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음."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단순한 시선에 불과하지만 그 시선에 담긴 중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세상이 나를 최강자니 뭐니 떠들어대는 통에 나 스스로도 모르게 우쭐대던 감정이 있었는데, 지금만큼은 등가가 싸늘하게 느껴진다.
"그래. 그대가 검맥의 새로운 맥주라지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얼굴, 그리고 평범한 목소리.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특징적인 것이 하나 없는 중년남자가 내게 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까지 식당에서 주문 한 음식을 기다리는 여상스러운 표정의 남자였지만, 나는 감히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비맥의 맥주시여."
그는 이제껏 맥 바깥으로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비맥의 맥주 구형찬이었으니까. 가벼운 목례에 마주 고개를 숙여보인 비맥의 구형찬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곁으로 돌렸다.
비맥의 맥주, 구형찬. 도맥의 맥주, 허준영.
궁맥의 맥주, 박진희.
놀랍게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전원이 1등급 이능력자이자, 대한민국의 맥을 대표하는 강자들이다. 세계적으로 얼마 없다고 알려진 1등급 능력자들이 이 자리에만 무려 네명이 모인 것이다. 아니, 내 뒤에 말없이 선 지현 그녀까지 포함하면 다섯이다.
"그래. 인사치레는 됐고, 우리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여성스러운 외모에 긴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궁맥의 맥주가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투로 물어왔다. 딱 보아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근래에 들어서야 이름을 날리는 내가 모임을 주최하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래, 궁맥의 신궁께서는 검맥의 새로운 맥주를 처음 보았을텐데 조금 더 인사라도 나누지 그러십니까."
그 불편한 시선에 잠시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끼어든 허준영이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검맥의 이름을 보아 넘어가겠소. 부르니 맹약이 걸려 나오긴 했지만, 그리 많은 시간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어서 본론으로 넘어가시오."
허준영의 부드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날이 선 듯한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뒤에 늘어선 몇몇 인물들이 안절부절 하는 것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자신들의 맥주가 삐딱하게 나가자 지레 겁을 먹은 듯하다.
궁맥의 전수자로 보이는 그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흥미롭다는 눈동자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맥의 맥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서론 빼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어차피 나도 모임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탓에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큰 그림부터 말씀드리죠. 여기 계신 분들은 '천개의 눈동자'를 그저 두고만 보
실 겁니까?"
시작부터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흠..."
내가 꺼낸 이야기가 의외였는지, 아니면 시작부터 강수를 꺼내드니 그것이 의외였는지. 자리에 모인 이들이 하나 같이 표정을 달리 해보였다.
"검후에게 듣기로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헤아릴 수 없는 나날동안 이 땅의 수호자를 자처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저 괴수 아래서 신음하는 대한민국을 지켜보실 참입니까?"
조금은 도발적인 말에 대번에 사람들의 시선에 날이 선다. 허준영만이 예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로 가만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지금 괴수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은지, 햇수로만 3년입니다. 3년.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덧없이 죽어갈지 모릅니다."
막 입을 열어 무어라 하려던 궁맥의 맥주보다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타
이밍을 놓친 탓에 말을 꺼내다 만 그녀가 나를 잠시 곱지 않게 보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저는 검맥의 맥주로써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강하게 한자한자 끊어서 소리치듯 말했다. 넓지 않은 초옥에 내 강경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이 땅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모든 분께 조력을 요청합니다!"
처음 자리에 모인 것이 불과 십여분 전. 서로간의 눈치를 보니 마니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나는 단번에 결론까지 꺼내버렸다.
지난 괴수 퇴치 전에 참가했던 허준영과 지현을 빼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유니온이 정리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다. 사실 비맥과 궁맥의 맥주가 나를 보는 시선에 고까움이 담겨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 역시 이들에게 좋은 마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숨어 살다, 뒤 늦게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내가 보기에는 그저 엉덩이 무거운 자들로 보였을 뿐이다.
"검맥의 맥주께서는 지난 전투에서 '천개의 눈동자'가 왜 '멸망을 지켜보는 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지 느끼셨을 텐데. 그런데도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을 끝으로 무언가 복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맥주들 사이에서 허준영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할 수 없는 그의 질문이었지만, 꺼릴 것이 없는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잊고 지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내 말에 허준영이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답한다.
"실패라. 그날은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시작도 못했었지요."
군부가 가한 불의의 일격을 탓하는 것일까. 어지간한 허준영이라도 고고한 존재만큼의 자존심은 있었나 보다. 여지껏 감정 하나 보이지 않던 그가, 실패라는 단어에 조금은 반발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습니까? 그 뒤통수를 간질이던 이들도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지요."
아까보다 더욱 노골적인 도발에 허준영이 잠시 내 눈동자를 바라본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네요."
비꼬는 것인가. 반편이였던 내가 지금 자신들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비아냥일까.
까.
"하지만 뭐 좋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대로일 테니까요."
깊게 가라앉아있던 그의 눈동자에 어느새 빛이 감돌고 있다. 입가에 평소처럼 미소를 띤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도맥은 전력을 다해 검맥의 행사를 보조하겠습니다."
그 시원시원한 대답에 마음 한구석에 들어섰던 돌덩어리가 사라진 기분이다. 내가 이제 와서 1등급 이능력자니 검맥의 맥주니 하는 감투를 썼다지만 이들을 강제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내가 계획하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장 협조적일 거라 예상했던 허준영과 도맥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감사의 마음을 눈빛에 담아 가벼운 목례를 해보인 나는 아직 대답이 없는 비맥과 궁맥의 맥주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원 젊어서 그런 것인지, 패기가 넘치네."
궁맥의 맥주가 헛웃음을 쳤다. 외모만 보면 나만큼이나 젊어 보이는 그녀였던지라 일견 듣기에 우습기만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어느 하나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검맥과 도맥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결정을 내린 이들은 모두 지난 일산 괴수전에 참가했던 이들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이들은 그날의 전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들.
지금에 와서 갑작스레 입장을 바꿀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무언가 트집을 잡고 싶은데 트집을 잡을 건덕지가 없어 말을 어물거리는 모습
이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였지만 왠지 백살은 된 노파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 지현을 바라보니 그녀는 단아한 외모만큼이나 정갈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역시 똑같이 나이가 많아도, 지현이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태생이 그러한 것이다. 지금 내 눈 앞의 궁맥주는 아무리 봐도 노파의 분위기라 괜스레 지현을 의식했던 내가 미안할 지경이다.
"궁맥이야 뭐 전부터 그러했으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 생각했나 보다. 등 뒤에 말 없이 서 있던 지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발언권이 있는 것은 오직 맥주들 뿐, 하지만 그 누구도 지현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다분히 모욕적인 언사에 궁맥주가 인상을 구겼을 뿐이다.
"비맥은 어떻소. 비맥도 지난 외침 때처럼 그저 지켜만 볼 것이요?"
그저 물러나 있었던 그녀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데 그 말들이 하나같이 맥주들을 도발하는 내용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얼굴에 노기가 서려있던 궁맥주 뿐 아니라 비맥주까지 눈살을 찌푸렸다.
"또다시 물고 늘어지는 군. 그 당시에 비맥은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니까!"
차분하게 보였던 비맥의 맥주 구형찬이 언성을 높이자 그 목소리가 굉장히 사나웠다. 평범한 모습 그 어디에 저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까.
"누구는 사정이 되어 피를 흘렸던가. 그대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야. 지난 시간 동안 검맥과 도맥이 그대들을 대신 하여 짊어 맨 짐의 무게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과거사가 있는 모양이다. 노기를 드러내던 두 남녀가 순식간에 노기를 가라앉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발을 빼지 않으리라 믿겠소. 그대들도 눈이 있으면 봤을 것이고, 귀가 있다면 들었겠지. 괴수가 얼마 만큼 강대한지, 그 울부짖음이 어
디까지 퍼지고 있는지. 검맥과 도맥이 나눠지기에는 짐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오."
듣자 하니 뭔가 다른 맥들이 함께 했어야 할 일들을 검맥과 도맥이 도맡아 처리한 모양이다. 더 이상 몰아붙이는 것은 역효과일 것 같아 나는 그쯤에서 지현을 제지했다.
"그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는 것은 그만 하지요."
지현이 서운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그녀를 나무랐다. 지금 내게는 그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죄송합니다."
지현이 선선히 고개를 숙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검맥과 비맥의 맥주들 뿐 아니라, 허준영까지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천하의 검후가 어찌..."
비맥의 맥주가 탄식을 내뱉었다.
"검후라는 허명 이전에 나는 검맥의 사람이고, 그 이전에 이분의 내자. 내자가 지아비의 말을 따르는데 뭔 말들이 그리 많소."
지현의 무덤덤한 한마디에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어 댄다.
짝!
다소 산만해진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자 나는 손바닥을 부딪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거부한다면 더 이상 청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십시오. 검맥과 도맥만으로 어찌 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대하다는 것을. 우리가 실패하고 나면 아마 남은 이들도 무사하진 않겠죠."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부를 하랴 싶어서, 말하니 그들이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지현에게 듣기로는 이들이 이 땅을 위해 해온 일이 적지 않다 했다. 그런데 왜 지난 전투를 비롯해 이번 일까지
이렇게까지 몸을 사리는 것일까.
그들을 살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은 두맥의 맥주들이 결국 결단을 내렸다.
"힘을 보태겠소."
"지난 빚을 모른 척하자니 캥기는 군. 궁맥도 함께 하겠소."
그들의 대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이 치켜 올라갔다. 비록 아직 해결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가장 큰 산을 하나 넘은 것이다.
어차피 허락 할 것, 괜히 시간을 끌다니. 내심 투덜거렸지만 불만보다는 여전히 기쁨이 컸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들이 불편한지 헛기침을 했다. 처음부터 허락했으면 모를까, 마지못해 허락한 입장에서 내 감사 인사를 듣자니 불편한 모양이다.
"그럼 괴수를 처리하기 전에 먼저 미뤄왔던 것들을 해결해볼까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괴수를 퇴치하는 것이 끝이 아니었소?"
비맥의 맥주가 한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큰 그림을 먼저 그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작은 것을 먼저 그려놔야 큰 그림을 그리기가 편할 때도 있지요."
내 말에 그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작품 후기 전개 슬슬 빨라집니다. 이제 슬슬 배경이 나오고 전반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각 맥의 역사와 왜 지난 괴수전때 전지현과 허준영만이 나섰는지.
그리고 각맥의 힘이 어떤 것인지 슬슬 드러날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일단 전편 리코멘트는 해당편 코멘트란에 했습니다!!!
마눌님한테 강제연행 당한 상태라, 코멘트란으로 했습니다. 이후에도 코멘트란을 이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빠져나갈 틈을 찾아보겠습니다. 왜냐면 연참할 꺼니까요!
시간 될때 부지런히 분량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코멘트와 선작 추천 쿠폰은 제 소중한 단백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