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왜곡이 이 정도까지 진행됐다면 이곳은 여러분들이 어비스라고 부르는 곳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 없다지요? 그게 왜일까요."
내 말이 뜬금없이 들렸는지 그들의 시선에 불만과 함께 어리둥절함이 떠올랐다.
"예측할 수 있는 일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말했지만 아무도 경각심을 느끼진 않은 모양이다. 여전히 자존심 상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전열의 가장 선두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유게네스의 이능력자 한명을 향해 손을 뻗으니, 그가 움찔 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내 손에서 뻗어져 나간 붉은 기운이 내쏘아지다가 끝에 가서는 한자루 창처럼 변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일행들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악!
놀라서 입을 열었던 유게네스의 이능력자가 비명이 들려온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희끄무레한 형체가 내가 내던진 창에 꿰뚫려 비명을 지르고 있던 탓이다.
꺄아아아악!
전열의 이곳저곳에서 또다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후미에서 사라진 지현이 전열의 중심에서 몸을 드러내고 그녀의 손끝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신들 차리시고 전투 시작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전열의 선두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진
태식을 비롯한 인물들이라면 일행의 전열도 아닌 후미에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터, 어리숙한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의 희생이 커지기 전에 나서기로 결심한 나는 지체 없이 이능을 발현했다.
크아아악괴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거대했다. 어째 그리스의 몬스터들은 하나 같이 처음 보는 것들 투성이였던지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개중에 기운이 강력한 놈을 골라 몸을 날렸다.
"일단 위험한 놈들은 제가 걸러낼 테니 조금이라도 실전 감각을!"
내 고함소리에 맞춰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혼란에서 수습되는 것이 느껴졌다. 곳곳에서 이능이 발현되면서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퍼져 나오고 미궁의 복도가 힘의 파동으로 정신없이 진동했다.
그렇게 후방의 기운을 느끼며 몬스터 무리로 뛰어드는데 하나같이 흉악한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흉성을 돋운다.
그래봐야 내 손에 걸리면 순식간에 걸러질 놈들이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커다란 황소의 모습을 했지만 머리에 돋아난 뿔이 여섯쌍이나 되는 이름 모를 몬스터의 배 아래로 파고 들어가 주먹을 내뻗었다. 주먹 끝에서 돋아난 붉은 기운들이 날카로운 손톱처럼 몬스터의 배를 그대로 꿰뚫었다.
어떤 힘을 가졌는지, 어떤 몬스터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여유 부리다가 일행들 중에 희생자라도 나오면 그것도 곤란했다.
따뜻하면서도 물컹거리는 몬스터의 배속 느낌에 몸서리를 치던 나는 그대로 힘을 모아 주먹 끝에서 터트려버렸다.
우오오오마치 소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비명소리를 내며 몬스터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다른 몬스터의 허리를 베어갔다. 처음에는 빈손이던 내 손이지만 끝에 가서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형상화를 이루고 그 검날이 그대로 몬스터의 허리를 베어 버린다.
방금 전에 처리한 소 모습의 몬스터만큼이나 거대한 기운을 숨기고 있던 사자 모양의 몬스터가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피를 뿜어댔다.
그렇게 사십여마리의 몬스터들 가운데 강한 기운을 가진 놈들을 처리하다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이 나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웃차!"
흡사 거인과도 비슷한 모습을 한 몬스터의 주먹질을 그대로 손으로 흘려내던 나는 그대로 놈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며 거대한 장검으로 놈의 손을 끝에서부터 반으로 갈라버렸다. 어깨까지 갈라진 놈이 울부짖는 사이에 나는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허무하기 그지없게 거인이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눕혔다. 그 사이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의 선두와 몬스터들이 부딪치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실전 경험이 없는 이들답게 첫 부딪침부터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불덩이를 손에 두른 남자가 내지른 손과 다른 이능력자의 공격이 충돌하고, 바람을 일으킨 이능력자의 힘에 선두에 있던 아군이 비틀거린다.
"난장판이구만."
나를 피해 슬금슬금 사람들을 향해 달려든 몬스터들과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
의 전투는 그렇게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디세우스와 페르세우스를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이 간간히 위험에 빠진 아군을 구원한 덕에 아직까지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
오합지졸.
그들의 전투를 지켜본 내 솔직한 감상이다. 그들의 뒤에서 그들이 하는냥을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도 어이가 없는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전투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 주변에 희뿌연 막이 생긴 것이 김도연의 술법 '하늘 가리개'가 발현된 모양이다. 몬스터들이 나를 피해 전부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던지라 한가해진 나와, 김도연을 비롯한 사람들만이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전투를 지켜봤다.
서로의 손이 엉키고 각자의 이능이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다. 실전경험은커녕 서로간의 간격도 제대로 잡지를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보는 내가 다 아찔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은 역시 고위 이능력자들답다고 할까.
"이겼다!"
사람의 머리에 사자의 몸 뱀과 같은 꼬리를 한 모습의 몬스터가 마지막으로 쓰러지자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 중 누군가가 승리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른 곳에서는 본 적 없는 그 한심한 작태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짚어 가는데,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바닥에 퍼질러 앉는 것이 보였다.20여명의 2등급 이능력자들이 고작 40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하고는 탈진이라도 한 듯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한심했다. 그것도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투를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긴장으로 이능을 남발하고 이능의 피드백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덩달아 힘이 빠져 터벅거리며 그들에게 돌아가니 그들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고작 이 정도 몬스터들을 이기고 저런 표정을 짓다니. 일산에서 일어났던 대 괴수전을 이들이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을까.
그때 우리는 고작 300명 정도의 전력으로 수천마리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겪었다. 그 지옥과도 같은 전장에서도 그 누구 하나 주의를 흩트리지 않았는데 이들은 단 한번의 전투로 파김치가 되어버린 모습이다.
내심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몇몇 이능력자들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눈을 피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페르세우스가 민망한 얼굴을 해보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차차 나아질 겁니다."
나아져? 언제? 이제 1등급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코앞인데.
턱 끝까지 차오른 한마디를 간신히 삼키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는 전진이 힘들겠군요."
필요 이상의 이능을 발휘한 덕에 완전히 퍼져버린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을 보며 내가 말하니 메데이아가 품에서 알약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그녀가 전해준 알약을 받아든 이능력자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알약을 품에 넣는 것을 본 내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런 내 눈치를 보던 메데이아가 표독스럽게 당장 복용할 것을 종용하니 마지
못해 알약을 입에 털어 넣는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다. 개중에는 알약을 숨기고 멀쩡해진 척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오디세우스나 메데이아에게 욕을 먹는 이능력자들도 보였다.
이런 이들과 1등급 몬스터를 퇴치하러 갈 생각을 했다니. 새삼 앞길이 막막해지고 선발대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쪽은 초짜들이 아니니 그나마 나으려나.
메데이아가 전해준 알약이 피로회복이나 이능의 피드백을 상쇄시키는 무언가였는지 이능력자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것이 보였다.
그것이 또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정도 전투로 기진맥진해질 이들이라면 앞으로 고생길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럼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출발하시죠. 이대로라면 차라리 선발대와 합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오디세우스와 메데이아가 몇마디 서로 주고 받다가는 귀에 꼽고 있는 통신기를 조작해 선발대에 연락을 취한다.
"앞쪽의 상황도 다를 것이 없나봅니다. 몬스터들의 습격이 갑자기 늘어서 그쪽
도 애를 먹고 있나 봅니다. 지금도 전투중인 거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메두사의 이능이 주효해서 느리지만 전진에는 이상이 없답니다."
이대로 이들을 이끌고 가면 선발대에 오히려 부담을 주는 것이 될까봐 차마 합류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다. 오디세우스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들은 몇몇 이능력자들이 얼굴을 붉혔다.
이능력자들이 얼굴을 붉혔다.
들어올 때야 어깨 피고 들어왔겠지만 앞으로는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선발대가 박 터지도록 싸우고 있다니 이쪽도 곧 여파가 불어 닥칠 것이다. 지금 내 감각에 잡힌 몬스터들만 해도 그 수가 상당했다. 아직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전진하면 아마 득달 같이 달려들 테지.
"그럼 앞으로도 이번 전투처럼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조십합시다."
성의 없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몬스터들 따위 수백 수천이 달려들어도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나였지만 앞으로의 일을 대비해 한발 뒤로 물러서 있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이들을 돕기 위해 온 거라지만 이 정도면 나 혼자 다 해결해야 할 판이라, 그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가끔 도울 생각으로 사람들의 후열로 빠졌
다.
그리고 그 뒤의 상황은 내 예상대로였다. 적게는 열 마리 정도에서 많게는 수십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우리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삐걱거리며 손발을 맞추는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었지만 전투가 거듭될수록 서로 손발이 맞아가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이제는 간격이 터무니없이 좁아 서로를 방해하는 꼴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호흡이 맞아갈수록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덕분에 실전경험이 조금씩 쌓인 이능력자들이지만 여전히 여유 없는 전투를 계속해 나갔다.
한무리, 두무리, 수십무리.
두시간을 더 전진하면서 우리가 맞닥뜨린 몬스터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제는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 중에 몸에 피한방울 안 묻은 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에 반해 우리 일행들은 여유가 있었다. 대열의 후미였던지라 전투에 끼어들만한 기회도 없었거니와 그나마 내가 일행을 이리 저리 이동시키며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곳으로 유도했던 탓이다.
그 모습에 불만을 드러내는 이능력자들도 있었지만 나는 상큼하게 무시해주었다. 당장 실전 경험이 필요한 것도 그들이고, 이곳은 그들의 나라니까.
그동안 지나친 몬스터들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다. 하나 같이 거대한 덩치들을 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동물의 모습을 비틀어 놓은 것 같은 형상들이었다. 각 나라마다 다른 몬스터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차이가 워낙에 극명해서 몬스터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전장이었지만 희생자도 없는 마당이라 나는 지루한 심정을 그런 식으로 달랬다.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구경만 하던 건 아니고 몬스터의 공격에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간간히 도움을 주는 식으로 전투를 도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선발대와의 거리가 좁혀지지를 않는 것이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이쪽보다 더 많은 수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하며 전진하고 있을 텐데도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다는 것은 그나마 선발대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을 혹사시켜 가며 미궁을 헤매기를 한참,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강철같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내게 다가온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방금 전부터 선발대와의 연락이 되질 않고 있습니다."
============================ 작품 후기 열두시까지 업뎃 되는 걸 기다리시는 독자님도 힘드시겠지만 이것도 비축분이라고 업뎃하고 싶은 충동을 참는 저도 힘들답니다.
하지만 중년의 풍만한 갑빠가 있지! 꾹 참고 12시 업뎃 해냈습니다!
포풍과 같은 선추코쿠로 저를 불타오르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