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53화 (153/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그리고 마침내 내 고개가 더 이상 꺽일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목이 아파올 무렵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미노타우르스?"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박 터지도록 싸워왔던 미노타우르스였다.

"그대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구나."

미노타우르스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게 찢어졌던 눈동자는 어느새 검은 색의 순한 눈동자로 돌아와 마치 소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고 흉측하게 불끈거리던 거구는 이제는 그저 단단한 조각상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놀라셨습니까."

입을 쩍 벌리고 미노타우르스를 바라만 보고 있던 내 귓가에 지현의 음성이 들

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방금 전까지 죽어라고 치고받던 미노타우르스가 흡사 마음씨 좋은 노인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나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가. 괴물이 말을 거니 그것이 놀라운가?"

미노타우스르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지껄였다. 소머리를 한 괴물의 표정이 저렇게 다채롭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가 그 표정의 변화를 알아본다는 것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를 향해 한 말이 분명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입만 어물거렸다. 갑작스러운 미노타우르스와의 환담이라니,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그저 원 없이 싸우다 보니 제 정신이 돌아왔다고 하면 믿어줄 텐가."

왠지 모르게 짓궂은 미노타우르스의 말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어찌 된 건지 모르지만 정신이 들었다는 소리?"

죽어라고 싸워야 할 상대가 사라졌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제 싸워야 할 상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고. 죽겠네."

능력이 성장한 후 처음으로 다른 몬스터의 생명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전투를 계속했던 터라, 오랜만에 느끼는 이능의 피드백에 온 몸이 노골노골했다.

"그래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서 지현에게 물었는데 메데이아가 약병 하나를 건네어 준다.

"이능의 피드백을 완화시켜주는 약이에요."

약효에 있어서는 의심할 바가 없는 그녀의 비약이라, 나는 망설임 없이 약병의

주둥이를 열어 단숨에 털어 넣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단숨에 사라지며 다시 활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대들이 왜 나의 라비린토스에 들어섰는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내 대답을 받아준 건 지현이 아니라 미노타우르스였다. 라비린토스라는 이름이 내가 있는 미궁을 뜻한다는 것은 알아듣겠는데, 우리가 미궁에 들어선 이유라니.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며 미노타우르스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싸움이 멎었고 갑작스레 대화의 장이 열렸다지만,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끝까지 호의를 보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 등가가 서늘해졌다.

"하하하하. 그대는 저기 있는 이들과 또 다르구나. 이토록 다채로운 감정변화라니."

그런 나를 바라보던 미노타우르스가 크게 웃어재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호탕한지 듣는 내 가슴이 다 시원해질 지경이었지만 문제는 그 소리가 커도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웃음소리가 널따란 통로를 돌고 돌아 메아리처럼 귀를 때려

댔다.

"장난은 그만 하도록 하지."

한참이나 저 혼자서 웃어대던 미노타우르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곁에 있던 메데이아나 지현이나 웃음소리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는지 하나 같에 있던 메데이아나 지현이나 웃음소리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는지 하나 같이 안도한 표정이다. 그것도 모르고 미노타우르스만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나는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뜬금없는 감사인사에 내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는데 미노타우르스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들에게 나는 단지 괴물일 뿐이겠지만, 사실 나는 그런 저급한 존재가 아니다. 그대들이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라비린토스의 주인으로 군림해온 나다."

그렇게 시작한 미노타우스르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크레타 섬의 라비린토스에서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성

이 흐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괴적인 충동과 욕망이 자꾸만 커지며 본능만이 남아가는 스스로를 깨달은 이후 그는 절망에 빠져 있었단다. 뒤늦게 방법을 강구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이성이 깨어있는 시간이 본능에 잠식된 시간보다 적어져 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단다.

"그렇게 얼마나 짐승처럼 살아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어느 순간 나로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말에 비탄이 가득했다.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로 짐승처럼 살아가기를 한참,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전혀 엉뚱한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엉뚱한 곳?"

"그래. 지금 그대들이 서 있는 이 곳이다. 나의 라비린토스와 비슷하지만 이곳은 내가 있던 라비린토스가 아니다. 이곳에 흐르는 불쾌한 공기, 이 역겨운 혼돈은 내 이성을 희미하게 만든다."

미노타우르스가 말하는 불쾌한 공기와 혼돈이란 왜곡을 말하는 듯 싶었다. 왜인지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 속에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재앙의 실마

리가 있다는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 이 혼돈은 내 기억에도 있는 것이지. 내가 이성을 잃어가던 아주 오래 전, 라비린토스를 서서히 잠식해가던 기운이다."

미노타우르스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도 왜곡이 일어난 이후라는 얘기였다. 뭔가가 머릿속에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아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온전히 나로 돌아왔지만, 언제 다시 예전의 금수만도 못한 괴물로 돌아갈지 모르지. 지금은 다만 이것 덕에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비탄에 잠긴 미노타우르스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나는 그제서야 미노타우르스의 쇄골 언저리에 박힌 검 한자루를 볼 수 있었다.

비록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단번에 그 검이 지현의 애검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래도 이 왜곡의 힘이라는 것과 제 기운이 상극인 듯합니다. 맥의 기운은 정순하고 정명하여 파사와 탕마의 힘이 강하지요. 아마 그 탓이 아닌가 생각합

니다."

지현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과도 같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왜곡의 기운에 잠식된 미노타우르스의 이성을 깨운 것은 그녀의 기운이다. 시선이 절로 미노타우르스의 몸에 박힌 지현의 애검으로 향했다.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검이 지금도 안개처럼 푸른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검과 저의 공명이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그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그녀와 미노타우르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연결된 것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지고 있었다. 가늘디 가는 선을 따라 이동하는 청명한 기운, 그 기운이야말로 미노타우르스의 이성을 유지하는 구명줄과 같은 것이리라.

"짐승과도 같은 삶에서 나를 꺼내준 것을 감사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 될지라도 그 억겁과도 같은 어둠에서 나를 꺼내준 것을 감사하는 바이다."

미노타우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되어서야 차라리 처음의 계획처럼 단순한 퇴치작전이 머리가 편할 지경이다. 이제 와서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리만 복잡해지고 있는데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잠깐만. 당신은 그렇다고 치지만,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는?"

유게네스를 통해 미궁에 도사리고 있는 미노타우르스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미노타우르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오롯이 혼자 라비린토스에 군림해오던 존재, 이제 와서 그와 같은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미궁에는 분명 두 마리의 미노타우르스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라비린토스의 지배자이자 왕, 홀로 존재하는 모노케로스다. 나와 같은 존재가 또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역시나 미노타우르스 역시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의 존재까지는 모르는 듯 싶었다. 지현과 메데이아를 돌아보니 그녀들 역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제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떻게 된 게 외국에 나갈 때마다 쉽게 풀리는 일이 없는지라,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나와 같은 존재가 또 있다고 했는가?"

진지했지만 유순했던 미노타우르스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짙게 깔리고 끝에 가서는 그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나는 오롯이 존재하는 미노타우르스 족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지금 그대는 그대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흥분했는지 다시 고함을 치는 미노타우르스 탓에 귀청이 아플 지경이다. 나는 귀를 막으며 메데이아에게 턱짓을 했다. 내 몸짓을 알아들은 메데이아가 앞으로 한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모노케라스여. 그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테세우스와 아킬레우스라는 이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테세우스? 아킬레우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러실 겁니다. 그들은 몇 달 전에 미궁을 방문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노케라스 그대와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를 동시에 만났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메데이아의 설명에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얼굴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분명 홀로 존재하는 미노타우르스의 시조이자 유일한 후손! 나를 제외한..."

"하지만 봤다잖아."

계속해서 부정을 하는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태도에 나는 불쑥 끼어들어 말을 잘라냈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하고 이런 것으로 말씨름을 하기에는 지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지금도 계속해서 그녀와 심령으로 연결된 애검에 자신의 기운을 아낌없이 쏟아 넣고 있을 것이다. 그녀만큼 검에 대해 정통하진 않지만, 심령으로 검과의 연결을 유지한 다는 것에 막대한 심력이 소모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나다.

"계속해서 같은 말 반복하지 말고, 또 다른 미노타우르스가 있고, 그것이 실제라면?"

아무래도 지금은 대화의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치고 받았던 미노타우르스였다보니, 말투가 좋게 나가지를 않았다. 차라리 도발에 가까운 내 말에 미노타우르스가 나와 지현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구나. 그 조그만 몸으로 이정도의 기운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금수처럼 살아오더니 정녕 금수가 되어가는 구나."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한 미노타우르스의 모습에 나는 조금이지만 감탄했다. 그가 이렇게 왜곡에 오염되기 이전에는 제법 현명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노타우르스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거대한 소머리를 받치고 턱을 괸 그 모습이 기괴했지만 나는 참고 기다렸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가 그간 품어왔던 의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세상에 갑작스럽게 1등급 몬스터들이 등장했는지 또 그들은 왜 하나같이 세계 주요국가의 수도에 또아리를 틀었는지.

수 많은 의문의 실마리의 끝을 미노타우르스가 쥐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1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대답을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걸 우선 드세요.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비약이에요."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지현이 몇 번이나 약병을 들이켜 기운을 회복한다. 도대체 저 하늘하늘한 원피스 어디에 저렇게 많은 약병이 숨겨져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는데, 미노타우르스의 생각이 길어지자 그나마 그 많던 비약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떨거지들에게 나눠줄 비약을 조금이라도 아끼는 건데."

메데이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떨거지라니, 아무리 지금의 상황이 중요하다고 하나 자국의 이능력자들을 떨거지라고 표현하는 메데이아의 모습에 미궁에 들어선 이후 잊고 있었던 그녀의 진면목이 다시금 떠올랐다.

"잠시 기운을 회복하겠습니다. 신외지물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아무래도 심령의 영역이다보니 저도 지치는군요."

결국 비약의 도움으로도 탈진을 막지 못했던 지현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조금은 자유스러운 자세로 주저앉은 그녀의 주변으로 조금씩 기운이 소용돌이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둠에 속박되었던 그 무렵에 한 가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었구나."

한참 만에 입을 연 미노타우르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본능에 잠식되어 간다는 것을 막 깨달은 무렵이었다."

============================ 작품 후기 세계의 배경에 관한 실마리가 슬슬 나오는군요. 원래는 진즉에 나왔어야 하지만 완결을 늦추면서 전체적으로 스토리를 수정해서. ㅎㅎㅎ*휴재에도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와 사죄를 드리는 의미에서 연참을 준비했습니다. 껄껄. 추천과 코멘트 빼먹지 마시고 즐겨주소서.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추천, 코멘트 멸망일 것을 저는 알죠 ㅋㅋㅋ아무래도 좋으니 재미 있게만 읽어주세요!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아무래도 좋으니 재미 있게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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