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뜨겁다. 어둡다. 타는 듯한 갈증에 온몸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다. 해갈되지 않는 이 고통이 미치도록 괴로웠다. 사지가 축 늘어져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다. 그 어떠한 창과 검으로도 뚫을 수 없었던 내 육체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다. 내 앞을 가로막던 이들을 단숨에 부숴왔던 단단한 머리가 깨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무겁다. 평소에는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뿔이 이제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시간을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늘어져 있었을까.
더럽고 역겹고 불쾌한 공기가 나의 라비린토스를 조금씩 잠식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불쾌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내 이성이 희미해져간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파괴적인 충동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육신을 일으킨다.
"모노케라스시여."
누구지? 익숙한 음성이다. 늙수그레한 음성에 고개를 간신히 돌리니 흐릿한 시
야에 조그만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다이달로스인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말하니, 튀어나오는 것은 짐승처럼 그르렁대는 생소한 말투. 조그만 인영이 흠칫 놀라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예. 다이달로스입니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 건 아니신지요?"
다이달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지금은 아직 그대가 올 시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눈을 부릅떠봐도 보이는 것은 흐릿하기 그지없는 잔상과도 같은 광경들 뿐이라 나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았다.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라 괴로운 와중에 다이달로스를 보니 자꾸만 숨이 가빠온 탓이었다.
"모노케라스시여. 부디 불민한 저를 욕해주소서."
뜬금없는 사죄에 나도 모르게 눈을 뜨고 다이달로스를 바라보니 납작하게 바닥에 엎드린 그가 보였다.
"무슨 일인가."
왠지 모르게 그 늙고 힘없는 몸을 짓밟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자꾸만 숨이 거칠어졌다. 이를 악물고 충동을 참아내며 말했더니, 마치 내 음성이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이달로스가 엎드린 상태에서 더욱 크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이 커질수록 내 안의 기이한 충동도 커져만 가는 것 같아, 연유를 물었다.
"저희 크노소스는 멸망했사옵니다. 더 이상 모노케라스님을 모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다이달로스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오고 지끈거리던 머리의 통증이 희미해져간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제서야 다이달로스가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정했던 옷은 피에 절어 붉게 물들어 있고, 한쪽 손은 뭔가에 파 먹히기라도 한 듯 어깨 아래부터가 사라진 상태였다.
"갑작스레 날뛰기 시작한 짐승들과 괴물들 탓에 크노소스는... 크흑..."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댄다.
"파시파 왕비는?"
다이달로스가 더욱 몸을 납작 엎드렸다.
"왕비께서는 이미... 크흑. 죽여주소서!"
나는 침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파시파 왕비, 비록 태어나자마자 나를 버린 이였지만 엄연한 나의 어머니, 생전 단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그녀의 죽음에 생소한 감정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런가. 멸망인가."
허탈하게 내뱉으니 다이달로스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늙고 상처입은 육신을 조심스럽게 잡아 일으키니 그가 내 손을 벗어나 다시 한 번 바닥에 엎드렸다.
"백성들의 비명을 들을 수가 없어서. 제가... 제가..."
비록 왕의 명령으로 미궁을 설계하고 나를 이 지옥같은 곳에 가둔 이가 다이달로스였지만 나는 그 가련한 늙은이의 절규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자꾸만 몸을 던지는 그를 손가락으로 집어 내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니 다이달로스가 주름 가득한 얼굴에 눈물을 흘려댄다.
"제가 그 괴물들을 이 미궁으로 끌어들였나이다."
"다이달로스야. 다이달로스야. 그 용맹스럽다던 용사들과 병사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 미궁을 택했는가."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인근의 국가들은 전부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런가. 나라가 환란을 피하지 못하니 마지막 수단으로 이 미궁을 택한 것인가. 새삼 이제 와서 별스러울 것도 없는지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들어서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없어지는 걸 느낀다.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을 잃어가는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이제 와서 크노소스가 무너지건 말건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파시파 왕비를 보지 못 한 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
"그런가. 나가 보아라. 그대라면 이 미궁을 벗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터. 괴물과 짐승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나가서 백성들에게 알리거라. 크레타의 모든
괴물은 나 모노케라스가 사냥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이달로스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다이달로스는 자리를 벗어날 생각을 않았다.
"다이달로스. 내 말이 우스운가. 나는 분명 그대에게 돌아가라고 말 했노라."
잠시동안 멎었던 두통이 다시 머리를 두들긴다. 왠지 모르게 다이달로스가 풍기는 피내음이 군침을 삼키게 만들어 단호하게 그를 쫓아내려는데 그가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용서해주소서! 제가 미궁의 입구를 무너트렸나이다!"
과연 지나치게 용서를 구한다 했더니 그런 짓을 했었던가. 제 나름에는 괴물들을 유인해 나의 라비린토스에 가두려는 생각이었으렷다.
평생을 파시파 왕비의 치부를 들춰내기 싫어서 미궁을 나선 적이 없었고, 이제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평생을 이 암흙속에 갇힌 채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파괴적인 충동이 나를 갑작스레 집어 삼켰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오래전 기억의 마지막이다."
한참이나 이어진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시에는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실로 이상하구나. 용맹한 병사와 장군, 용사들이 셀 수없이 많았던 크노소스가 한날한시에 무너진 것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미노스 왕만 해도 그대들에게 미치진 못하나 그렇다고 크게 모자라지 않은 강자였거늘."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다시 생각에 잠겨들려는 미노타우르스를 잡아 질문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 당시에는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문제라,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그대들이 말하는 지금의 상황과 그때의 상황이 너무나도 비슷하구나. 그때에도 몇 개의 나라인가에 동시에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들었다."
과연 미노타우르스의 말대로인지라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와 지금의 상황 속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미노타우르스는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인간과 의사소통을 나누기도 했고 왜곡의 기운에 오염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가 오염되어 가기 시작했을 무렵 갑작스레 괴물들이 날뛰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왜곡이 일어나서 당시에 그같은 재앙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왜곡에 노출된 짐승들은 높은 확률로 몬스터로 변이되는 경우가 있다. 만약 당시 크노소스 왕국을 덮친 재앙이 왜곡 덕이라면,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모노케라스? 그래. 모노케라스라고 부르도록 하지.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다는 말이야. 거기에 더해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의 존재도."
결국 길디 긴 이야기를 들었어도 풀리지 않은 의문은 남아있다.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가설을 세운다면 이런 재앙이 이전에도 있었으며 그 원인이 왜곡이 아닐까 하는 추측일 뿐이다. 결국 가장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지금의 과제,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왜 나타났는지와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의 존재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질문에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도 의문스러운 표정이다.
"나도 모르겠구나. 그대들과 전투를 치르던 도중에 정신을 차렸으니,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이 많구나."
이렇게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지현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이제는 기운을 회복하는데 주력하겠다는 것인지 외부의 그 어떤 대화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시 미노타우르스를 살펴봤다.
그 사이에 메데이아가 나서 미노타우르스에게 질문을 한다.
"혹시 당시에 라비린토스에 침입했던 괴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메데이의 질문에 나 역시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새와 사람을 합쳐놓은 모습을 한 것도 있었고, 거대한 소의 모습에 다른 동물이 합쳐진 기묘한 것들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짐승이 변한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구나."
과연 짐작대로다. 미노타우르스가 설명하는 괴물들의 모습은 우리가 미궁을 통과하며 마주쳐왔던 몬스터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만약 제 짐작이 맞다면 아마 모노케라스는 당시의 괴물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진 듯합니다."
메데이아의 말에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몬스터들의 생김새가 낯설다 싶었더니, 아주 오래전의 존재들이었나 보다.
"그거 이상하군. 분명 내 기억 속에서 그 괴물들은 전부 내 손에 죽었거든."
미노타우르스가 메데이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 쉽게 풀려간다 했더니 또 그건 아니었나. 하지만 메데이아는 미노타우르스의 말에도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았다.
"글쎄요. 지금에 와서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 많은 몬스터가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하는 것보다는 모노케라스가 옮겨질 때 같이 옮겨졌다는 사실이 더 신빙성이 있으니까요."
하긴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마당에 다른 이유보다는 차라리 지금 메데이
아가 말 한 것처럼,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당시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에 있던 존재들이 통째로 옮겨졌다는 가설이 그럴싸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사실 하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미노타우르스에게 물었다.
"잠깐만, 그럼 그때 있었던 다이달로스라는 사람은 어떻게 됐지?"
만약 그녀의 말대로 생사를 떠나서 모든 몬스터들이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를 따라 이곳으로 옮겨졌다면 당시에 같이 미궁에 있던 다이달로스라는 사람도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에 부상이 심하긴 했지만 그 역시 상당한 힘을 가진 강자, 쉽게 죽거나 하진 않았겠지."
조금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내가 다이달로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자 메데이아도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만약 다이달로스라는 인물을 찾으면 이번 사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군요."
메데이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데이아. 선발대와 후발대, 그리고 우리를 제외하고 나면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가능성은?"
"절대 없어요. 0퍼센트라고 생각혀도 무방합니다."
메데이아의 말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다가 미노타우르스 퇴치 작전이 이런 스무고개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씩 그 끝이 보이는 놀이를 향해 한걸음 더 다가섰다.
"뭐하시려고요?"
메데이아의 의문에 나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찾아야지요. 다이달로스라는 양반을."
내 말에도 그녀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얼굴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넓은 미궁에서 어떻게 찾으시려고?"
메데이아의 질문에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내 전신에서 올올이 풀어져나가는 검붉은 줄기들이 온 사방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는 실타래들이 어두운 통로를 따라 스물스물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넓어지는 내 감각의 영역에 무수한 기운들이 명멸한다. 온통 어둡고 음습한 기운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생명의 빛을 찾아 수천 수만가닥의 줄기가 미궁을 헤매며 퍼져나간다.
그리고 나는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과 내 일행, 또는 몬스터,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생소한 기운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빙고! 찾았다!"
유게네스의 능력자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기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단 한 가닥의 줄기를 남겨두고 나머지 기운을 거둬들인 후, 감았던 눈을 떴다.
============================ 작품 후기 뚜둥! 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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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주세요. 독자분들의 선추코쿠는 제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ㅎㅎㅎ그럼 다음편도 다 쓰는데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아마 한시간 내로 올라가지 싶습니당!
그럼 다음편도 다 쓰는데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아마 한시간 내로 올라가지 싶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