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그리고 서서히 넓어지는 내 감각의 영역에 무수한 기운들이 명멸한다. 온통 어둡고 음습한 기운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생명의 빛을 찾아 수천 수만가닥의 줄기가 미궁을 헤매며 퍼져나간다.
그리고 나는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과 내 일행, 또는 몬스터,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생소한 기운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빙고! 찾았다!"
유게네스의 능력자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기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단 한 가닥의 줄기를 남겨두고 나머지 기운을 거둬들인 후, 감았던 눈을 떴다.
"찾았어요?"
메데이아가 반색을 하며 다가와 물었다. 나는 가늘게 이어진 기운이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아. 다이달로스는 찾았는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이대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
아 다이달로스를 찾으러 간다면 메데이아와 지현만이 미노타우르스와 남게 된다.
지금이야 이성을 회복한 상태였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미노타우르스를 두고 자리를 뜨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기력을 많이 회복했는지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얼굴의 지현을 바라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통탄스럽구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천지 구분 못하는 괴물이 되었는지."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미노타우르스가 한탄을 했다. 나는 그 말에 왠지 겸연쩍어져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다. 태생이 어둠에 가까우니 결국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내 처지가 실로 비참하구나. 그대의 걱정이 무엇인지 안다. 염려 말고 다녀오라는 말도 하지 못하니 답답해서 한탄을 해 본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쭈욱 괴물로써의 삶을 살아왔다면 모를까. 이성을 지닌 존재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짐승처럼 변한 자신의 신세가 비탄스럽기도 하리라.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맞춰준답시고 일행의 안전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지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와요. 마스터 킴."
메데이아가 그런 내 등을 떠밀었다.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에게 그녀가 다부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드 엠프레스는 제가 반드시 지켜 보이겠습니다."
그 단호한 말에도 나는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지금은 저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그녀지만 이아손에 관련된 뭔가가 일어난다면 그녀는 거리낌 없이 지현을 내팽개치고 갈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여. 혹시라도 어둠이 찾아들어도 그대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 보겠다. 기억의 마지막에서도 그 정도는 가능했으니, 서둘러 다녀온다면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결국 미노타우르스까지 앞의 말을 번복한 채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전 세계에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와 지현의 안전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안위였지만 나는 결국 다이달로스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녀는 나를 기다려줄 수 있
을 것이다. 아니, 꼭 기다려야 한다.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까. 메데이아, 부탁해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며 나는 다이달로스를 향해 내달렸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김형준이 막 전지현과 메데이아를 두고 다이달로스를 향했을 무렵, 유게네스의 후발대는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탐색에 관련된 이능력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찾는데 실패한 그들은 한참이나 미궁을 헤매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갑작스레 몰아닥친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정신이 없었다.
"아악!"
또 다시 이능력자 한명이 목숨을 잃었다. 페르세우스와 오디세우스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둠 속에서 기척 없이 나
타나는 유령과도 같은 몬스터들 탓에 피해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제길! 끝도 없군."
페르세우스의 모습이 희끗거리며 일행의 중심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데스의 투구 '퀴네어', 아테나의 방패와 애검 하르페, 고등급의 유물들로 전신을 무장한 그였지만 무지막지한 몬스터들의 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차라리 자신과 오디세우스만이 있었다면 마음 편하게 자리를 벗어났을 것을, 자신들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차출해온 2등급 이능력자들로 인해 도리어 발이 붙잡히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간격을 좁혀!"
전방과 후방, 천장과 바닥 할 것 없이 불쑥 불쑥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공격에 오디세우스는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진형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쳐도 매 순간 2등급 이능력자들은 몬스터들의 공격에 부상과 피로가 누적이 되고 있었다.
"물러서!"
페르세우스가 진형의 외곽을 돌며 애검 하르페를 휘둘러 진형에 들러붙은 몬스터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오디세우스는 페르세우스의 활약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전장을 둘러보다가 이능력자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아무리 독려를 해봐야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이능력자들은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을 뿐이다.
자신과 페르세우스는 단기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이능력자들이다. 차라리 메두사나 메데이아가 이런 전투에는 더욱 어울리는 인원들이다. 메데이아라도 있었으면 전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 오디세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없는 사람들을 찾아봐야 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몬스터들이 다시 몰려온다! 진열을 정비해!"
잠시 숨을 돌린다 싶었더니 다시 또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몬스터들의 행
렬에 그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 중얼거린 한마디에 가뜩이나 내려앉은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디세우스는 기세 하나 느껴지지 않는 진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유의 이능 '용맹의 찬가'를 발현시켰다.
바닥까지 곤두박질 쳤던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얼굴에 다시 투지가 감돌고 느슨해졌던 진형이 탄탄해진다. 절망과 공포 대신 끝 없는 투지와 용기가 그들의 가슴 속에 가득 차자 그들은 참지 못하고 함성을 질렀다.
마주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괴성에 금방 먹혀버리고 마는 함성이었지만 기세만큼은 사라지지 않은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을 향해 몬스터들의 파도가 들이닥쳤다.
"제기라아알!"
비명과도 같은 욕지거리를 내뱉은 페르세우스가 진형의 외곽으로 튀어나가 다시 몬스터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을까. 전투에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무감각해져버린 유게네스의 인물들은 몬스터들의 공격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무작정 자신들을 향해 들이 받아오던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물러난다 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뭔가에 쫓겨 가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은 안도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던 전투에 이능력도 체력도 바닥이 난 탓이다.
"끝난 걸까?"
왠지 모르게 불길함을 느끼고 중얼거린 페르세우스의 전신이 몬스터들의 체액으로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빛나던 투구와 청동방패가 온통 녹색이며 붉은색이며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잃은지 오래고, 애검 하르페만이 처음의 그 차가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아니, 뭔가 이상하오."
오디세우스가 몬스터들이 사라진 저 어둠 너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여세를 몰았으면 충분히 자신들을 더욱 내몰수 있던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
불길했던 탓이다. 물론 몬스터들에게 그런 전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가슴을 짓누르는 불길한 예감에 주변을 살폈다.
"아, 이제는 뭐가 되든 간에. 나는 좀 쉬어야겠어."
페르세우스가 1등급 이능력자의 자부심도 내팽개친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진형의 중심에서 전투를 벌인 다른 이능력자들과 달리 외곽에서 몬스터들을 정리한 그는 어지간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강한 피로를 느꼈다.
"차라리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게 낫지. 이런 끝도 없는 몬스터라니."
푸념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온통 더럽혀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간의 꿀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유게네스 일행들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쿵!
온 미궁을 흔드는 진동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바닥에 내려 놓았던 창과 검을 다시 주워 올린 이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쿵!
"아무래도 말이 씨가 된 듯 하군."
오디세우스가 전에 없이 사나운 얼굴로 페르세우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미 진즉부터 몸을 일으킨 채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페르세우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 와서 내뱉은 말을 되 물리는 건 무리겠지."
딴에는 농답이랍시고 지껄이는 말에도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우오오오오오오!
온 미궁을 뒤흔들 듯이 사나운 괴성에 유게네스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노타우르스..."
오디세우스가 이제껏 몬스터들의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애병을 꺼내들며 전방으로 나섰다.
"물러서라. 그대들이 상대할만한 상대가 아니다."
페르세우스 역시 하르페에 묻은 몬스터의 체액을 털었내고는 오디세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쿵! 쿵!
거대한 발소리가 이제는 바로 코앞에서 들려온다 싶더니,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거대한 통로의 천장에 닿을 듯한 거구에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근육질의 육체가 새까만 털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그 거체의 가장 최상단에 위치한 흉악한 소머리. 커다란 머리통만큼이나 커다란 입에서 침이 흘러내린다.
크흐으으.
그 흉악한 눈동자에 가득한 흉폭함과 살기를 마주한 페르세우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장난 아닌데? 이런 놈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목이 아파올 정도로 고개를 치켜들고도 보이는 거라고는 거대한 면상의 아랫부분에 불과한지라 기가 질린 오디세우스 역시 돌처럼 굳은 얼굴로 미노타우르스를 올려다봤다.
"커도 너무 크군."
그렇게 미노타우르스를 만난 짤막한 감상을 내뱉은 두명의 1등급 이능력자는 자신의 애병을 세게 움켜쥐었다.
"으음?"
갑작스레 들려온 괴성에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흉폭함과 사나움이 묘하게 익숙하다 생각한 그는 저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이건?"
메데이아 역시 그 괴성에 담긴 사나운 기세를 느끼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오오오오오오!
그때 또다시 들려온 흉성에 미노타우르스-모토케라스의 눈빛이 돌변했다. 강맹하지만 유순한 기운을 띄고 있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거친 기운을 내뿜는다.
"아무래도 그대들이 말한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인 것 같군."
그렇게 말한 미노타우르스가 통로의 벽에 기대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메데이아가 불안한 기색으로 전지현과 그를 번갈아 살펴보며 대꾸했다.
"이상하다. 분명 나와 같은 존재는 다시 없어야 정상인데, 저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단번에 그가 나와 동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의 손이 자신의 심장어림을 쓰다듬는다.
"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온 몸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나른해진다.... 이건 마치..."
그의 말에 메데이아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레 그녀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에 조심스럽게 손을 뒤로 감췄다. 등뒤로 숨겨진 그녀의 손아귀에 보라색의 기운이 희미하게 맺히기 시작한다.
그런 메데이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노타우르스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어둠에 침잠되었던 그 무렵의 그 기분이구나..."
왠지 모르게 그 음성이 처음과는 달리 음험하다고 생각한 메데이아가 빠르게 전지현의 몸을 들춰업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반쯤 일으켰던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 작품 후기 오늘 마지막 분량! 하지만 독자님들의 선추코쿠는 글쓰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든 글쟁이를 다시 일으키는 레드불! 핫식스! 저에게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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