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47화 (147/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당신 마음이 가는 곳이 곧 길입니다. 대사를 생각해 소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은 당신 성정에 맞지 않는 결정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메데이아가 아닌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쓰디 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음이야 편치 않지만 그렇다고 대신 희생해줄 수도 없으니까요. 지금은 부디 선발대에 큰 일이 없고, 메데이아가 무사귀환하기를 바랄 뿐이죠."

그녀의 말에 충동적으로 선발대를 향해 가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내리 눌렀다. 지금은 내 감정에 휩싸여 돌발행동을 할 때가 아니니까.

내 말에 안타까운 얼굴로 나와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 바라본 지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닫았다.

유게네스의 일행들도 귀환을 위한 준비가 대체적으로 끝난 상황인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들이 우리를 지나쳐 다시 선두에 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돌아갑시다."

유게네스의 행렬을 따르는 내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나는 메데이아가 사라진 복도의 저편이 다시 어둠에 잠겨드는 것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우리는 미노타우르스와 만나지도 못한 채 다시 미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돌아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유게네스의 행렬도 마찬가지로 그 터덜거리는 발걸음에 복잡한 내심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아 걸음을 옮기는 내내 속이 갑갑했다.

그렇게 그들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기 시작한지 20여분이 지났을까, 선두열이 멈춰 섰다. 몬스터라도 만났나 싶었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함에 그들을 바라보는데 오디세우스가 희열에 찬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선발대!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뜬금없는 희소식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디세우스가 평소의 진중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연락이 두절됐던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전멸한 게 아니었나? 뒤늦게 연락이 닿은 선발대의 존재에 나는 반가움과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홀로 미궁 속으로 들어간 메데이아가 떠올랐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드리겠습니다. 대열 다시 전진 대형으로!"

선발대의 생존 소식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작게 환호하며 대열을 가다듬는다. 다시 우리를 지나쳐 미궁의 중심부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선발대가 살아있답니다."

궁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에게 오디세우스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선발대와 연락이 됐다는 소식에 나는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요동치는 가슴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지경인데, 지현이 나를 보고 말했다.

"가십시오."

그녀의 말에 그제야 나는 한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명이네 뭐네. 줄창 떠들어댔지만 나부터가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간 이리 저리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에 피해의식이 생긴 것일지, 나답지 않게 이런 저런 계산으로 자신을 억눌렀던 모양이다.

"여기 통신기를 가져가십시오."

언제 챙겼는지 모르게 오디세우스에게 통신기를 받아다 내게 내미는 지현의 모습에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니 그녀가 나를 재촉했다.

"자세한 사정은 통신기를 통해 연락드릴 겁니다."

그녀가 내미는 통신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일행의 시선을 느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 속에 공통점은 무한한 신뢰 하나.

"그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나는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

다.

전지현은 마음이 무거웠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스스로를 억누르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 만났을 때만 해도 가벼우면서도 심지가 곧았던 그의 성정이 언제부턴가 수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과 그 일이 있고 난 후였으리라. 그 뒤로 그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끼며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죄책감과 책임감에 그가 망가져가고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스스로 이겨내길 바란 그녀다. 그녀가 아무리 말해봐야 그를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그를 옭아맸던 것은 그녀였던 모양이다. 도맥의 가르침을 틈틈이 그에게 알려주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일행의 안전이니 남은 사명이니.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려 한 모양이지만 퇴각하는 와중에도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어찌나 돌아보던지.

"선발대!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들려온 오디세우스의 말, 생소한 그리스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다시 뭐라고 흥분해서 외쳐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니, 그가 선발대가 살아있다고 설명을 해준다.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방금 전과 지금의 얼굴이 얼마나 다른지. 그의 시선이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는 사이,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간단한 제스츄어로 통신기를 요청했다.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상황을 파악한 오디세우스는 흔쾌히 통신기의 여분을 그녀에게 지급했다. 그렇게 일행에게 돌아오니 그는 아직도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가십시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그의 시선이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 수시로 변하는 얼굴에 갈등과 깨달음, 여러 가지 기색이 스치듯 사라져 간다.

"여기 통신기를 가져가십시오."

그녀가 조그만 통신기를 그에게 내밀자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자세한 사정은 통신기를 통해 연락드릴 겁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간절히 소망했다. 그가 이번 기회에 모든 굴레를 벗어나기를. 어디까지 날아오를 지는 그 자신의 몫이지만 부디 자신으로 인해 생긴 거리낌만큼은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그럼..."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날린다.

달리면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천개의 눈동자와 그렌델, 그리고 일행들의 모습과 연아. 지난 일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 펼쳐지고 다시 사라진다.

그들의 모습이 하나 하나 사라져갈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 끝에 가서는 메데이아가 홀로 어두운 통로로 걸음을 옮기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내 사라진다.

큭. 역시 난 리더로는 실격인가.

이런 저런 계산을 굴렸지만 늘 갑갑했다. 처음에는 지현에 대한 죄책감과 힘에 맞는 책임이라는 가르침을 지키려 했다.

천방지축 까불어대던 4등급 시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더 이상 예전의 김형준처럼 살기에는 내 어깨에 얹어진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사랑하는 그녀와 연아. 검맥과 일산의 괴수. 이 모든 것이 나 스스로를 옭아맸던 것일까.

나는 달리면서 기감을 활짝 열었다. 미로처럼 펼쳐진 복잡한 통로들이 머릿속

에서 그린 것처럼 펼쳐지고 그 안에 꾸물거리는 기운들이 느껴졌다.

메데이아와 헤어진 지 얼마 돼지 않았지만 나는 속도를 높였다. 아무리 1등급 이능력자라지만 왜곡이 이정도까지 진행된 미궁의 중심부에서 그녀가 홀로 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무리다. 더군다나 그녀는 직접 전투계 이능력자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미궁을 헤매다가 쓸쓸하게 홀로 죽게 하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불쌍했다. 평생을 이아손에게 이용만 당하고, 제대로 된 보답 한번 받지 못하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죽어가다니. 너무 비참한 인생이다.

'믿음이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말이군요. 남편을 위해 동생도 죽였고,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게 남은 것은 집착과 소유욕, 비틀린 사랑뿐이랍니다.'

그녀가 내 방을 나서며 남겼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편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시밭길을 헤쳐가며 살아온 그녀, 이아손 대신 온갖 오물을 몸에 묻혀가며 여기까지 온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가련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싸구려 동정심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이 가슴 속에 느껴지는 후련함이 컸다. 미궁에 들어서고부터 줄곧 갑갑해졌던 가슴이

처음으로 시원하게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이런 저런 계산을 했다고. 사나이 갑바가 있지!

조금씩 내 속도가 빨라진다. 기감에 걸리는 기운 하나가 메데이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들 사이에 홀로 빛나는 기운 하나를 방향삼아 나는 달리고 달렸다. 몸이 쭉쭉 앞으로 뻗어나가고 몸이 가벼워진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통쾌함이 자리를 잡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벼워지는 심신에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메데이아를 향해 내달렸다.

메데이아는 어둠 속을 홀로 헤매고 있었다. 선발대가 남겨둔 흔적을 따라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저벅, 저벅.

자신의 발걸음 소리만을 벗 삼아 한참이나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두렵다.

어둠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아손 그가 잘 못 됐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조바심이 난다.

자신이 지체하는 사이에 그가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느려지고 빨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아손은 일전에도 계략을 써서 자신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 유치하고 저급한 방법에 당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몇 번인가 암살시도와 계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이번 일도 그런 것이 아닐까. 페르세우스를 부추겨 자신을 유인해 혼자 미궁 속에서 쓸쓸하게 죽게 만드는 것이 이아손의 계획은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것이 이아손의 계략일지라도 그녀는 가야했다. 위험에 빠져있을지 모르는 이아손을 위해서라도 이 길의 끝까지 가야만 했다. 혹여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이 이아손의 비열한 계략이라 자신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녀는 가야 했다.

그 멍청이가 정말로 위험에 빠진 것이라면 어떻게든 구해야 했으니까. 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같이... 마음이 다시 급해지고 걸음이 빨라졌다. 자신 스스로가 직접 전투계가 아니라 그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갑갑한 그녀였다. 무리하게 걸음을 서두르다가 발치에 채이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도 벌써 어려번이었다.

무려 1등급 이능력자씩이나 되어서 바닥을 나뒹구는 꼴사나운 일을 겪을 뻔 했지만 그녀는 더욱 걸음을 바삐 할 뿐이다.

이아손 멍청아. 기다려. 내가 갈게.

그녀가 입으로는 끊임없이 이아손을 찾았다. 때로는 욕을 지껄이고 때로는 사랑을 속삭였다. 미친사람처럼 어둠을 헤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

이 지독스럽게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잡아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를 잡아줄 사람이 있기는 했을까.

셀 수 없이 긴 시간을 이아손을 부여잡고 버텨온 그녀다. 콜키스에서 탈출하면서 자신의 친동생을 토막 내었을 때 이미 그녀는 부서지고 망가져 버렸다. 오직 이아손을 향한 사랑으로 그를 돕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 탓에 그에게 버림을 받았다. 스스로를 망쳐가며 사랑을 지키려 했지만 이제 와서 남은 것은 집착과 비뚤어진 사랑뿐.

이제는 자신을 보기만 해도 몸을 떨어대며 피하기 바쁜 이아손을 떠올리자 그녀의 바짝 마른 입 안에 쓴맛이 퍼져 나간다. 야속하고, 비열하고, 무능력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남자.

품속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약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는 액체를 입에 부어 넣은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크윽."

그녀의 입에서 갑작스레 신음성을 내뱉으며 벽을 집었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벽에 의지해 주저앉은 그녀의 눈이 초점이 풀려 있다.

한참을 그렇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금 전보다 한층 빨라진 걸음으로 선발대의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자. 이 끝에 남은 것이 그의 시체든, 나의 죽음이든. 일단 인생은 결말이 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니까.

나약해졌던 눈동자에 다시 독기가 차오르고 그녀의 표정이 다부지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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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후기 쿠폰 2장을 줄테니 연참을 하라는 말씀에 흔들렸습니다. ㅋㅋㅋ

하지만 연참이 글쟁이의 수명을 얼마나 줄이는 짓인지 요즘 확연하게 꺠달았던지라 꾹 참고 차라리 비축분을 모으겠습니다... 라고 하고 비축분 생기면 바로 또 투척 하겠죠 저는 ㅋㅋ 인내심 고자, 비축분 토끼니까요. ㅋㅋ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완결 안 짓고 신작 팠다고 염려해주시는 독자님이 계신데 걱정 마시기를. 저는 글 연재하면서 하나만 연재한 적 한번도 없습니다. 늘 출판 글 교정과 집필, 그리고 다른 작품들등 3작품씩 글을 써왔습죠.

신작이라 알려드린 '도살자 - 이토록 멋진 세상'도 현재 40화가 넘게 전개된 상태이니 아예 신작은 아닙니다.

연중이나 그런 거 없이 쭉 갈테니 너무 심려치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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