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대상조차 모호한 분노가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미노타우르스의 거구를 생각하면 지척이나 다름없는 곳에 위치한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에 대한 걱정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우오오오오오!
마침 들려오는 사나운 괴성에 나는 어지럽게 흔들리던 눈동자를 바로잡고 미노타우르스를 노려봤다.
"오디세우스! 페르세우스!"
이를 악물고 두명의 이능력자를 부르자 그들이 즉각적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서 보였다.
"면적을 크게 해서 충격을 주던가, 최대의 예기로 꿰뚫어야 합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도 안 나니 알아두세요."
분노를 차갑게 식혔다. 그녀에 대한 염려와 걱정, 어이없는 실수에 대한 자책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했지만 애써 그 모든 것을 가라앉혔다.
어쩌면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에 비해 더욱 흉험하다고 느껴지는 기세, 미노타우르스의 포효에 나는 어느 사이엔가 완벽한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놈의 공격은 무식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주먹질과 밀치기 정도. 코너에 몰리지 않게 주의하면 방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이쪽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내 말에 긴장한 표정의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가 손에 거머쥔 무기를 들어올렸다.
다이달로스가 유게네스 일행의 뒤로 완전히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때를 맞춰 쿵쾅거리며 내게 달려드는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이 보였다. 워낙에 거대한 덩치다 보니까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미처 열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놈과 맞닥뜨렸다.
"하압!"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뒤로 하고 나는 힘껏 내질러져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팔을 타고 올랐다. 내가 자신의 몸에 올라탔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기는커녕 오
히려 성을 내며 반대편 손을 움켜질 듯 뻗어왔다. 미노타우르스의 손짓을 피해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또다시 귓가를 스치는 아찔한 파공성, 덩치가 크고 느린 듯싶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 놈의 공격들이 이어졌다. 나는 정신 없이 허공에서 이리 저리 몸을 틀며 허공에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었다.
생명력을 매개체로 하는 나만의 이능이 펼쳐지며 하루 종일 계속된 접전에 지친 몸이 더욱 무거워졌다. 제길. 이리 저리 성과 없이 뛰기만 했더니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다.
콰앙!
붉디 붉은 기운을 허공에서 수직으로 내리 찍자 굉음이 터져 나오고 미노타우르스의 고개가 덜컥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공격으로 놈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재차 기운을 모아 놈의 머리통을 내려 찍었다.
"합!"
때를 같이 해 들려온 기합소리.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가 전투에 합류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무구를 손에 쥔 그들이 미노타우르스의 양쪽 다리를 스치듯 베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스스로의 공격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면도 점도 아닌 애매한 베기 공격이었다. 역시나 미노타우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미노타우르스를 스쳐간 그들이 신음성을 흘린다.
"피부가 단단해서 어지간한 공격은 먹히지 않아요! 각자 최대한의 힘으로!"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보다는 나를 더 큰 위협으로 생각했는지 미노타우르스는 다리 사이를 오가는 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나 하나만 눈에 보이는 듯 커다란 주먹을 이리 저리 휘둘러 나를 후려쳐온다.
아직까지는 흉성이 제대로 터지지 않았는지 허술한 공격을 이리 저리 피하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와의 전투를 통해 놈이 어느 정도 충격에는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역시 결정타라고 하기에는 모자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뭔가 다른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면 지루한 소모전이 될 것이다. 지현의 안위가 걱정되는 내 입장에서는 절대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 나는 놈과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 받으면서도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생각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느다란 가시찔레 꽃의 줄기를 뻗어보지만 역시나 피부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가닥 가닥 분쇄된다.
싸아아아악!
무언가 공기를 쓸어가는 듯한 생소한 파공음이 온 사방을 흔들었다. 오디세우스? 아님 페르세우스? 누군가가 나름 큰 공격을 시도했는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순간 미노타우르스가 휘청거린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살펴보니 질린 표정으로 미노타우르스의 오른쪽 다리에서 물러나고 있는 페르세우스가 보였다.
손아귀가 아픈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검을 잡은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하는 페르세우스, 그 태평한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피해!"
날카로운 경고에 페르세우스가 황급히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무지막지한 미노타우르스의 발길질이 스쳐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게네스의 또다른 1등급 이능력자 오디세우스를 찾았다. 페르세우스를 향해 거칠게 달려드는 미노타우르스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손에 쥔 창을 높이 치켜드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크아아아악!"
평소 차분한 모습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나운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페르세우스를 뒤쫓던 미노타우르스의 옆구리를 향해 날카로운 빛이 쏘아져나갔다. 나 역시 그 공격에 보조를 맞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커다란 창을 내던졌다.
온 미궁을 뒤흔드는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끝없이 새하얀 빛을 내던진다.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몸이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생각보다 강력한 오디세우스의 공격에 내심 감탄을 하며 나 역시 온 사방에 생명력의 결집체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머리가 타들어갈 듯이 아파오고 전신의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어느새 붉은 빛의 창과 검 또는 거대한 화살이 수 없이 떠올랐다.
얼핏 보기에도 심혈을 기울인 오디세우스의 공격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무리해서, 만들어낸 수십 수백자루의 무기들이 순식간에 허공을 빽빽하게 채웠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 너머로 느껴지는 또 다른 기운이 점점 거대해진다. 콰아앙!
처음보다는 그 간격이 넓어진 폭음 사이로 또 다른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던 검과 똑같은 모양의 검, 하지만 그 크기는 수십 수백배 거대한 검이 미노타우르스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을 보인다. 나 역시 허공중에 떠올라 있던 생명력의 결집체들을 내던졌다.
이것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타격이 될 수 있기를 바랬다.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날아간 검과 창의 개수만큼이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그대로 내쏘았다.
미궁의 천장에서 먼지가 내려앉고 돌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렸다. 폭발과 폭음에 온 사방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궈지고 대기가 진동했다.
분명 무리를 했음이 분명한 오디세우스의 공격과, 마찬가지로 심혈을 기울인 페르세우스의 공격. 그리고 생명력의 절반 이상을 쏟아낸 내 공격.
끊임없이 흔들리던 미노타우르스의 거체가 이제는 섬광과 먼지 따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쿠아아앙!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붉은 창 한자루가 미노타우르스가 있던 곳에 틀어박히는 것을 끝으로 사방에 가득하던 폭음이 끝이 났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생명력 덕분에 잔뜩 지친 나는 바닥에 내려섰다.
"허억. 허억. 놈도 끝이 났겠지?"
역시나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욱 지친 듯한 오디세우스의 음성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가뜩이나 어두운 미궁인데 이제는 있는 먼지 없는 먼지 할 것 없이 자욱하게 사방에 가득한지라 미노타우르스의 거체가 보이지를 않았다.
조금은 움츠러들었지만 여전히 흉포하고 거대한 놈의 기운. 나는 고개를 흔들
었다. 타격이야 어느 정도 있었을 테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치명상 정도는..."
분명 내가 느끼는 놈의 기운을 그대로 느끼고 있을 이들이건만, 낙관적으로 지껄여대는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의 모습에 나는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놈이 치명상을 입었을 거라는 예상은 그들의 바람일 뿐이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겠지만 여전히 거대하기만 한 놈의 기운이다. 다만 워낙에 공을 들여 한 공격이 헛수고로 끝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지 둘이 열심히 떠들어댄다.
"먼지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으면 다시 시작해야 할 테니, 준비를."
지친 몸이라 금방이라도 바닥에 드러눕고 싶다. 그래도 혹시 몰라 힘을 모았다.
방금 전에 내쏘아진 공격들을 버텨낸 놈이라면 비슷한 공격으로는 절대 타격을 주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모두 거리를 물려요. 이대로 천천히 물러납시다."
나와는 다르게 조금의 기력도 남아있어 보이지 않는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를 재촉하니 그들이 어기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1등급 몬스터의 단단한 몸에 놀라 아마도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아 단번에 쏟아냈겠지. 아무래도 평소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던 탓에, 체력의 안배 따위는 저 먼 산으로 내던진 그들이다.
내심 그들이 미덥지 않았지만 나는 내색치 않고 천천히 일행들을 뒤로 물렸다.
심혈을 기울여 조금씩 구체화 시키고 있는 나의 이능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한참을 뒤로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을까.
자욱하던 먼지가 갑갑했는지 누군가가 이능을 발휘해 바람을 일으켰다. 내심 먼지가 거슬렸지만 먼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드러날 미노타우르스의 존재가 두려웠던 탓인지 아무도 걷어내지 않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누군가 참지 못한 모양이다. 거센 바람이 등 뒤로부터 쏟아져 나와 통로를 관통해 저 멀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쓸려나간 먼지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큰 타격은 입지 않은 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고 저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라니.
그렌델에게 이 정도의 공격을 퍼부었다면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었을 텐데. 새삼 미노타우르스와 그렌델의 격차가 느껴졌다.
"말도 안 나오는군."
맥 빠진 오디세우스의 음성이 들려오고 역시나 허탈한 기색의 페르세우스가 맞장구를 쳤다.
"1등급 이능력자 셋의 공격을 받고도 멀쩡하다니."
천천히 미노타우르스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길. 아켈레우스 자식.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온 거 아니야? 저런 놈을 상대할 수 있다고 했다니."
미노타우르스의 단단한 몸에 질려버린 페르세우스의 말에 오디세우스가 동조했다.
1등급 이능력자인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빠르거나 특별한 공격은 없었지만, 그 단단한 몸 하나만 해도 미노타우르스는 1등급 몬스터로써의 위엄을 보이고도 남았다.
심혈을 기울인 세명의 공격을 피해 없이 받아 내다니. 각오는 했지만 나 역시 질려버렸다.
하지만 그 강대함을 실감하는 만큼 나는 조바심이 났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와 대치하고 있을 지현과 메데이아를 떠올리니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참아라. 지금은 그녀를 믿을 때다.
그저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폭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지친 몸이나마 검후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제길 선발대는 대체 어디 쳐 박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워낙에 상황에 이리 저리 쫓겨 다니다 보니 잊고 있던 선발대의 존재를 누군가가 언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발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 부디 어디서 헛되게 목숨을 잃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천천히 드러나는 미노타우르스의 거체에 사방이 조용해진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지고 이윽고 미노타우르스가 완전히 상체를 일으켰을 때, 여기 저기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말도 안돼. 저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라니!"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갑작스러운 고성에 혹시나 미노타우르스를 자극했을까 움찔한 이능력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그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눈을 좁히고 놈의 상태를 살폈다. 미궁의 어둠에 더해 온통 새카만 놈의 털 덕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윤곽. 나는 변함없이 눈에 힘을 집중했다.
여기 저기 그슬리고 더러워진 모습이었지만 미노타우르스는 거의 멀쩡한 모습
이었다. 오디세우스와 내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옆구리조차도 상처 하나 없는 듯 보였다.
"조용!"
여전히 웅성대는 이능력자들에게 나는 경고했다. 검은 털 사이에 드러난 얼핏 얼핏 비치는 무언가가 내 신경을 거슬린 탓이다.
더욱 힘을 주고 눈을 좁히는데 미노타우르스가 괴성을 내질렀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그 사납고 흉포한 포효에 몇몇 이능력자들이 바닥에 주저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 역시 놈의 옆구리에 집중하고 있던 정신이 흔들리며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의 기세였다.
그렇게 일행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와중에 미노타우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작품 후기 전개가 좀 늘어진 감이 있지만 이번 챕터까지는 속도 유지하겠습니다. 갑작스
럽게 조절하자니 아무래도 글 자체가 듬성듬성해질 것 같다고 할까요. ㅎㅎㅎ조만간 챕터 마무리 될 예정이고, 전개속도의 완급조절에 공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휴재 후 복귀라 그런지 코멘터분들이 안 보이는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새로 달아주시는 분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글이 부족해 그분들이 떠나간 것 같아 속상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첨언. 현재 스스로의 글을 정주행하며 수정할 예정입니다. 연재에 영향이 없는 한도 내에서 글의 퀄을 한번 올려보려는 시돈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