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56화 (156/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아무래도 그대들이 말한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인 것 같군."

그렇게 말한 미노타우르스가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메데이아가 불안한 기색으로 전지현과 그를 번갈아 살펴보며 대꾸했다.

"이상하다. 분명 나와 같은 존재는 다시 없어야 정상인데, 저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단번에 그가 나와 동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의 손이 자신의 심장어림을 쓰다듬는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온 몸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이건 마치..."

그의 말에 메데이아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그녀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에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감췄다. 등뒤로 숨겨진 그녀의 손아귀에 보라색의 기운이 희미하게 맺히기 시작한다.

그런 메데이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노타우르스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어둠에 침잠되었던 그 무렵의 그 기분이구나..."

왠지 모르게 그 음성이 처음과는 달리 흥분한 기색이라고 생각한 메데이아가 빠르게 전지현의 몸을 들쳐 업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반쯤 일으켜져 있던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그렇게 조금이지만 메데이아와 전지현이 미노타우르스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미노타우르스는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신음성을 흘렸다.

"혼자 걷겠습니다."

힘없는 전지현의 음성이 들리자 메데이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주었다. 잠시 비틀대는가 싶더니 금세 신형을 바로 세운 전지현이 파리한 안색으로 미노타우르스를 바라본다. 아니,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미노타우르와 자신 사이

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기의 실타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고 희었던 그 끈의 한쪽 끝이 거멓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좋지 않아..."

파리한 안색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와 미노타우르스간의 거리는 수백미터,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기의 끈 역시 수백미터. 그 먼거리를 넘어 그 새까맣게 물든 기운의 음습함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인다.

"방법이 없군요. 이대로 물러나는 수밖에."

메데이아에게 건네는 그녀의 어조에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싸웠다면 모를까 중간에 미노타우르스의 정신을 유지시킨답시고 너무 많은 기운을 소모했다. 최상의 상태에서 자웅을 겨뤄도 힘에 부치는 상대일 터, 지금은 심신이 너무 지쳐버렸다.

검후라는 이름을 내걸고 세상을 활보한 이후로 벌써 적 앞에서 두 번째 등을 보이는 것이다. 고고한 그녀의 정신에 또다시 흠집이 난다. 승패에 대한 미련은 애초에 버렸다고 생각했었건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가 악다물어지고 눈썹

이 치켜 올라갔다.

긴장된 표정으로 전지현의 얼굴을 잠시 응시한 메데이아가 다시 미노타우르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그렇게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모르고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는 아득한 기분에 점차 의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둠의 침범에 속수무책으로 그의 지고한 정신이 흔들린다. 조그만 인간여자의 청명한 기운을 빌어 떨쳐내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어느 순간부턴가 꽉 다물어진 그의 어금니가 조금씩 헐겁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턱을 타고 걸쭉한 침이 흐른다. 맑고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던 것이 바로 전이건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성은 흡사 짐승의 그것과 같다. 상처 입은 짐승의 신음성 같기도 하고 굶주린 짐승의 그르렁거림과도 비슷한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흐으..."

사납지만 잘 갈무리가 되었던 눈빛에서 섬뜩한 광망이 흘러나온다. 어두운 미

궁의 통로에서 번뜩이던 눈빛이 이곳저곳을 훑어가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메데이아와 전지현을 발견했다.

덜덜거리며 떨려오던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거체가 일시에 떨림이 멈췄다.

그 불편한 침묵에 전지현과 메데이아는 잔뜩 긴장한채 언제라도 몸을 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들에게는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 흘러가고 마침내 미노타우르스의 거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은 어디로 갔는지 잇몸이 흉하게 드러나 있고, 코가 있던 자리에는 두 개의 구멍이 휑하게 뚫려 있다. 거기에 탁하게 색이 바랜 눈동자에서는 끊임없이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고 그마저도 불안하게 사방을 훑어보느라 정신 사납게 흔들리고 있다.

끔찍한 전염병에라도 감염된 것 같은 외모, 아니 차라리 관짝을 부수고 나온

시체와도 같은 모습. 그것이 내가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누구요?"

몬스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질만 아니었다면 좀비라고 해도 믿었을 그가 눈 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다이달로스?"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그의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대답했다.

"내가 다이달로스이오만 그대는 누구요?"

그의 탁하게 갈라진 음성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능력자 김형준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그가 과연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건너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고대의 인물.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대한민국? 이능력자?"

아무래도 그와의 대화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벌써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언제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다시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차근 차근 설명을 하기로 했다. 내 설명에 다이달로스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럼 지금 그리스의 용사들과 그대들은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님을 퇴치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요?"

한참 만에 무겁게 입을 연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타우르스의 말대로라면 그는 미궁에 유폐된 미노타우르스를 섬기던 입장, 그가 듣기 불편한 이야기이일 게 분명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고 내심을 알 수 없는 그의 탁한 눈동자를 살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의 말에 의하면 모노케라스님을 이미 만났다고 했는데, 그분은 지금 어디

에 계신 게요?"

잠시 그의 말에 곧이 곧대로 대답을 해야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결국에는 사실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가지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다이달로스는 내게 계속 하라는 듯이 말없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모노케라스는 당신이 알던 그 모노케라스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나는 간략하게 미노타우르스의 상태를 설명했다. 필시 지고했을 그의 정신이 무언가에 오염되어 광증을 드러낸 상태이며, 지금은 그나마 외부의 도움으로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 해주자 그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의 표정이 흡사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해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은 그렇게 되셨군. 이미 예견된 일이지."

본능적으로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됨을 느끼고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젠지는 모르겠소. 몬스터들을 유인해 그분의 라비린토스에 가둔 뒤였소.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있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었다오. 모노케라스님이 계셨기 때문이지. 비록 내가 그분을 곤경에 빠트렸지만 모노케라스님이라면 몬스터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실 거라 생각한 탓이오."

이미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에게 들었던 오래 전의 이야기가 다이달로스의 입을 통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생각대로였지. 아무리 몬스터들이 사납고 그 수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해도 모노케라스님의 힘 앞에는 한낱 벌레만도 못했었거든. 그런데 말이오. 어느 날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소."

다이달로스가 불길함을 느낀 것은 정작 본인이 가장 믿고 있던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로부터였다. 현명하고 사려 깊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폭금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용맹하지만 온화했던 그가 시시 때때로 분노를 참지 못했다.

어떤 때는 귀찮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보고 분노했으며, 어떤 때는 미궁에 갇혀있는 스스로의 신세에 분노했다. 아무런 이유가 없이도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지경이 된 것은 금방이었다.

다이달로스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지금의 상황이 심다이달로스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비록 분노를 하더라도 그 분노를 푸는 대상이라는 것이 몬스터에 한정되어 있었던지라 내심 반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심드렁하게 말하는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모습을 보며 다이달로스는 뭔가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모노케라스시여.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처음 라비린토스에 들어온 몬스터들의 수에 비하면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 수만이 남아있을 뿐이옵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황급히 그를 달래어 보았지만 다이달롯의 가슴 한구석에 싹 트기 시작한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 이제는 가슴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이제 십분지 일만이 남았다는 말이지?"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질문했지만 다이달로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여보였을 뿐이다.

"그걸 다 잡아 죽이고 나면 뭐가 남지?"

무슨 말일까. 순간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다이달로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몬스터들을 다 죽이고 나면 이 미궁에는 그대와 나 뿐이지. 입구를 그대가 막아버린 탓에 나갈 수도 없고 말이야."

그제야 그의 어조에 담긴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다이달로스가 퍼뜩 고개를 들어 미노타우르스를 살폈다.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눈빛을 마주 한 다이달로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남은 긴 시간동안 내게 무엇이 남지? 그리고 그대에게는

무엇이 남고?"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그 날카롭게 날이 선 적의에 다이달로스의 등가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껏 온전하게 몬스터를 향해 있던 적의가 처음으로 다이달로스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끼고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

그가 어떤 존재인가. 비록 부정으로 인해 태어나 태어난 순간부터 이 미궁에 유폐된 그였지만 단 한번도 부왕과 왕비를 탓하지 않았던 그다. 어두운 미궁에서 자랐다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온건하고 고고하게 성장한 그이건만. 지금만큼은 분노한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제야 다이달로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할까..."

누구를 향한 질문인지 무엇을 묻는 것인지조차 애매한 미노타우르스의 말을 들으며, 다이달로스는 평소의 그였다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그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미궁의 한구석에 등을 기댄 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미노타우르스. 그 거대하고 굳건한 육체야 평소와 별 다를 바가 없다지만 눈빛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거칠지만 폭급하진 않았던 기질이 묻어나던 눈빛이 어느 사이엔가 미친 사람의 그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음? 내가 혼잣말이 길었군. 그대, 물러가도 좋다."

한참 그렇게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던 다이달로스는 그 말에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자리를 벗어나고 보니 등가가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던 것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간 심력을 소모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복잡한 심사가 되어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은 다이달로스였지만 막상 쉽게 결론이 날만한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그리고 그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이달로스는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미쳤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이 몬스터들을 해치우던 미노타우르스가 돌변한 것이다.

미노타우르스의 강대한 힘 앞에 몬스터들의 사체는 언제나 끔찍한 꼴이 되었지만 그날은 유독 그 꼴이 처참했다.

"크흐으으...."

짐승처럼 신음성을 흘리는 미노타우르스의 손에 붙잡힌 몬스터가 괴성을 토해냈다. 그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애처로운 신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몬스터를 짓이겨버릴 듯하던 미노타우르스가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로 몬스터를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여전한 신음성이 조금씩 난폭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다이달로스였지만 그는 이내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우지직

그 끔찍한 소리라니. 다이달로스는 그 끔찍한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피가 흩뿌려지고 살점이 흩날렸다. 애처롭게 이어지던 몬스터의 신음성이 짧은 괴성으로 변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아그작 아그작다이달로스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몬스터를 산채로 입에 우겨넣는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를 보며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미노타우르스의 식사가 끝이 났다. 경악한 표정으로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달로스의 시선도 느끼지 못했는지 미노타우르스가 주변의 몬스터를 훑어봤다. 그 눈빛에 어린 끔찍한 탐욕스러움에 다이달로스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 하고 입을 열려는데 미노타우르스가 또 다른 몬스터를 입가에 우겨넣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경악을 넘어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을 한 다이달로스를 곁에 두고, 미노타우르스는 그렇게 한참이나 게걸스럽게 몬스터들을 먹어치웠다.

============================ 작품 후기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휴재중에도 달아주신 코멘트를 보며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송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ㅜㅜ일단 드릴 말씀이 너무 많지만 조금이라도 글을 빨리 업뎃해야 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완결까지는 대략 90화정도 남았으며 이번 챕터는 세계의 격변에 관련된 중요한 챕터라 좀 깁니다. ㅎㅎㅎ 10화내로 이번 챕터 마무리 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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