 않은 이들은 그 가족과 남녀뿐입니다."

그의 말에 일행들이 눈이 크게 떠이는 찰나,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사람들이 돌연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끼에에엑!"

도저히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른 그들이 일제히 온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저들이 스트리고이의 감염자들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김형준의 말에 표정이 돌변하며 온 사방에 튀어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걸음 채 떼기도 전에 사방으로 튀어나가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임을 멈췄다.

"놈이 어떤 방식으로 감염을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김형준의 몸을 기점으로 어느새 돋아난 검붉은 줄기들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다. 마치 가시덤불의 숲이 솟아난 양 그의 주변이 온통 검붉은 줄기와 가시들 투성이다.

"이들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연민의 빛이 가득한 시선으로 여전히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고 있는 사람

들을 살펴본 김형준이 자리를 벗어났다.

"도연, 부탁할게."

잠시 김형준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던 김도연이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품을 뒤져 종이 쪼가리 몇가지를 꺼내들었다.

"헐겁고 헐겁지만 놓치는 것 하나 없는 하늘의 그물이여, 지금 이 자리에 현현하여 벗어나는 것 하나 없게 해주소서. 천신의 그물!"

낮은 읊조림에 괴성을 내지르고 있던 사람들 주변으로 푸른 빛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그녀의 진언이 끝나는 것을 확인한 김형준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찔레가시를 거두어 들였다.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가시덤불이 사라지자 감염자들이 곧바로 몸을 날렸지만, 보이지 않는 막에라도 부딪친 듯 제 자리로 튕겨나갔다.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일렁이던 푸른빛이 조금씩 범위가 작아지며 감염자들이 한 자리로 내몰렸다. 이제는 몸 하나 꿈쩍할 틈도 없이 조여드는 보이지 않는 막에 감염자들은 그저 괴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어.. 어떻게?"

처음부터 김형준을 향해 경탄의 시선을 보내던 남자가 이제는 경탄을 넘어 찬양의 빛을 띤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제 이능이 피와 생명력에 관계된 것이라 알았을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였지만 남자는 감염자들을 식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위 이능력자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남자였지만 김형준은 대답해줄 생각이 그다지 없는 듯했다.

"그럼 이들은 멀쩡한 이들이라는 건가요?"

아야나미 로유미가 안쓰러운 눈으로 비감염자로 구분된 사람들을 살펴보며 물었다.

"네. 일단은."

"일단은?"

그 애매한 말에 사람들이 궁금증을 표하기도 전에 김형준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겨 일가족 앞으로 나섰다.

"당신들은 이제 안전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이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아직까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남자에게 그가 눈짓을 보내니 그가 고개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감염자들을 식별할 수가 없어서 시설 자체는 텅텅 비어 있습니다. 다섯이 아니라 오천명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남자의 말에 그제야 일가족과 남녀의 표정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여인이 품에 안은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별 말씀을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김형준이 그렇게 말하며, 여인에게 다가섰다.

"한번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저도 고국에 두고 온 딸이 있어서. 아이가 무척 이쁘네요."

김형준에게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기 바쁘던 여인이지만 아직까지 안심

이 되지를 않았는지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아이도 놀랐을텐데 엄마 품이 제일이지."

곁에 있던 리옌제가 이죽거렸지만 김형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혹시 아이의 몸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니 잠시만 살펴보면 됩니다."

김형준의 말투가 워낙에 다정했던지라 여인이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김형준을 향해 아이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쁜 아이는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혹시라도 김형준이 아이를 떨어트릴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의 등을 받치고 있던 여인이 뒤늦게 손을 떼어냈다.

"그런데 이런 이쁜 아이를 인질로 쓰려고 하면 됩니까?"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김형준이 여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그 난데없는 말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크아아앙!"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괴성이 터져 나오며 새하얀 그림자가 여인을 덮쳐간다.

============================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맨날 후기로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도 죄송하고 이제 면목이 없습니다. ㅜㅜ갑작스레 지방으로 출장을 1주일이나 다녀오게 생겨서 급하게 다녀오느라 공지도 못하고 휴재했습니다. 가족 사업중에 섬유쪽 하는 게 있는데 그쪽에 사고가 생겨서 수습차 다녀오느라 ㅜㅜ이제는 죄송하다는 말씀도 못 드리겠네요. 진심 ㅜㅜ*강아지는 제가 출장 간 사이에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돌아오니 스트레스가 쌓여 지랄견이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어제 돌아와서 바로 놀아주고 산책 다녀와서 다시 얌전한 놈이 되었습니다. ㅎㅎㅎ

책 다녀와서 다시 얌전한 놈이 되었습니다. ㅎㅎㅎ*완결까지 38편 남았습니다. ㅎㅎㅎ 스트리고이 편은 존재가 잊혀졌던 캐릭터들이 대거 활약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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