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59화 (159/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등가를 훑어갔다. 난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소리쳤다.

"모두 피해!"

다급하게 외치며 나 역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미노타우르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에너지가 어마어마한 파동을 일으키며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콰아아아아아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온 사방에 울려 퍼진다. 가뜩이나 부족한 생명력에 무리하게 일으킨 피의 방패에 붉은 화염이 부딪쳐왔다. 내장이 흔들리는 엄청난 충격에 허공중에 떠 있던 몸이 한참이나 뒤로 밀려가는데, 붉은 방패가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갈라진다.

제길.

방패 뒤에서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의 기둥이 당장이라도 방패를 꿰뚫고 나를 덮칠 것 같은 기세인지라 저절로 이가 악다물어졌다.

내부가 제대로 충격을 입었는지 비릿한 무언가가 잇새로 삐져나온다. 사방에 가득찬 화염 속에서 오직 저 3미터 남짓한 방패 뒤의 공간, 내가 있는 곳만이 멀쩡하다. 정신없이 뒤로 밀리면서도 주변을 살펴봤지만 보이는 것은 넘실대는 화염과 거대한 불기둥뿐, 다른 일행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크윽..."

역시 무리하게 기운을 끌어다 쓴 탓인지 몸이 버티지를 못한다. 생명력이 빠져나간 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고, 그 자리를 대신해 극심한 무기력증이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하고 싶은 욕지기를 참아내며 안간힘을 다해 방패를 유지했다.

재빠르게 뛰어오른 탓에 화염의 기둥에 직격당한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지지할 곳 없는 허공에서 놈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화염의 기둥을 막아내고 있는 방패채로 나는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될 작정인지, 끊이지 않은 화염에 넌덜머리가 났다. 무기력한 몸에 욕지기, 거기에 더해 현기증까지 날 지경이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탈진 증상인지... 시야가 자꾸만 흐려지려고 한다. 이대로는 한계다 싶어 주변을 살펴보지만 여전한 화염의 파도가 온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마침내 거대한 화염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던 붉은 방패가 모서리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모서리가 사라지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아예 불이 붙어 뭉탱이로 파이고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간신히 내 몸을 가리기에도 벅찬 크기의 방패가 되었다. 피부를 불태울 듯한 열기와 숨쉬기도 힘든 끔찍한 상황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렇게 하고도 몸의 일부가 화염에 가까워지고, 그 지독스러운 고통에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화염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것은 내 앞의 방패가 더 이상 내 몸을 보호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까지 녹아내리고 난 뒤였다.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한 화염의 줄기가,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거세게 밀어재끼던 화염이 사라지자 내 몸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더는 몸을 지탱할 힘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바닥에 떨어진 내 몸이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커헉!"

뜨겁게 달궈진 바닥의 열기에 몸부림을 치며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방을 불태운 화염에 공기조차 타버린 모양인지 목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숨통이 제대로 트이질 않는다.

고통스럽게 가슴팍만 오르내리락 하기를 한참, 조금씩 폐에 산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크으윽."

피바라기로 몸을 감싼 터라 직접적인 화상을 입은 곳은 없었지만 온 몸이 뜨겁게 달궈져 고통스럽게 그지없었다. 덕분에 간신히 기력을 모아 몸을 일으키는데, 몇 번이나 기절할 것 같아 이를 악물어야 했다.

"... 젠장."

겨우 몸을 바로 세우고 나니 보이는 광경은 처참 그 자체였다. 투박하지만 반듯했던 통로의 벽이며 천장이며, 바닥 할 것 없이 흉물스럽게 녹아내린 모습이

끔찍하기만 했다.

마치 먹다 남긴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들. 그 어마어마한 열기에 미궁의 일부가 통째로 녹아내렸다. 분명 이리저리 구불구불했을 미궁의 통로가 거센 화염에 일직선으로 뚫려버렸다.

덕분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

"다들 무사합니까?"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일행의 안위를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가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유게네스의 능력자들을 찾았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몇 번이나 불러봤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보며 계속해서 그들을 찾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끔찍한 모습으로 통로의 이곳저곳에 눌러 붙은 끔찍한 무언가들 뿐.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한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끔찍한 모습에 차라리 눈이라도 감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미치도록 갑갑했다.

"누.. 누구요?"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어둠 속을 뒤진 덕분에 누군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지만 나는 단번에 누구인지를 깨닫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은 그 끝에서부터 녹아내렸는지 끔찍한 모습으로 상체에 붙어있고, 얼굴이며 사지며 할 것 없이 전부 반쯕 녹다 만 형상이다. 이목구비 중 제대로 붙어 있는 곳이라고는 입과 한쪽 눈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눌러 붙은 흉물스러운 모습에 저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마.. 마스터 킴?"

하나 남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그 어떤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크으윽... 여, 역시 그대는 무사했군요. 아, 일어나야 하는데 모...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날 좀 일으..."

힘겹게 말을 잇는 그 모습에 나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흉측하게 몸에 눌러붙은 팔, 다리를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훤칠한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이제는 폐인이라는 말도 과분한 그가 눈앞에서 신음을 토해냈다.

"미... 미노타우르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 벽에 기대어 놓으니 그가 내게 물었다. 한참을 화염에 밀려난 탓인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미노타우르스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참이나 밀려난 탓에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군요."

뭐라 더 설명할 말이 없다. 그저 이곳에서는 놈이 보이지 않는 대답만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럼 뭐라고 말할까. 유게네스의 다른 이능력자들은 벽에 눌러붙은 피떡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목숨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당신 뿐이라고?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는 패배라고?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제길.

단순한 주먹질이나 몸통공격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미노타우르스가 한 불의의 일격. 대비했다고 하더라도 막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당한 탓에 후회가 가슴을 채워넣었다.

"마.. 마스터 킴."

끓어오르는 분노, 누구에게 향했는지 모를 적의가 들끓고 있는데 페르세우스가 나를 부른다.

"네. 말하십시오."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페르세우스의 음성에 나는 바짝 다가서며 대답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내..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온 사지가 눌러 붙거나 아예 통째로 녹아내린 그는 얼핏 보기에도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설혹 아주 아주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저 정도 부상이면 그 어떤 방법을 써도 폐인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1등급 이능력자로 세상이 좁다 하고 날뛰었을 그에게는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천개의 눈동자와 벌인 전투에서 입은 화상으로 폐인이 될 뻔 하지 않았던가. 그때의 그 끔찍한 고통은 지금 떠올려도 몸서리가 쳐지는 가혹한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하나 남은 페르세우스의 눈동자에 처연한 빛이 스쳐갔다. 그가 애써 밝은 어조로 말했다.

"큭. 그... 그럴 줄 알았소. 애초에 아테나의 방패가 아니었다면 나는 형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거요. 이렇게 살아남아 마지막 말이라도 전하는 나는 행운아겠지. 오디세우스는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녹아버렸으니까..."

그런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지만 결국 오디세우스도 그렇게 허무하게 당한 모양이다.

"다... 당신처럼 우리도 피했다면 어...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린 너무 자신의 힘을 믿었소..."

내가 경고를 했지만 이들은 아마 제자리에 굳건하게 서서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받아낸 것인지, 그의 음성에 자조가 가득했다.

우오오오오오오이번 공격에 많은 힘을 쏟아부은 것인지 아까와 비교했을 때 한차이나 기세가 준 미노타우르스의 포효가 들려왔다.

곧 이어 쿵쾅거리며 미궁이 울려댄다.

"제... 제길 마음 편하게 유언도 못 남기게..."

페르세우스가 눈동자만 떼구르 굴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어둠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어둠 탓에 아직 보이지 않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먼 곳에 있진 않을 것이다. 온몸이 들썩거리는 진동만 해도 놈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온몸의 힘을 끌어 모아 보았지만, 지금의 몸 상태라면 달아나는 것 조차 무리다.

그렌델과의 전투를 승리했다고 해서 내가 너무 방심을 한 것인지, 한순간에 이런 상황에 빠진 것이 허탈하고 화가 났다.

"마스터 킴."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인지 어느새 마지막 순간이 왔나 보다. 페르세우스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명료해졌다. 불규칙하던 호흡도 안정되어 있었고 그 하나 남은 눈동자에도 빛이 감돌았다.

"말하십시오."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어둠에서 떼지 않았다. 언제고 들이닥칠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볼 생각으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던 피바라기를 해체했다. 평소라면 코웃음 쳤을만큼 미미한 생명력이 솟아난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페르세우스가 말했다.

"그대도 멀쩡하진 않은가 보구려."

그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 엄청난 공격에 멀쩡할 리가 없잖은가. 그나마

빗겨 맞은 것이 이 모양인데 생각해보니 직격당하고도 목숨이 붙어있는 페르세우스가 대단해 보였다.

"어떻소. 상대할 수 있겠소?"

페르세우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지경이 되어서야 미노타우르스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도망이라도 가볼 참이었는데 그마저도 페르세우스 탓에 힘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었지만 최소한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버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내 성정 탓이다.

"마스터 킴."

이제는 가깝게만 느껴지는 쿵쾅거리는 소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페르세우스가 다시 나를 불렀다.

"멀지 않은 곳에 내 방패가 떨어져 있을 것이요. 그걸 좀 찾아주시겠소? 비교적 상태가 멀쩡할 테니 찾는데 어렵진 않을 거요."

따로 찾을 것도 없이 그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방패가 보였다. 그

지옥같았던 화염 속에서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방패를 보고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꽤나 강력한 유물인 모양이다.

"가지시오. 나는 어차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

방패를 내민 내 손을 보며 말한 페르세우스, 스스로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왠지 숙연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나도 그리 오래 그대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팔자는 아닌가 보군요."

마침내 저 멀리서 몸을 드러낸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에 나는 잔뜩 몸을 낮췄다.

"그놈이 왔군."

잠시 미노타우르스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페르세우스가 다시 나를 불렀다. 조금씩 초조해지던 와중이라 나도 모르게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걸 봤는지 페르세우스가 비교적 멀쩡한 입술을 움직여 쓴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내가 너무 그대를 붙잡고 있었나보군. 마지막 한 마디만 묻겠소."

유언을 남기려나 하고 기다렸더니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겠단다. 의아함이 들었지만 내색치 않고 그를 멀뚱 멀뚱 바라봤다.

"만약 놈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곘소?"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대의 콜싸인은 피바라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소."

뒤늦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 나는 경악했다.

============================ 작품 후기 잠시 마눌님 영주권 문제로 이민청을 다녀오느라 업뎃이 늦어졌습니다. ㅎㅎ 돌아와서 부지런히 썼는데 벌써 한국 시간으로 4시 가까이 되었네요. ㅜㅜ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축분 없이 쓰는 글쟁이라 하루 하루가 전쟁입니다. 부디 너그롭게 양해를. ㅎㅎㅎ

코멘트로 도살자에 관한 문의가 있군요. 저도 지금 당장이라도 업뎃 하고 싶지만, 워낙 오래 글을 손에서 놨던지라 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이능력자도 쓰면서 도살자도 만족할만하게 쓰는 것은 힘들 것 같아,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동시 업뎃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만파식적에 대한 문의가 있는데 극중 만파식적이 나왔던가요? ㅎㅎㅎ 아직 안나왔을텐데;;;그리고 이번 챕터가 마무리가 되면 사건의 발단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실이 밝혀지고 다음 챕터부터는 이제껏 뿌려졌던 떡밥들이 대부분 회수될 것입니다. 껄껄. 아마 오래되어 까먹으신 떡밥들이 대부분이겠지만서두 ㅜㅜ여튼 전편에서 오랜만에 댓글 달아주신 코멘터분들을 보니 반갑더군요. 이제 계신 것을 알았으니 떠나지 마십시오. 떠나시면 곤난합니다. ㅎㅎㅎㅎ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코멘트 추천 선작 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첨언. 이상하게 요즘 순위가 높더군요. 연이어 2위를 했는데 아마 독자분들이 기억이 안나셔서 재주행을 반복하신 탓인가 봅니다. ㅋㅋㅋ 휴재 뒤의 호재로

군요. ㅋㅋ저는 혹시라도 오늘 시간이 되면 한편 더 업뎃 해보겠습니다. 안 돼면 내일 뵈어야죠 ㅋㅋ첨언. 지금 독자분들이 가장 많이 지적해주신 부분들이 간혹 일어나는 장면의 스킵으로 인한 전개의 듬성듬성함, 2부 와서 두드러지는 주조연 캐릭터들의 붕괴, 전개 속도의 문제 모두 염두에 두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감히 약속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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