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지... 지금 무슨 말을..."
내가 짐작하는 것이 맞다면 페르세우스는 지금 말도 안 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이대로 죽어.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몬스터의 생명력이라면 질리도록 흡수해왔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력이라니. 문득 오래 전에 있었던 지현과의 일이 떠올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제 정신에서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나는 그날 그녀의 생명력과 기운을 잔뜩 흡수하고 1등급 이능력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녀는 한참이나 힘을 회복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수백년동안 모아온 기운을 단숨에 강탈하고 그녀의 소중한 몸까지 더럽혔던 참담한 기억에 나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제발..."
황당하게도 그가 나에게 애원을 한다. 자신의 생명력을 주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듯한 그의 태도에 좀처럼 머리가 정리가 안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같아선 당신도 곧 죽겠죠."
가뜩이나 쿵쾅거리는 미노타우르스의 발소리에 마음이 무거운데, 대놓고 현 상황을 꼬집는 그의 말에 이가 악다물어졌다.
단번에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으며 당혹스럽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신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소드 앰프레스를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콕 짚어 지현의 존재를 내게 언급하는 그다. 안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에 쳐해 있을지 모르는 그녀 탓에 조바심이 나던 와중이다. 차마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탁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현을 떠올리곤 마음을 정했다. 나와 그녀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혼자 남을 연아가 떠올라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겠습니까?"
결정을 내렸다지만 어찌 내 마음이 편할까. 지독스럽게 가라앉은 내 음성에 스스로 소름이 돋았다.
제길.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겠냐니.
내 질문에 페르세우스가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를 쓴다. 그 모습이 더욱 처연해 보여 나는 눈이라도 돌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이대로 비참하게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요?"
과연 어느 게 나은 결정인가.
확정된 죽음 앞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내게 흡수당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어느 결정을 내리던 그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죽음. 그 잔인한 선택지 앞에서 그는 당당했다.
숙연한 마음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멀지 않은 곳에서
쿵쾅대며 난동을 피우는 미노타우르스의 존재초자도 내게 위협이 되지 못 했다.
그런 나를 똑바로 마주 보는 페르세우스, 가슴이 터질 듯 갑갑했다.
"대신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가 왠지 겸연쩍은 어조로 내게 말했다. 아마도 내 결정과는 별도로 어차피 죽을 목숨인 자신이 스스로의 생명을 담보로 내게 거래를 걸고 있다는 기분이라도 든 모양이다.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메두사. 선발대의 메두사를 챙겨주십시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다른 이들의 말에 의하면 서로 사이가 안 좋아 같은 조로 묶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 의문에 찬 시선에도 불구하고 페르세우스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선발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지현을 찾고, 김도연을 비롯한 일행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미궁을 빠져 나가던지 미노타우르스를 퇴치하든지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와중에 선발대의 구조가 목적과 배치된다면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으리라.
미온적인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했는지 페르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는가 싶더니 결연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군요. 저는 준비 됐습니다."
그의 말에도 나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자의에 의한 것이라지만 스스로의 생명력을 갈취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쿵쿵쿵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시간이 없었다. 인간적인 도의를 지껄이다가 비참하게 미노타우르스에게 죽음을 맞이 하기에는 내 어깨에 짊어져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해보았지만 그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해 나는 어금니가 바스라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몇가닥 붉은 줄기가 금새 그의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를 내고 고개를 파고들었다. 무거운 내 마음과 달리 너무나도 탐욕스러운 붉은 줄기들은 곧 꿀럭대며 페르세우스의 생명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크으윽."
자신의 비명소리가 미노타우르스의 주의라도 끌까 걱정이 된 모양인지, 이를 악물고 신음조차 삼키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참담했다. 그리고 비참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1등급 이능력자답게 거대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세찬 강줄기처럼 내게 달려드는 그의 생명력에 그와 나 사이에 걸쳐진 몇가닥 줄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무기력하게 쳐져있던 몸에 활력이 돌아오고 아찔하게 느껴지던 현기증도, 욕지기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바짝 메마른 대지가 물을 흡수하듯 내 전신은 페르세우스의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페르세우스는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저.. 저는 헛된 죽음일까요..."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악물고 물어왔다.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마침내 미이라처럼 바싹 말라버린 그가 탁한 눈동자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신화시대부터 존재해오던 그리스의 1등급 이능력자 페르세우스, 1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와 전투중 사망.
김도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죽을 맛이었다. 성시현이 술법을 사용해 길을 찾으려 해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식신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으니 그들로써는 길을 잃은 미아나 다름이 없었다.
"괜찮을까?"
아무래도 강단 있는 김도연이나 다른 남자 이능력자들과는 달리 성시현은 겁을
먹은 기색이 다분했다.
식신조차 앞세우지 못하고 무작정 길을 찾아 걷고는 있는데 중간 중간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진동과 굉음, 무언가가 울부짖는 소리에 그녀는 죽을 맛이었다.
"괜찮지 않으면 뭐, 방법 있어?"
김도연이 시큰둥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받자, 성시현은 금새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냥 걱정 돼서..."
다소 울먹거리는 어조였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애초에 이 곳에 온 것 자체가 엄선된 능력자라는 것, 지금은 저렇게 울상을 짓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다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울먹거리거나 징징거리는 것은 그저 그녀의 성정일 뿐. 그녀의 실체는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 애처로운 외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강인한 여성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문득 일행을 멈춰세웠다.
"잠깐만요."
그녀의 제지에 선두에 있던 진태식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성시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시선만으로 설명을 종용한다.
"거대한 파동이 느껴져요."
공격적인 술법에 능한 김도연과는 달리 정통 술법에 달통한 성시현은 기감이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다. 그런 그녀의 기감에 무언가 엄청난 기운의 폭발이 느껴진 것이다.
"자... 잠깐만요...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 끝에 가서는 비명처럼 변해버린 그녀의 경호성에 다들 긴장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하려다 하나 같이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다.
기감이 뛰어난 그녀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막대한 에너지가, 마치 해일처럼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 탓이었다.
"피해!"
누가 외쳤는지도 모를 경고와 동시에 일행들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신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고, 김도연과 성시현의 부적이 사방에 흩날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에너지였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이 절대 온화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수 있었다. 덕분에 고위 술법이 담긴 부적들이 허공에서 불타오르고, 진태식을 비롯한 이들의 근육이 부풀어올랐다.
보무도 당당하게 미궁에 들어선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행과 떨어지고 이제는 길을 잃은 김도연 일행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혼신의 술법과 이능을 발휘해 정체불명의 에너지로부터 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다들 얼굴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어서 투정을 부리거나 하진 않았다.
이런 막대한 기의 파동이 터져나올 정도라면 그 중심에 있을 거라 생각되는 김형준 일행이 맞닥뜨렸을 위협은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려댔을까. 막연하게 느껴지던 에너지의 해
일이 실체화되어 그들을 덮쳤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통로를 부수고 쏟아져 나온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런 썅! 저게 왠 개 같은!"
달리는 도중에 잠시 뒤를 바라본 김도연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거대한 통로를 가득 채우고 넘실거리는 화염이 빠르게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야! 더 빨리 뛰어!"
그녀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모두 바로 뒤까지 쫓아온 열기에 이를 악물고 달렸는데, 진태식을 비롯한 검맥의 이능력자들이 성시현과 김도연을 짊어 맸다. 워낙에 상황이 다급해서 그런지 마치 짐짝처럼 어깨에 얹어진 그녀들이 볼품없이 흔들렸다.
"으악! 좀 제대로 잡아!"
마침 얼굴이 뒤를 향하게 진태식에게 매달려 있던 김도연이었던지라 바짝 쫓아온 화염의 파도에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꺄악! 뜨거워! 내 얼굴! 피부 다 상하게 생겼어!"
그 와중에도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대는 김도연이 황당했는지 일행들의 얼굴그 와중에도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대는 김도연이 황당했는지 일행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가 벌인 소란 덕분에 하얗게 질린 채로 내달리던 그들의 얼굴에도 한점 여유가 돌아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달리는 와중에도 그들은 화염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저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라면... 분명 미노타우르스겠죠."
비교적 안정적으로 어깨에 매달려 있던 성시현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지가 무슨 용가리라고 불을 내질러 불을."
한참 비명을 지르느라 바쁘던 김도연이 성시현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라? 불길이 약해지는데? 더 안 쫓아와."
그녀의 말에 일행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을 쫓아오던 화마가 어느새 수그러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들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마치 흉물스럽게 녹아내린 통로의 모습, 화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그 참담한 현장에 그들은 기가 질려버렸다.
꿀꺽누군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새빨갛게 작열하던 화염이 걷히고 난 뒤라 눈이 어둠을 제대로 구별해내지는 못했지만, 지금 보이는 광경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이리 저리 구불대는 통로를 일직선으로 관통해온 화염의 흔적에 그들은 한참이나 넋을 잃고 있어야 했다.
그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새로운 통로가 그들 앞에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가.. 가만..."
그렇게 얼마나 넋을 잃고 있었을까. 진태식이 일행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육체의 오감이 남다른 진태식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여보지만,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쉿!"
김도연의 말을 막은 진태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쿵. 쿵.
처음에는 그저 거대한 진동에 불과했던 것이 어느 순간, 폭음으로 바뀌고 불규칙한 폭발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뭐.. 뭐지?"
뒤늦게 소리를 감지한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김도연이 몸을 날렸다.
"뭐긴 뭐야! 누가 싸우고 있는 소리지!"
콰아아앙!
이제는 확연하게 느껴지는 폭음과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파동에 진태식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도 몸을 날렸다.
============================ 작품 후기 으아아아. 김형준은 남의 에너지 뽑아먹고 사는 거머리.
오늘도 늦었습니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양해를. ㅎㅎㅎ이제 이번 챕터도 거의 막바지네요. 이번 챕터가 너무 길다고 느끼셨던 분들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하고 싸랑합니다!
쿠폰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ㅎㅎㅎ 코멘트와 추천 잔뜩 달아주시면, 이능력 각성하고 독자님도 이능력자가 될 겁니다. ㅎㅎ 지금 당장 달아보세요. 진짜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