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콜키스에서 탈출하면서 자신의 친동생을 토막 내었을 때 이미 그녀는 부서지고 망가져 버렸다.
오직 이아손을 향한 사랑으로 그를 돕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 탓에 그에게 버림을 받았다. 스스로를 망쳐가며 사랑을 지키려 했지만 이제 와서 남은 것은 집착과 비뚤어진 사랑뿐.
이제는 자신을 보기만 해도 몸을 떨어대며 피하기 바쁜 이아손을 떠올리자 그녀의 바짝 마른 입 안에 쓴맛이 퍼져 나간다. 야속하고, 비열하고, 무능력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남자.
품속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약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는 액체를 입에 부어 넣은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크윽."
그녀의 입에서 갑작스레 신음성을 내뱉으며 벽을 집었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벽에 의지해 주저앉은 그녀의 눈이 초점이 풀려 있다.
한참을 그렇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금 전보다 한층 빨라진 걸음으로 선발대의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이 끝에 남은 것이 그의 시체든, 나의 죽음이든. 일단 인생은 결말이 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니까.
나약해졌던 눈동자에 다시 독기가 차오르고 그녀의 표정이 다부지게 변한다.
빠르게 이동하던 터라 가뜩이나 어두운 통로의 어디가 천장인지 어디가 바닥인지조차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빠르게 뒤로 밀려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
기감에 의지해 음습함 속에서 홀로 빛나는 기운을 쫓아 땅을 박찼다. 벽이 나오면 벽을 부수고 몬스터가 나오면 통째로 썰어버리며 그렇게 나는 메데이아를 찾아 달렸다.
쉭쉭거리는 바람소리 사이로 통신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오디세우스가 빠르게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선발대 인원 2등급 이능력자 29명 사망 외 피해 없음.'
2등급 이능력자 29명 사망이면 출정한 선발대의 2등급 이능력자 전력중 반 이상이 소실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의 음성은 밝았다.
"연락두절 이유는 뭐랍니까."
달리는 중이라 짧게 물으니 그가 통신기 저편에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쪽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만 미궁의 길이 수시로 변화하는 것 같다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미궁의 길이 수시로 변한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달리는 속도가 떨어지다가 끝에 가서는 완전히 멈춰서 버렸다.
어쩐지 신나게 달려도 딱히 빠르게 이동하는 것 같지 않은 메데이아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게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길 자체가 복잡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거리가 들쭉 날쭉이랍니다. 그러니 행여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를.'
"아.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은데... 메데이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네요. 엿
차."
오디세우스의 말에 대답을 하다가 그대로 고개를 오른손을 내뻗어 손을 움켜쥔다. 끄아아악!
'마스터 킴?'
"아. 잠시 몬스터들이 걸리적 거려서. 이야기 하세요."
잘 다져진 고기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짓뭉개진 몬스터의 사체를 피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오디세우스의 설명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미궁 자체가 생명력을 갖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캬악!
'저희도 최대한 속도를 올려서 전진하고 있으니... 음.. 정말 괜찮으십니까?'
"아. 그냥 몬스터 몇 마리가 달려들었을 뿐이에요. 괜찮으니 얘기해요."
빠르게 이동중일 때는 내 속도를 쫓지 못하던 몬스터들이 뒤늦게 내게 몰려들
고 있다. 하나 같이 흉측한 주둥이를 텁텁 거리며 달려드는데 나는 가시찔래 꽃을 소환해 놈들이 다가오는 족족 생명력을 흡수했다.
'지금 메데이아랑 합류는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이요. 미궁이 변하긴 변하는지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줄지를 않아서..."
몬스터들의 괴성이 통로를 울려대는 통에 통신기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를 않는다. 나는 주변에 늘어선 몬스터들을 향해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내밀며 빠르게 주변을 정리했다. 손 끝에서 내뿜어진 붉은 기운이 뭉클거리다가 넓게 펴져 몬스터들을 그대로 녹여버렸다.
그렇게 통신을 하는데 멀리서 느껴지던 메데이아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니, 기운이 늘어났다기보다는 그녀의 주변에 강력한 에너지들이 파동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 전에도 이런 식의 파동을 본 적이 있었다.
템플러의 간달프가 이능을 발현했을 때, 마법이라 불리는 그의 이능이 꼭 이런식의 파동을 만들어냈었다. 물론 지금의 파동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지만 느낌은 같았다.
"잠깐만요! 메데이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파도처럼 주변의 기운을 쓸어버리며 휘몰아치던 파동이 일순간 폭발하듯 늘어났다. 내 짐작이 맞다면 지금 이 기운은 메데이아가 발현한 이능의 여파, 1등급 이능력자인 그녀가 이정도나 힘을 끌어다 써야 할 상대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제길!"
미노타우르스, 미궁의 주인인 놈이 나타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 느껴지는 별다른 기운은 없었는데... 의문을 그대로 묻고 나는 땅을 박차고 그녀를 향해 달렸다. 이번만큼은 작정하고 내달린 터라 메데이아와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1킬로미터...800미터...700미터...600미터...500미터... 그리고 내가 약 300여 미터의 거리까지 갔을 무렵이었던가, 메데이아의 기운
이 또다시 요동을 쳤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파동에 먼 거리에 있는 나조차도 솜털이 곤두섰다.
쾅!
그리고 들려오는 폭음, 어두운 통로를 돌고 돌아 마치 연쇄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온 사방이 폭음으로 가득찼다.
다시 300미터... 나는 등가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엄청난 기운이 메데이아의 바로 지척에 도사리고 있었다. 음습하면서도 강대한 기운은 끊임없이 기운을 키우고 키워 끝에 가서는 온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로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파동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진다. 빠르게 뒤로 밀려가던 주변의 풍경이 다시 정적으로 변하고 마침내 멈춰섰다.
'마스터 킴, 괜찮으십니까!'
침묵하고 있던 통신기가 다시 시끄럽게 비명과도 같은 음성을 토해냈다. 이 정
도로 막대한 기운의 파동이라면 먼거리에 있던 후발대에도 닿았을 것이다.
'이 에너지는... 마스터 킴! 마스터 킴!'
오디세우스의 음성이 미친 듯이 나를 불러댄다. 나는 넋이 나간 것처럼 그저 엄청난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전방을 주시했다.
어둠에 가려진 통로의 끝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무언가에 나는 나도 모르게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위험을 느낀 본능 탓인지 어느 때보다 두터운 피의 갑옷이 나를 에워싸고 기운이 절로 발현되어 주변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듣고 있어요."
통신기의 재촉에 응답하는 내 음성이 지독스럽게 무겁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이 기운은 필시...'
"미노타우르스..."
읍습하면서도 흉포한 커다란 기운, 이 거리에서 몸이 떨려올 정도로 위협적인 기운은 필시 미노타우르스의 그것이리라.
"제길..."
뭐가 그렌델의 바로 위야. 이 정도 힘이라면 그렌델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이다. 나도 모르게 그간 만들어온 미노타우르스에 대한 예상, 그 강함의 정도가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를 깨닫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흉폭함만 보자면 대한민국의 '멸망을 지켜보는 눈'보다 더욱 강력한 기운을 가진 미노타우르스의 기운에 아직도 떨림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미노타우르스와 만난 것입니까?'
오디세우스의 음성이 통신기 너머에서 다급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오디세우스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마스터 킴! 절대 부딪쳐서는 안 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몸을 빼십시오!'
그의 음성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것과 동시에 미노타우르스라고 추정되는 기운의 앞에 놓인 메데이아의 기운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뿜어내던 그녀의 기척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약하게 꺼져간다.
"지금 몸을 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럼 당장 물러나십시오! 절대로 경거망동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래도 메데이아가 지금 미노타우르스랑 전투 중인 것 같아요..."
몇 번이나 나에게 물러서라 경고하는 오디세우스의 음성에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 메데이아가 말입니까?'
내 말에 경악한 오디세우스의 음성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네... 아직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 1등급 이상의 이능력자가 미노타우르스와 전투중, 또는 대치중입니다."
지금은 미노타우르스의 기운에 가리워졌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맹하게 터져 나오던 에너지의 파동을 떠올리며 나는 분명 저곳에 메데이아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 그 1등급 이능력자는 메데이아겠지요."
'제길... 어쩌다가...'
욕설이라고는 모를 것 같았던 오디세우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연달아 튀어 나왔다.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한참만에 들려온 음성은 오디세우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금은 더 젊고 패기가 있는 음성, 페르세우스의 음성이다.
"모르겠습니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아직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이 정도의 기운이라면 그렌델을 처치했던 나에게도 공포스러울 정도다. 막상 부딪쳐보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아서는 당장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다.1등급으로 각성하며 잊고 있었던 공포가 내 등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최대한 빠르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무사하십시오.'
페르세우스의 음성이 잔뜩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는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메데이아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본의 아니게 메데이아를 부추겨 사지로 밀어넣은 장본인이 그였으니만큼 헤어지기 직전까지 죄책감을 보였던 페르세우스다. 지금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서린 간절함이 절절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통신기 너머에서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행을 재촉해서 지금 이곳으로 죽어라고 달려오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올 때까지 메데이아가 무사할까.
지금 당장에야 미노타우르스의 기운에 맞서서 강력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지만, 그 기운의 밀도나 크기가 비교가 되질 않는다. 당장 미노타우르스가 달려들면 바로 스러질 것 같은 바람 앞의 초와 마찬가지인 그녀,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으십니까.'
통신기 너머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바람소리가 쉭쉭 거리는 것이 이동중인 듯 했는데, 그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아. 괜찮아요. 일행하고는 다 괜찮죠?"
헤어진지 한 시간이 좀 넘었을 뿐인데 안부를 묻는 상황이 우스웠지만 그만큼 이곳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아이들이야 별일 없습니다. 그보다 미노타우르스를 만나셨다니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진심어린 지현의 염려에 나는 비록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미소를 베어물었다.
"아직 만난 것은 아니고, 코 앞에서 기척을 느낀 거예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메데이아가 지금 놈과 대치하고..."
내가 그녀와 통신을 나누는 사이에 미노타우르스의 기운이 한층 더 끈적끈적해지기 시작했다. 넓게 퍼져나가던 놈의 기운이 이제는 날카롭게 변해 찌르듯이 쏘아져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의 끝에 놓인 것은 메데이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흔들림 없던 기운이 단숨에 미약해지고 희미해져간다.
"제길..."
'당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조금씩 간격을 좁혀가는 메데이아와 미노타우르스의 기척에 나는 세게 이를 악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
"빨리 와요..."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몸을 웅크렸다.'
아.. 안돼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웅크렸던 몸이 단번에 튀어나가며 전방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빨리 오라고요!"
비명과도 같은 내 말에 통신기 너머에서 지현의 목소리가 고함을 쳐대는 것이 들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그녀가 나에 대한 걱정으로 연달아 고함을 쳤다. 경솔한 내 행동에 미안함을 느꼈지만 나는 걸
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음습한 기운이 요동을 치는 그 중심을 향해 내달렸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업무가 좀 많아서 이제서야 글을 올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ㅜ최신화마다 전편 내용을 가져다 붙이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순수혈통님. 일전에도 지적해주셔서 한참 전편 내용 가져다 붙이기를 없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로도 쭉 가려 했지만 쪽지나 댓글로 전편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일정 부분을 떼어내어 최신화에 붙여달라는 분들이 중간중간 계셨었지요.
그래서 독자분들의 요청에 의해서 붙여넣기를 다시 시작한 건데 그 부분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하시니 제 입장에서는 심히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일단 인터넷 연재의 이점을 이용해 독자분들께 의견을 구하겠습니다. 전편 내용 붙여넣기에 대해 부정적인 분들이나 긍정적인 분들은 코멘트 내지는 쪽지로 피드백 부탁 드리겠습니다.
의견 수렴하여 다음 편부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전편에서 메데이아의 캐릭터에 대해 지적을 해주신 분들이 계신데 그에 대한 답변을 마당쇠님께서 코멘트로 너무 상세하게 잘 해주셔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리코멘트는 못하고 있지만 독자님들의 코멘트 쪽지등은 늘 몇번씩 곱씹어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 점이 늘 죄송스럽네요. 조만간 다시 리코멘트를 부활시킬까 하는데 이부분도 피드백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