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49화 (149/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그렇게 메데이아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의 15미터는 될법한 엄청난 덩치를 한 야수였다. 신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머리는 흉악한 인상의 소머리고 몸은 근육질 거구의 인간과 다름이 없다. 다만 그 온몸에 돋아난 질긴 털들이 더욱 그 몸을 거대하고 단단하게 보이게 했는데 멀리서 기운만 느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흉폭함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제길... 뭐가 약체고 뭐가 만만해..."

그리스에 오기 전에 했던 사전조사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의 몬스터가 내 눈에 가득 담기고도 한참이나 더 남았다.

저것이 바로 신화 속의 괴물 미노타우르스, 또한 그리스의 1등급 이능력자 테세우스를 살해한 흉포한 놈인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도 전에 질려버릴 것 같은 놈의 덩치에서 시선을 돌렸다. 놈과 가까운 곳은 아니지만 놈이 달려들면 단번에 짓쳐들 만한 거리에서 위태롭게 놈과 대치하고 있는 메데이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큰 탈은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녀의 주변

에 검보라색의 미세한 구체들이 셀 수도 없이 떠 있는 것을 보인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육중한 덩치의 미노타우르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기운을 줄줄 흘리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놈이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막상 이렇게 놈과 눈이 마주치자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의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마스터 킴?"

미노타우르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이상하게 생각한 메데이아가 나를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내게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은 멀쩡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처참했다. 한쪽 눈가가 움푹 들어가고 입술은 쥐어뜯기기라도 한 듯 엉망이다.

나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몇 번인가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며 대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렬한 흐름이다 생각했더니, 이미 공방을 주고받았었던가.

저 무지막지한 미노타우르스를 상대로 홀로 버티면서 한쪽 눈을 내어준 정도라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겠지만 처참한 건 처참한 거다.

우오오오오오!

미노타우르스가 울부짖었다. 그 안에 담긴 흉폭함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오오오오오오.

길게 이어지는 놈의 괴성에 온몸에 둘러져 있던 피바라기가 한층 더 두텁게 몸을 불리고 그 안으로 땀이 흘러내려 축축하기 그지없다.

이런 놈과 대치하고 있었던건가.

새삼 메데이아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천개의 눈동자도, 그렌델도 이놈과 살벌함만 비교하자면 어른과 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천개의 눈동자는 뭐랄까 괴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자연재해 같은 느낌이었고, 그렌델은 최약체로 분류됐던 만큼 이 정도의 압박감을 주지는 못 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마주한 미노타우르스는 맹수처럼 생생한 살기를 흘려대고 있었다. 거칠고 사나운 놈의 기세에 나는 이를 악다물고 조금씩 메데이아를 향해 다가섰다.

"괜찮아요?"

이미 한쪽 눈이 함몰된 얼굴을 한 그녀에게 하는 질문 치고는 적당하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물었다.

"하하하. 꼴이 말이 아니네요. 보는 것보다는 괜찮아요."

고통이 심할 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작게 웃어 보인 그녀의 얼굴에 언뜻 의아함이 스쳐갔다.

"그보다 마스터 킴은 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쓰게 웃어보였다.

"선발대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인원피해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무사한 것 같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데이아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광기에 가까운 희망으로 번들거린다.

"이아손은? 이아손은요!"

역시나 한결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노타우르스의 기색을 살피며 통신기를 다시 작동시켰다.

"김형준입니다. 혹시 선발대에 이아손의 생존과 관련된 정보 있습니까?"

'메데이아와 합류한 모양이군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무래도 통신기의 조작법이 생소했던지라 후발대에 연락을 하니, 오디세우스가 내 말을 받았다. 잠시간의 텀을 두고 그가 밝은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이아손은 조금의 부상도 없이 살아있답니다!'

"이아손은 살아있다는 군요. 부상도 없고, 멀쩡하답니다."

그 말을 그대로 옮겨주니, 미노타우르스 앞에 홀로 서서도 굳건하게 버텨왔던 그녀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급하게 그녀를 부축하려는데 아까부터 그녀의 주변을 떠돌고 있던 검보라색 구체가 나를 밀어낸다.

'그보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오디세우스의 질문에 나는 미노타우르스의 거체를 올려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괴성을 질러대던 놈이 지금은 어떤 이유에선지 얌전하게 이쪽을 살

펴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군요. 미노타우르스와 대치중입니다. 메데이아씨는 한쪽 눈이 함몰되는 부상을 입은 상태고."

'끄응. 물러날 수는 있을 것 같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미노타우르스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흥미롭게 이쪽을 지켜보는 것 같은 모습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이아손의 생존 소식에 넋이 나간 듯한 메데이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녀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소한 동작이었을 뿐이지만 미노타우르스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지며 사나워진다.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소드 엠프레스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지금 마스터 킴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 최대한 빠르게 이동중이니 그때까지 무사하시기를.'

마침 미노타우르스의 기세가 변하는 중이라 통신을 종료했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미노타우르스를 들이받을 작정으로 무작정 뛰어들었지만 막상 미노타우르스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으니, 이 대치 상태가 길게 이어

져 후발대가 합류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메데이아. 메데이아."

이아손의 생존에 남은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미친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메데이아를 몇 번인가 나직하게 부르니, 그녀가 한참만에야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아손보다 이제 우리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무거운 상황이지만 내 음성이 묘하게 가볍다. 어쩐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어 생각해보니 1등급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꽤나 여러번 비슷한 상황을 겪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D섹터에서 촬영팀을 이끌고 갔던 날 용아병을 만났었을 때, 이름 모를 병원에서 돗가비 한쌍을 만났었을 때.

어쩐지 미노타우르스의 압박감에 무겁게 짓눌렸던 어깨가 펴지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래.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왠지 모를 시원함에 몸을 이리 저리 비틀며 긴장을 푸는데 메데이아가 나를 불렀다.

"마스터 킴?"

"아.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요."

이능력이 1등급에 올라서면서 어찌 된게 더 겁이 많아졌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고 생각이 깊어졌던 탓일까. 이제 와서 이렇게 미노타우르스와 마주하고 나니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느꼈던 후련함과 통쾌함이 시원하게 가슴에 퍼져갔다.

"괜찮겠어요? 부상이 좀 심한데."

한쪽 눈을 잃은 상태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 메데이아의 모습에 감탄이 흘러나왔지만, 저 상태라면 전력을 다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킥."

분명 고통이 클텐데도 불구하고 내 질문에 키득거린 그녀가 미노타우르스의 눈

치를 보며 품을 뒤졌다. 설마... 그녀가 제조했던 비약이 황룡의 저우제론을 치료했던 것이 떠올라 눈을 크게 뜨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손에 손톱만한 약병이 쥐어져 있다.

내가 지켜보는 사이에 그녀가 약병을 그대로 얼굴에 쏟아 부었다. 반 정도는 눈가에 뿌리고 반 정도는 직접 입에 대고 마신 그녀의 함몰된 눈가가 경련을 일으킨다.

움푹 파였던 눈가가 경련하는 가운데에 피부가 부글거리며 기포가 끓어오르듯 끓다가 조금씩 제 빛을 찾아간다. 흉물스럽게 함몰됐던 눈가가 원상태로 솟아오르고 찢겨지고 뒤틀렸던 눈꺼풀이 보기 좋은 원래의 모양을 찾았다.

"이제 걱정 없죠?"

지독스럽게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싸울 건가요?"

이제는 조금씩 처음 보았을때의 흉포한 기세를 찾아가는 미노타우르스의 눈치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 싸웠으면 좋겠지만 저 소대가리가 놔줄 것 같지는 않네요."

우오오오오오!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노타우르스가 갑작스러운 괴성을 내질렀다. 발을 쿵쿵 구르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혹시라도 미궁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질 지경이었다.

"후발대가 빠르게 오고 있다니까 버텨 보죠."

내 말에 메데이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아손의 생존 소식을 들은 후부터 생기가 감도는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니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인상 깊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서포트 할게요."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떠다니던 미세한 구체들이 탁구공만한 크기로

자랐다가 다시 농구공만한 크기로 자라났다. 그 모습에 미노타우르스가 자극을 받았는지 더욱 심하게 난동을 부렸다.

전투가 임박했음을 느끼고 나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올렸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피의 갑주가 두텁게 자랐다가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응축되고 응축된 내 생명력이 갑주의 형태를 빌어 요동을 쳤다. 등뒤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오르고 나는 그 익숙한 느낌에 천천히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마침내 미노타우르스의 난동이 멈췄다. 놈이 일으킨 흙먼지만이 자욱한 공간에서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미노타우르스와 우리가 서로를 마주 노려본다.

소의 머리를 한 놈이지만 실제 모습은 더욱 흉악하다. 온통 붉게 물든 눈가는 쭉 찢어져 소의 온순한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였고, 거대하게 솟아오른 뿔은 네 갈래로 갈라져 살벌한 빛을 번뜩였다. 날카로운 이빨이 불규칙하게 자란 주둥이에서 쉴새없이 침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센 놈의 콧바람을 느끼며 나는 온몸의 근육을 잔뜩 조였다.

그리고 놈의 입이 벌어지며 괴성을 다시 내지르려던 찰나, 나는 그대로 놈에게

달려들었다.

"한번 놀아보자 이 소새끼야!"

발걸음을 서두르던 전지현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서둘러요!"

비록 한국말이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기색으로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오디세우스가 일행을 재촉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이가 미노타우르스와 전투를 시작했어."

아까보다는 빨라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차지 않는 일행의 이동속도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그녀가 일전에 상대했던 천개의 눈동자와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었다. 아니, 흉폭하고 강맹한 것으로 따지자면 지금의 기운이 더욱 크다고 할까.

그렌델 다음의 약체라고 평가되는 몬스터라며 호기롭게 그리스행을 결정했던 김형준의 얼굴이 떠올리니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비록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장을 한 그였다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라면 홀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 먼저 가도록 하마. 서둘러서 뒤를 따라오거라."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일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어둠 속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행들이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려보지만 유게네스의 일행들의 속도가 받쳐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적성에 상관없이 이능의 등급만 보고 구성한 인원이다 보니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도맥의 인물들만 해도 주술의 힘을 빌어 신체능력을 극대화 시켜 속도를 올리는데 반해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은 그저 이를 악물고 달릴 뿐이라 진태식의 이가 악다물렸다.

김형준과 전지현,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강자들이지만 그가 막연하게 느끼는 미노타우르스의 기운이 워낙에 거대했던지라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진태식이 다시 유게네스의 일행을 뒤돌아보며 외쳤다.

"우리도 먼저 간다!"

진태식의 말에 검맥과 도맥의 인원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을 빛내며 속도를 끌어올렸다. 그들이 그렇게 전지현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유게네스의 일행들도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온 사방이 진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미궁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진동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이곳저곳에 몸을 멈춰 선다. 단단하던 대열이 단숨에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떠는 사이에 어느새 진동이 잦아든다.

============================ 작품 후기 어제는 휴재를 했습니다. 도살자 두편을 올리고 나니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서. 대신 오늘은 두편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단 전편 내용 가져다 붙이기는 호불호가 갈리는 고로 결정을 보류하겠습니다. 다만 찬성하시는 분들은 그러면 편하다 정도이신데 반해, 반대하시는 분들은 눈에 심히 거슬린다라는 거부감을 표하시니 아무래도 반대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 같습니다.

결정을 할때까지는 전편내용 붙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연참할 예정이지만 추천과 코멘트 막편에만 달기 있기 없기? 없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연참할 예정이지만 추천과 코멘트 막편에만 달기 있기 없기? 없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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