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흠. 선발대에 이아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발대를 포기할 건가?"
그 명백한 도발에 나는 불안감의 실체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내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사이에도 그들 사이의 말이 조금씩 날카로워지고 있다.
"당신 지금 헤라클레스와의 친분 때문에 상황판단이 느려진 모양인데, 지금 우리라도 몸을 빼는 것이..."
"다시 묻지. 이아손이 선발대에 있다면?"
페르세우스가 가차없이 메데이아의 말을 잘라내며 물었다. 그제야 페르세우스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느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이아손이 선발대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집요하게 메데이아의 약점을 건드리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 이아손은 선발대에 포함되어 있으리라.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는지 페르세우스가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못 봤겠지만 이아손이 선발대에 섞여 들어간 걸 난 봤거든."
"이아손이 왜..."
"그건 나도 모르지. 무서운 마누라 피해서 다른 여자 꽁무니라도 따라간 모양이야."
나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페르세우스의 비아냥에 대꾸도 못하고 창백하게 질린 메데이아가 입술을 잘근 잘근 씹어댔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이아손을 붙들고 살아온 메데이아다. 사랑과 증오를 한데 버무려 비틀리고 어그러진 집착을 키워온 그녀가 이아손을 포기할 리가 없다.
"나는 헤라클레스를 구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남편을 구해."
페르세우스가 그 틈을 비집고 교활한 웃음을 보였다. 곁에 있던 오디세우스조차도 어그러진 상황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와서 번복할 셈은 아니리라 생각하겠소. 메데이아. 그대도 분명 지금 상황에서는 퇴각하는 것이 맞다고 하지 않았소."
뒤늦게 메데이아를 달래는 오디세우스였지만 이미 메데이아는 눈빛부터가 돌
변했다.
아직까지는 아무말도 없이 그저 입술만 짓씹는 그녀지만 이미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여기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메데이아. 이아손.
답이 뻔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이아손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헤라클레스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쉽게 당하지 않겠지만, 이아손은 허약하잖아?"
그 비열한 이죽거림에 나는 절로 노기가 치밀어 올라 페르세우스를 노려봤다. 메데이아를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은 민망한 표정의 그가 나를 모르는 척 한다.
"페르세우스. 그대가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꺼낸 저의를 모르겠군."
오디세우스가 페르세우스를 질책했다. 퇴각이 결정된 시점에서 메데이아의 결정을 뒤집게 만든 덕에 우리는 또다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내부로 들어가겠다면 저희는 인원을 빼겠습니다."
메데이아가 번복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우리 일행이 빠지면 이들이 부담해야 할 위험이 더욱 커진다. 약삭빠르게 그 점이 혹시 메데이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 행동이다.
내 선언과도 같은 한마디에 페르세우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오르고 오디세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직 메데이아만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만 질겅대고 있을 뿐이다.
"마스터 킴의 일행만으로 귀환은 위험하실 텐데요?"
"여기서 무리하게 들어가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겠죠."
페르세우스의 말에 조금은 비꼬는 어투로 대꾸를 하니 그의 얼굴에도 갈등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메데이아?"
페르세우스가 메데이아를 재촉한다.
"일행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나도 마스터 킴 일행과 함께 돌아가겠소."
오디세우스가 내 말에 힘을 실어준다. 그 의외의 결정에 페르세우스가 화가 난 표정으로 오디세우스를 몰아붙였다.
"마스터 킴 일행은 몰라도 어떻게 당신까지!"
"나는 살아남아서 유게네스를 책임져야 할 사명이 있소. 그대처럼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할 여건이 아니라오."
"그런 되도 않을 변명을!"
그들의 언쟁을 보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분이다. 미노타우르스를 만나기도 전에 내분이 일어나다니, 그렌델을 상대할 때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다.
"선발대를 찾아가겠어요."
한참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언쟁이 과격해지는데 불쑥 끼어드는 메데이아의 음성.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오르고 페르세우스가 반색을 한다. 하지만 그런 페르세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돌아가요. 저는 혼자서 선발대를 찾아보겠어요."
그 결연한 말에 사람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페르세우스 당신이 날 따라오건 말건 상관없지만 다른 인원들은 돌려보낼 거예요."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안타까운 기색을 떠올리고, 페르세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어 발만 동동 굴렀다.
"마스터 킴, 먼 곳까지 와서 못 볼 것만 보다 가시는 군요. 이번 작전은 엄연한 유게네스의 실책, 이렇게 귀국하시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거예요. 그렇죠, 오디세우스?"
뜻밖에도 평정을 찾은 메데이아의 말이 의외롭기 그지없었다. 오디세우스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만! 나와 이아손이 어떤 관계인지 않다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녀의 단호한 결정에 결국 일행은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페르세우스만이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하는 얼굴로 메데이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페르세우스.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오디세우스가 조금은 비웃는 듯한 얼굴로 페르세우스의 결정을 재촉했다. 몇분 사이에 상황이 급변하자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연 그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귀환하겠습니다..."
그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결국 헤라클레스와의 우정이고 뭐고 스스로의 생존을 선택한 페르세우스다. 거기에 엮인 메데이아만이 위험에 빠지게 생긴 터라 그를 보는 내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페르세우스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본다.
"마스터 킴..."
메데이아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결국 이리 될 것을 왜 이아손의 이야기를 꺼내 메데이아까지 걸고 넘어졌는지 페르세우스라는 작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전에 드린 비약은 절대 해로운 것이 아니니 꼭 복용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여기 이것들, 귀환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품에서 이런저런 약병들을 꺼내 나에게 넘겨주는 그녀의 모습이 꼭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해 입맛이 썼다. 당장에라도 돕겠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일행의 안위를 생각해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나도, 저들도 죽을 장소가 정해져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의 땅이 아닌 대한민국 괴수와의 전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알량한 의협심으로 목숨을 잃기에는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빨간색은 외상치료, 파란색은 기력 치료, 녹색은 해독제, 보라색은 일시적인 능력의 증폭이니까 돌아가는 길에 요긴하게 쓰세요."
손가락 두마디만한 약병 십수개를 내게 넘겨준 그녀가 마지막 인사를 해온다.
"그럼 부디 무사귀환 하시고 다시 볼 날이 또 왔으면 좋겠네요."
악녀라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모두 이아손의 탓, 사실 그녀가 저지른 모든 악행은 남편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십자가를 짊어지고도 결국 남편에게 버림받은 그녀가 남편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아이러니한 그녀의 운명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꼭 다시 볼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우습다. 막강한 전력의 선발대가 연락이 두절되고, 후발대 역시 퇴각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1등급 이능력자라지만 홀로 미궁의 중심을 향해 가는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다.
내 인사에 막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디세우스의 지휘에 후퇴하기 위한 대형을 갖춘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그런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본다. 안타까워 하는 눈빛도 있고, 미궁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눈빛도 있다.
"메데이아, 부디 행운이 있기를 바라겠소. 여신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오디세우스의 말에 그녀가 잠시 멈칫 했다가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페르세우스는 불편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후회와 자책의 기색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메데이아씨만 혼자..."
일행에게 돌아가자 진태식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선발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이대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일행에게 설명하는 내 말투가 한 마디 한 마디 쓰기만 했다.
"저렇게 혼자 가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럼 태식이 네가 같이 갈래?"
상황을 파악한 김도연이 날카롭게 진태식을 쏘아 붙였다. 짧은 설명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나머지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다.
"그래도 말리기라도 해야지. 저렇게 가면 죽을 게 뻔한데."
"말려서 들을 거였으면 진즉에 말렸겠지. 답답하기는."
우리 일행의 일도 아닌 일로 김도연과 진태식이 말다툼이라도 할 기색이라 내가 그들을 중재했다.
"그만! 우리에게는 '천개의 눈동자'라는 사명이 있어. 가벼운 동정심에 함부로 몸을 굴릴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경험을 쌓고 힘을 모아 일산에 웅크리고 있는 괴수를 퇴치하는 것, 이런 곳에서 타국의 이능력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지현이 나에게 물었다. 그 안에 담긴 염려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지만 나는 내색치 않고 대답했다.
"괜찮기를 바라야죠."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그렇게 대답하니 지현이 다시 말했다.
"그녀 말고 당신 말입니다."
그 영문 모를 말에 눈을 크게 뜨니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당신 마음이 가는 곳이 곧 길입니다. 대사를 생각해 소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은 당신 성정에 맞지 않는 결정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메데이아가 아닌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쓰디 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음이야 편치 않지만 그렇다고 대신 희생해줄 수도 없으니까요. 지금은 부디 선발대에 큰 일이 없고, 메데이아가 무사귀환하기를 바랄 뿐이죠."
그녀의 말에 충동적으로 선발대를 향해 가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내리 눌렀다. 지금은 내 감정에 휩싸여 돌발행동을 할 때가 아니니까.
내 말에 안타까운 얼굴로 나와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 바라본 지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닫았다.
유게네스의 일행들도 귀환을 위한 준비가 대체적으로 끝난 상황인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들이 우리를 지나쳐 다시 선두에 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돌아갑시다."
유게네스의 행렬을 따르는 내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나는 메데이아가 사라진 복도의 저편이 다시 어둠에 잠겨드는 것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우리는 미노타우르스와 만나지도 못한 채 다시 미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돌아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유게네스의 행렬도 마찬가지로 그 터덜거리는 발걸음에 복잡한 내심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아 걸음을 옮기는 내내 속이 갑갑했다.
그렇게 그들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기 시작한지 20여분이 지났을까, 선두열이 멈춰 섰다. 몬스터라도 만났나 싶었지만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함에 그들을 바라보는데 오디세우스가 희열에 찬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선발대!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뜬금없는 희소식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디세우스가 평소의 진중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연락이 두절됐던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전멸한 게 아니었나? 뒤늦게 연락이 닿은 선발대의 존재에 나는 반가움과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홀로 미궁 속으로 들어간 메데이아가 떠올랐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드리겠습니다. 대열 다시 전진 대형으로!"
선발대의 생존 소식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작게 환호하며 대열을 가다듬는다. 다시 우리를 지나쳐 미궁의 중심부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메데이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 작품 후기 뚜둥! 선발대에서 온 연락! 일행은 다시 미궁 속으로!
껄껄. 과연 우찌 될까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미노타우르스 퇴치가 되겠군요. 다들 기대해주소서. 염통이 쫄깃해지고 입이 바싹 바싹 마르는 스펙타클 다이나믹 울트라 하이퍼 전투! 이번 에피소드에서 지난 시간동안 던졌던 여러가지 떡밥이 풀릴 겁니다. ㅎㅎㅎ 근데 너무 오래 되서 다들 기억이나 하실지 걱정입니다요. ㅜㅜ
ㅎ 근데 너무 오래 되서 다들 기억이나 하실지 걱정입니다요. ㅜㅜ*제 신작 '도살자 - 이토록 멋진 세상'도 많이들 사랑해주세요! 그 글 주인공은 화끈합니다! 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