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68화 (168/223)

< --  2-6. 망자의 도시  -- >

현지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서늘해진다. 가뜩이나 노심초사 혹여 탈날까 무서워 업어 키우는 연아다. 비록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연아 안에 무언가 좋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무슨 말이야?"

다그치는 투가 되어 현지가 자극을 받을까봐 걱정이 된 모양인지, 내 말투가 초조하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현지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연아를 안아들고 이리 저리 흔들고 있었다.

찝찝한 기분이 되어 현지를 한참이나 살펴보는데, 지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그녀 역시 무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시 현지를 보니 계속해서 좀 전의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애가 한 말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그래. 정신도 성치 않은 앤데."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도연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스쳐가듯 한 이야기고, 그 이야기를 한 장본인이 정상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현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 자꾸만 커져가는 것은, 부모가 된 이들의 기우일까.

잠시 현지의 품에 안겨있는 연아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자, 그럼 허준영 도맥주가 있는 곳으로 슬슬 가볼까?"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애써 활기차게 말하니, 그제야 지현도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허준영이 있는 곳은 도맥의 수행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한참이나 더 들어가야 했다.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지 뭐 이런 곳에 숙소를 마련했나 싶을 정도로 깊은 산속에 위치한 그의 거처에 도착한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였

다.

정말로 심산유곡이구만.

마치 한폭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초옥 한 채, 계곡과 산자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그럴싸한지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잠시 주변의 정경을 눈에 담고 있는 사이에 도연이 초옥에 다가서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잠시 뒤 허름한 문이 열리고 허준영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실로 의외였다. 늘 보아왔던 도복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에 면티 한 장 걸친 모습이라 마치 새내기 대학생과도 같은 모습이다.

"아, 도복도 익숙해지면 편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옷은 요즘 옷이 더 질이 좋아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모습이 이질적이기만 한데, 황당하게도 신발까지 브랜드의 운동화였다.

외출을 할때는 도복 차림이더니 정작 도복이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초옥에서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지독스럽게 이질적이었다.

"뭐... 잘 어울립니다."

그의 겉모습이야 어찌 됐건 간에 그를 찾아온 목적이 있어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그가 초옥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겉보기처럼 크지 않은 초옥이라 안내차 따라왔던 도연이 현지를 데리고 돌아가고, 나와 지현만이 여섯평도 채 되지 않는 방에 들어섰다.

"물어볼 것들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용건을 꺼냈다. 내 태도에 허준영이 그 조바심을 책망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아마, 여러 가지 돌아가는 정황상 내가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은 모양이다.

"궁맥과 비맥은 믿을만 한가요?"

내 질문에 허준영이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 말인지?"

허준영이 던진 온화한 질문에 나는 숨김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모든 면에서 다요."

지난 맥의 회합에서 보여준 그들의 태도는 뭔가, 지현과 허준영같은 초월적인 분위기와 천지차이였다. 마치 유니온의 간부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했던지라, 일이 진행이 되는 와중에 결국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허준영을 찾아온 것이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래. 검후께서는 뭐라던가요."

허준영이 미간을 좁히며 이야기 하자 지현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많지 않다. 그대도 알다시피 검맥은 수련일로를 걷는 자들의 모임, 그 가는 길이 칼 한자루를 의지해 가는 길이라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지."

그녀가 말하니 허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야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접하고 살 수 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검맥의 사람들은 산에서 나오는데 꺼려지는 것이 많았겠죠.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검맥의 수련자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오직 환란의 시기뿐

이란다. 평소에는 괜한 시비로 인해 살생을 하게 될까봐 모두들 하산을 꺼린다니, 지현의 성정이 순수한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음. 일단 질문에 대답하자면 반반입니다."

전혀 의외의 대답이라 내가 눈을 크게 뜨는데, 허준영이 계속해서 설명한다.

"인격적으로 보자면 믿을만 합니다. 비록 당신이 보기에 그들이 탈속적이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 분위기라 믿음이 안 갔을 테지만 그들은 믿을만한 이들입니다."

의외로 이기적이고 거칠었던 그들의 태도가 떠올랐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허준영이 그들에 대해서 잘 알 테니.

"궁맥은 한때 관에 깊게 관여하며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던 시기까지 있던 인물들입니다. 그런 탓에 저희 같은 수도자와는 다르게 군인의 성정을 지니게 된 것이고. 비맥의 인물들이야 겉으로 보이는 성격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니 아마 특별할 것 없어 보였을 테지요."

여러 가지 설명을 들으며 나는 도리어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허준영은 그들을 반정도는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했다.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다면, 나머

지 믿음이 안 가는 부분이 어디일지 짐작이 간다.

"오히려 그들이 지닌 재주가 못 미덥다고 해야 할까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들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니, 나는 침음성을 삼켜야 했다. 앞으로 천개의 눈동자라는 대적을 맞아 함께 싸워야 할 전우가 힘이 부족하다니, 차라리 인격적으로 믿음이 안 가더라도 능력만 있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맥의 경우 당시의 관과 너무 가깝게 지냈던 탓에, 여러번의 환란을 거치며 뛰어난 무인도 비전의 궁도도 많이 잃은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궁맥주야 당신들 기준으로 1등급 이능력자라는 기준에 모자라는 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정도의 비기를 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분명 기세만큼은 대단했던 궁맥주였지만, 허준영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비맥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원체 베일에 가려졌던 일맥이라 자기들끼리도 연락이 끊기기 일쑤랍니다. 지금은 얼마만큼의 비기가 전수되고 있을지 의문이네요."

그 뒤로 쭉 이어진 이야기 역시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수련일로를 걷던 검맥이나, 유연하게 시류를 탄 도맥과는 다르게, 일찍부터 색이 진하게 정해졌던 궁맥과 비맥의 경우에는 소실된 비기가 너무 많아 기대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다.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진즉부터 정해져 있었다. 현 상황에 대처할 능력은 충분히 되나 최후의 결전에 얼마나 힘을 쓸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것.

결국 마음의 짐을 덜러 왔다가 더욱 무겁게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보다 현지가 많이 좋아졌네요?"

끝난 이야기에 인상을 쓰고 있어봐야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라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내 말에 허준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 참사에서 입은 정신적 충격도 충격이지만 각성이 강제로 이뤄진 꼴이라 그 그릇에 금이 많이 가 있었지요. 저희는 그릇의 회복에 주력했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야 아무래도 천천히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회복이 될 테지만, 금이 간 그릇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힘이 사단을 일으킬까 염려 되어 그릇의 재구성에 힘을 쏟아 부었단다.

"지금 필요한 건 시간일 뿐이지요."

도맥주 다운 도인스러운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작스레 현지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잠을 잘 자는 연아라도 품에 안겨 너무 오랜 시간을 자고 있는 듯해 지현을 바라보니 그 품에 안긴 연아가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 있다.

"그보다 현지가 이상한 말을 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허준영에게 물으니 그가 잠시 연아를 살펴보다가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일단 현지가 조금 특이한 존재긴 하지만, 딱히 예지나 심안을 지닌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정 신경쓰이신다면 제가 현지랑 다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허준영이 이따금씩 연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뭔가 이질적이어서 그런 기분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허준영이 내린 축객령에 그대로 초옥을 나서야 했는데,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찝찝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는 내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 계획한 일들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와중이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사과를 하고 처벌을 자청하는 관료들의 행진이 연일 이어지는 시국에서 언제 돌발적인 변수가 터질지 모른다.

막말로 그렇게 닳고 닳은 관료들이 협박 한번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말아먹었으니,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까. 모든 경로에서 취해질지 모를 도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와중에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지난 뉴스에서 보았던 루마니아의 1등급 몬스터 퇴치성공에 대한 방송이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스트리고이에 의해 루마니아 전체가 먹혀버린 참담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스트리고이는 몬스터 주제에 교활하게도 잠시 시선을 돌리고자 스스로의 죽음을 위장한 것이다. 그것도 인간들의 통제해 매스컴을 이용했으니 이제까지 만나왔던 1등급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음험함이다.

당장에 벌여놓은 일들이 워낙에 많은지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야

훗날 천개의 눈동자와 싸울 때 그들의 조력을 구할 명분이 사라진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승낙해야 했는데, 그 이전에 멀지 않은 시간 후에 이뤄질 천개의 눈동자 퇴치에 실질적인 조력을 확언 받았다.

루마니아 인접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대번에 승낙을 했고, 그 외의 국가들도 여러 가지 조건을 걸긴 했지만 협조요청을 승낙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격류에 휘말린 대한민국의 시국을 뒤로 하고 루마니아 행을 서둘러야 했다.

언제나처럼 용모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고 가기에는 다른 이들의 위명이 전부 쟁쟁한지라, 어쩔 수 없이 지현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1등급 이능력자들인 궁맥주와 비맥주 도맥주 앞에서 용모가 제대로 기를 펼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마침 지현이 있어서 다행이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겸 서재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근두근.

그 거센 박동음에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장어림에 손을 얹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데 다시 한번 힘찬 박동음이 들려왔다.

두근!

내 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나는 책장의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두근두근!

또다시 들려오는 박동에 나는 망설이다가 책장을 젖혀 그 뒤에 숨겨진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내 손이 닿자 더욱 힘차게 요동을 치는 심장 뛰는 소리에 이제는 상자가 덜덜 떨릴 지경이다.

마른 침을 삼키며 상자를 열자 새빨간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전보다 두배는 커진 심장이 상자에 끼어 힘차게 박동을 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모습을 드러낸 미노타우르스의 심장이 더욱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먼저 휴재에 사과드립니다. ㅜㅜ과음을 하고 나니 머리가 아파서 글을 못쓰겠더라고요. 그 뒤로는 강아지 데리고 검사받고 애견용품 사고, 놀아주고 똥치우고 똥치우고 똥치우고 똥치우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아서 엄두도 못 냈고요.

이제라도 복귀했으니 비축분을 미리 만들어야겠네요. 제가 생각해도 휴재가 너무 잦아서 독자님들께 죄송할 뿐입니다. ㅜ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