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61화 (161/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그렇게 서둘러 내달리던 검맥과 도맥의 일행은 한참을 달렸다. 거대한 미궁을 통째로 관통해버린 붉은 화염의 강대함에 주눅이 들었지만 어느 한 사람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때려 갈긴 거야."

거칠게 내뱉은 김도연의 얼굴이 핼쑥하기만 하다. 이 처참한 광경의 범인도, 그와 맞서고 있을 누군가도 그녀로써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강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폭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한참 전이건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실체에 일행은 점차 말이 없어졌다. 대체 어떤 전장이길래 이 먼 곳까지 굉음이 들려오는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오오오오오!

이제껏 들려왔던 그 어떤 괴성보다 더욱 흉폭하고 거대한 괴성에 일행들이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에 당장이라도 멈추고 싶은 심정이 그 창백한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전장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욱 치열했다.

시커먼 거체가 맹렬하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리꽂는다. 굉음과 함께 미궁의 한 귀퉁이가 그대로 부서져 내리고, 그 자리에서 뛰어오른 붉은 그림자가 거대한 괴수를 들이받는다.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성이 잔뜩 난 듯한 괴수의 울부짖음과 동시에 붉고 검은, 크고 작은 그림자가 사납게 공방을 주고 받았다.

그들이 한번 충돌을 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충격파가 어찌나 강력한지, 멀리 떨어진 검맥일행까지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느라 애를 먹어야 할 정도였다.

"아마 형준이겠지?"

질린 표정으로 붉은 그림자를 눈으로 쫓고 있던 김도연이 중얼 거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붉은 중갑을 걸친 인물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김형준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지?"

그녀의 말에 일행들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 흡혈과 기동성 생명력으로 만들어낸 온갖 무기들을 이용해 감각적으로 전투를 하던 김형준이 다른 때와는 달랐다.

미노타우르스가 주먹을 내지르면 마주 몸을 부딪쳐가고, 발길질을 하면 종아리를 들이 받는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평소 보아왔던 붉은 빛의 무기가 아니라 시꺼멓게 그을린 낡은 방패 하나 뿐이었다.

우우우우한참을 치열하게 공방을 치고 받는 와중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인지 미노타우르스가 광망이 흐르는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본다. 단순히 마주친 것만으로 사지가 굳고 숨이 턱 막혀버리는 끔찍한 공포에 일행들이 몸을 떨었다.

그때 일행들을 살펴보느라 잠시 한 눈을 판 미노타우르스의 면상으로 붉은 궤적이 내리 꽂혔다.

크아아아아그 거대한 덩치가 일시지간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사이에 붉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튀어 올라 김도연을 비롯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 짐!"

바닥에 떨어져 내리기가 무섭게 외치는 김형준의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진태식이 얼이 빠져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짐!"

다시 한 번 외치고 나서야 진태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중하게 갈무리하고 있던 보퉁이를 내밀었다.

낚아채듯 움켜쥔 그의 손에서 보퉁이가 벗겨지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뭇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견하기에 볼품없기만 한 나뭇가지의 정체는 지난 그렌델과의 전투에서 어마 어마한 맹위를 떨쳤던 겨우살이나무의 가지, 미스틸테인.

김형준의 손에 쥐어진 전설의 무구가 쑥쑥 자라 순식간에 5미터에 가까운 길이로 자라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른 김형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던 미노타우르스의 머리 위.

"죽어어어어어어!"

평소보다 훨씬 사납고 필사적인 고함소리에 김도연을 비롯한 검맥과 도맥의 이능력자들이 넋을 놓았다.

어둠속에서 포효하는 괴수보다 더욱 포악한 기세의 김형준이 그대로 미스틸테인을 내리 찍었다.

찌른다기보다는 단순히 거대한 창대로 후려친다는 표현이 맞을 법한, 그 무식하고도 강력한 공격에 반쯤 몸을 일으켰던 미노타우르스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음머어어어어과연 신도 두려워 한다는 무구답게 미스틸테인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이제껏 성을 낼지언정 고통스러워 한 적은 한번도 없는 미노타우르스가 처음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 주먹을 들어 올려 김형준을 잡으려 하지만, 이미 김형준은 그 자리를 벗어나 미노타우르스의 널찍한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5미터가 넘게 자라 있던 겨우살이나무의 가지가 또 다시 자라, 이제는 10미터에 가까운 크기가 된다.

"으윽..."

김형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나오는 것이 미스틸테인이 빨아들이고 있는 생명력이 적지 않은 듯 하다.

이미 한번 온 생명력을 소모했던 김형준, 지금은 또 다른 이의 생명력을 불태워가며 이를 악물었다.10미터까지 자라나던 미스틸테인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그 앙상한 줄기에 가지를 내뻗는다. 그리고 돋아나오는 푸르른 잎들이 온 창대를 뒤엎을 무렵이 되어서야 김형준은 창을 내질렀다.

꾸어어어억

이제껏 들었던 비명과는 비교도 안 돼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미노타우르스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옆구리에서부터 관통한 미스틸테인의 끄트머리가 단단한 등 근육을 찢고 솟아나왔다.

"허억. 허억."

미노타우르스의 몸에 미스틸테인을 박아선 김형준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와 합공으로 만들어낸 미미한 상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틈이었지만 노리고 노려 마침내 미스틸테인을 박아 넣은 김형준이다.

그 지독스러운 화염 공격만 아니었다면 미스틸테인의 도움이 없었어도 미노타우르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을 것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김형준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일행들이 입을 쩍 벌리고 그의 분노에 기겁을 할 만도 한 것이, 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수십에 달하는 이능력자들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졌고, 거기에 더해 자신은 살아있는 페르세우스의 생명력을 빨아들여야 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천천히 미이라처럼 말라가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던가. 그 참담한 기분에 미칠 것 같던 그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페르세우스의 기운에 더욱 분노했다.

도망갈 만큼의 생명력이라도 얻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이, 막상 오랜 세월을 살아온 1등급 이능력자의 무한한 생명력을 얻고 나자 미노타우르스에 대한 분노로 바뀐 것이다.

꾸억!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경련하는 미노타우르스를 노려보는 김형준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언젠가 그렌델을 처치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임을 깨닫고 그의 눈동자가 더욱 독한 빛을 띤다. 괴성을 내지르는 미노타우르스를 노려보던 그의 온몸에서 수십개의 붉은 줄기가 흘러나와 겨우살이나무의 가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닿은 겨우살이나무의 가지와 찔레가시 꽃의 줄기, 단지 닿은 것만으로 둘은 엉키고 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가지의 표면을 뚫고 전에 없던 붉은 꽃봉우리가 돋아났다. 미노타우르스의 괴성이 커져갈수록 더욱 만개하는 꽃봉우리들이 그 꽃잎을 섬뜩하게 펼쳐보였다.

"이... 이건?"

그는 그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겨울동안 내내 푸르게 잎을 피워내는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들어진 미스틸테인, 그리고 탐욕스럽게 피를 빨아들이는 찔레가시 꽃의 줄기.

언제나처럼 막대한 생명력이 줄기를 타고 흘러 들어와야 하는데,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손 끝에 이어진 줄기를 타고 그의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당황하는 것도 잠깐, 그는 눈빛이 독해졌다. 그는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생명력을 차라리 가속화시켰다. 찌잉.

머리를 스쳐가는 통증과, 현기증. 그의 귓가에 이명이 들려온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생명력이 그의 몸안에 남은 생명력보다 많아진 순간 그는 페르세우스가 남긴 방패로 내 몸을 가리고 뇌까렸다.

터져라.

미노타우르스의 온몸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오며 요동을 쳤다. 그에 따라 더욱 커져만 가는 놈의 괴성을 들으며 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터져라."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왔던 미노타우르스의 피부가 더욱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흉폭함이 사라지지 않는 미노타우르스의 눈빛을 잠시 바라보던 김형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터져버려!"

볼록하게 솟아나온 미노타우르스의 피부가 마침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마구 요동을 치다가 이내 터져 버린다. 처음에는 미노타우르스의 손가락 끝이 터져 나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손목, 다시 팔뚝과 어깨. 그렇게 사지의

일부분이 뻥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간다.

평소라면 피보라가 솟구치고 육편이 휘날려야 하건만, 어찌 된 것인지 미노타우르스의 몸에서는 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김형준의 의문과는 상관 없이 미노타우르스의 몸은 사지에서부터 터져 나가며 존재 자체가 사라져 갔다.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크고 작은 폭발과 함께 미노타우르스가 점점 사라진다.

거대한 거구가 이제는 손발을 잃고 상체의 절반과 머리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놈은 마치 미궁의 어둠에 먹혀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 갔다. 마지막 머리만이 남았을 때, 놈은 괴성이라도 지르듯 입을 쩍 벌렸지만 결국 소리 없는 절규일 뿐. 마침내 흉악한 머리마저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내려선 김형준은 눈을 감았다. 그의 손아귀에 굳게 쥐어진 미스틸테인이 원래의 크기로 줄어들어 이윽고 평소의 볼품없는 나뭇가지로 변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갔던 붉은 줄기도 빨려들 듯 그의 몸 안으로 갈무리가 되고 사방이 금세 조용해진다.

허탈하다.

미노타우르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못해서 허탈한 것이 아니다. 1등급 몬스터라는 위명과 그 강력함에 비해 허무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괴수의 최후에 그는 공허함이 들었다. 이깟 놈을 잡기 위해 수십의 이능력자가 희생되고 수백만의 일반인들이 왜곡에 휘말려 사라졌다. 차라리 그렌델을 잡고 난 직후가 훨씬 기뻤다.

애초에 그가 맡은 임무였던 미노타우르스의 퇴치, 그 두 마리중 한 마리를 처리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이 컸다.

마치 그림자와 싸우기라도 한 듯한 탈력감에 가슴이 갑갑했다. 가슴께를 짓누르던 분노도 그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저 여전한 무게로 그를 내리 누를 뿐이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음성에 그가 눈을 떠보니 진태식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를 염려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드센 얼굴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김도연, 순한 얼굴 그대로 눈물을 그렁거리는 성시현. 진태식의 강직한 얼굴에도 꾸밈없는 걱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비어져 나와 김형준은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니 그들이 금세 질문 공세를 해댄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방금 처리한 놈이 미노타우르스 맞느냐. 나머지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은 어디 있느냐.

어느 질문 하나 김형준에게 반가운 질문이 아니었지만, 그는 최대한 짤막하게 요약을 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으로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현의 안위와 지금의 내 일행들의 안전이다.

타국의 이능력자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임무 이후에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이들이다. 그들을 신경 쓰느라 자신의 사람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김형준은 어쩌면 페르세우스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수 많은 상념을 뒤로 하고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행들이 감탄을 터트리거나 참담함을 드러내거나 했다.

"자, 시간이 없어. 지현과 메데이아를 찾아야 해."

대충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나니, 그들이 이내 이능을 발현시키며 그를 따를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문득 잊고 있던 존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다이달로스!"

============================ 작품 후기 껄껄. 오늘은 많이 늦지 않고 업데이트 합니다. 코멘트도 저조하니 이제는 다시 리코멘트를 하겠습니다. 인원도 많지 않은 것이 딱 리코멘트 하기 좋은 코멘트 수군요. 다음화부터는 진행상 의문이나 여러가지 부분에 대한 질문 있으시면 코멘트로

부탁드립니다.

어제 막 최종화에 대한 전개까지 다 짜놓은지라, 무언가 완결을 향해 달려간다는 기분이 물씬 느껴집니다.

CryingSword / 제가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는 친구도 안 만나고 하는 거라고는 글 쓰고 조아라 글보고 작가분들이랑 수다 떨고 자유게시판서 뻘글 투척하고. ㅎㅎ 제 마음의 고향은 여기뿐입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미oㅏ/ 호옹이. 하루만에 정주행하셨다는 코멘트가 얼마나 반가운지 독자님은 모르실 겁니다. ㅜㅜ 보면서 여기까지 따라오실 만은 하셨구나 하는 안도감과 뿌듯함에 어찌나 기쁜지.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미슈 / 그렇습죠. 어차피 떠나는 사람이라면 안식을 줘야 하는데 말이죠. 이번 죽음은 나름의 장치이니 지켜봐주세요^^[엘리시움] / 맞습니다. 제 글을 읽으시면 1초만에 추천을 누르고 10초만에 코멘트를 작성하는 초능력이 생깁니다. 껄껄.

Ken12 / 각성하실 겁니다. 그 각성의 전조로 이번 편에도 코멘트를 달게 되실 겁니다. 후후후후.

남궁천룡 / 이능과 각성을 원하는 독자님들은 코멘트를 달라!!!! 남궁천룡님도 곧 각성하실 겁니다. ㅋㅋijuin4 / 이능력자가 되는 기대가 확신이 되는 순간 독자님은 이미 이능력자 ㅋㅋㅋvool / 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또 오십셩!

저뤼 / 호옹이. 잼나게 보셨다니 감사드릴 뿐입지요. 쪽지야 뭐, 스포에 관련된 질문이 아닌 이상 언제든지 환영입니다^^잘생긴킬러 / 그러합니다. 페르세우스는 꿀떡하고 먹혔습니다. ㅜㅜ크루쿠룩 / 잘 보고 가셨으니 이번화에서도 뵐 수 있겠죠^^?

천연천연 / ㅋㅋㅋㅋㅋㅋ 페르세우스 먹고 힘차고 건강한 아침!!!

신유진 / 제 글 코멘트가 저조해서 1코 아무것도 아닌데. ㅋㅋ 하지만 일단 축하드립니다. 여기 기다리셨던 다음 편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