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일단 그 둘 말고도 오십여명에 달하는 2등급 이능력자들이 있고, 거기에 더해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도 있으니 유사시에는 스스로 수를 낼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렇게 해서야 저쪽 선발대의 1등급 이능력자들이 미노타우르스를 한 마리라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유게네스의 주도하에 짜여진 작전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참견을 하는 것도 꺼려지던 터라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물러나려는데 그가 나를 안심시켰다.
"저우제룬과 나가사키 쥬리 둘로 안 되면 메두사가 나서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 마시기를."
막 그의 말에 자리를 벗어나려던 나는 뒤늦게 떠오른 의문에 그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그리스에는 왜곡이 없습니까?"
어떻게 보면 보안사항을 건드리는 질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태도를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있지요. 저희들은 어비스(abyss)라고 부릅니다."
당연한 것을 왜 물으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나를 바라본다.
전 세계의 곳곳에 위치한 비틀림과 왜곡, 희한하게도 이능력자들이 있는 나라에는 왜곡이 있고 비틀림이 없는 곳에는 이능력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난 이번 상황에서도 왜곡이나 비틀림, 다시 말해서 이능력자들이 없는 지역만큼은 평안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엄연히 유게네스가 존재하는 그리스의 인물에게 던진 이번의 질문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럼 이번 작전에 동원된 이능력자들 중에 어비스에 들어갔던 인물들이 있습니까?"
전의 질문은 사실 이것을 물어보기 위한 사전 질문이었다. 왜곡을 겪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동요가 못내 마음에 걸려 오디세우스에게 기어이 이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 중 어느 누구도 어비스에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이는
없습니다. 이제 와서는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지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비틀림이 있다면 당연히 이능력자들이 그 비틀림을 정화시킨다는 것이 상식이었던 내게는 의아한 대답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비스는 어떻게 억제하는 겁니까?"
질문을 던져놓고 보니 아차 싶었지만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아마도 극비에 해당하는 내용일 왜곡의 억제, 그 방법이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던 탓이다.
내 말에 어둠 속에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해보인 오디세우스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뭐, 사실 이제 와서 비밀이랄 것도 없으니 말씀 드리지요."
그 대답에 나는 조금은 안도하는 기분이 되어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저희에게는 비틀림을 억제하는 유물이 있습니다. 그 유물 덕에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비스의 존재에도 그리스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디세우스의 말에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곡을 억제하는 유물이라니, 그 말도 안 되는 물건의 존재에 지나치게 놀란 탓이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놀란 가슴을 내리 누르며 그에게 물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성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어찌 내가 놀라지 않았으랴. 그런 유물만 있다면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을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텐데. 이능력자의 폭주와 잠식, 그리고 왜곡된 지역. 이 두가지가 이능력자들을 옭아매는 평생의 올가미다. 그중에서 폭주와 잠식 같은 경우에는 해결방안이 나왔고, 38선에 위치한 D섹터만 없다면 이능력자들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나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디세우스가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건축물입니다. 그 건축물 자체만으로 어비스의 확장이 억제되는 결계나 마찬가지인지라 저희는 왜곡에 대해 신경 써본 적이
별로 없군요."
어쩐지 지나치게 흔들리는 유게네스 이능력자들의 반응에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던 것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어둠속을 헤치며 전진하는 선두열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부러우면서도 뭔가 복잡한 기분에 빠져든 나는 이내 오디세우스와 헤어져 후열로 돌아왔다.
이래 저래 복잡한 감정이 묻어있는 내 얼굴을 본 일행들이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자 다들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가 된다.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을 어리숙하다고 말했던 김성민이 어비스를 억제하는 유물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라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 유물을 고국으로 가져가려고 할 지도 모른다.
진태식을 비롯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어느 한명 D섹터에서 사지를 겪지 않은 이가 없으니, 내 생각이 무리한 추측은 아니리라.
의문을 풀러 갔다가 머릿속만 더 복잡해져서 돌아온 나는 한참이나 말없이 일행을 따라 걸었다.
"두번째 희생자군요."
얼마나 그렇게 걸음을 옮겼을까. 성시현의 말에 발치를 보니 몬스터들의 사체에 반쯤 파묻힌 시체 하나가 보였다. 이번만큼은 꽤나 훼손이 심하게 된 시체인지라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발치에 밟히는 돌조각에 시선이 갔다.
산산히 부서진 돌조각들 틈에 개중 온전한 것이 눈에 뜨인다.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몬스터의 두상이다.
누군가 이 미궁 속에 몬스터의 조각상을 세워 놨을 리도 없고, 거기에 더해 할 일 없는 선발대의 누군가가 조각상을 파손하면서 다닐 리도 없으니 석상의 정체는 단 하나다.
메두사, 유게네스의 1등급 이능력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대로 조금씩 잦아지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나가사키 쥬리와 저우제룬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메두사까지 전투에 나서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나 같이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이름들인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라 그 능력이 쉬이 짐작이 갔다. 아마 메두사는 신화에서 나오는 그 반인반수의 괴물처
럼 석화를 사용하는 이능력자일 게 분명하다.
그 뒤로 조금씩 몬스터들의 석상이 늘어가다가 나중에 가서는 바닥에 잔뜩 놓인 몬스터들의 시체들보다 석상이 많아져 버렸다.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석상들의 모습을 통과할 때는, 어지간한 일행들도 섬뜩한 기분이 드는지 어깨를 떨어댔다. 나 역시 수십개의 석상을 지날 때는 마치 박물관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라 조금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몬스터의 시체들과 석상들을 지나고 지나, 한참이나 더 미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거대해져가는 통로들이 점점 복잡하게 변해간다. 거기에 더해 더욱 강하게 몸을 조여 오는 음습한 기운이 우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선두열의 이능력자들이 걱정되어 나는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오디세우스에게 다녀와야 했다.
비틀림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는 나의 조언에 그가 즉각적으로 선두열의 인물들에게 경고를 했다. 그리고 점차 강해지는 왜곡된 의지의 압박에 다시 한 번 그에게 일행의 면면을 챙기라고 했다. 왜곡이 일어난 지역에
서는 간혹 가다가 이유 없이 폭주하는 이능력자들도 있으니까.
"하루는 넘게 걸은 것 같은데 이제 고작 다섯시간이 지났을 뿐이네요."
어둠과 침묵이 갑갑했던지 성시현이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겨울 만큼 똑같은 광경을 봐왔던지라 나 역시 하루는 꼬박 걸은 듯한 기분이다.
"왜곡이 심해진다. 말을 아끼고 주변을 살피는데 집중해."
이제는 주변에 가득한 불쾌한 공기가 찐득하게 몸에 들러붙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성시현의 말을 잘라내니 그녀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안할 수도 있는 내 말에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선두에 나선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의 얼굴에 불쾌함이 가득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준수한 반응이다. 과연 D섹터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다운 반응이라 안심이 됐다.
혹시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기운이 어느 사이엔가 수십개로 불어나더니 맹렬하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선발대의 전령인가 했더니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더해 기운이 음습한 것이 몬스터들이 분명했다.
"전방에서 몬스터 접근!"
짤막하게 외치니 선두열이 잠시 소란스러워지다가 정지한다.
"도연과 시현은 전후방으로 빛을 밝히고 나머지는 둘을 보호한다. 당신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주세요."
빠르게 일행에게 명령을 내리고 선두열로 향하니 마침 오디세우스가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라니 어디서 오고 있고 수는 얼마나 됩니까."
급박하다기보다는 여유가 느껴지는 말투라 과연 생각해보니, 1등급 이능력자 여럿에 2등급 이능력자 수십. 그가 긴장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십마리 정도고, 기운을 보아 대략적으로 5등급에서 3등급 몬스터로 보입니
다. 전방 600미터 거리 정도에서 빠르게 접근 중입니다."
내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에 도연과 시현의 이능이 발휘되어 어두웠던 미궁의 복도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커다란 광구 몇 개가 복도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어지럽게 불을 밝혔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미궁의 정체는 어둠 속에서 막연하게 봐왔던 것보다 몇배는 거대한 통로의 연속이었다. 높이 20여미터에 너비 또한 비슷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황토색의 표면이 고르기만 해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다.
그간 어둠속에서 불안에 떨던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여기저기서 제 나름의 방법으로 빛덩이를 쏘아올리고 전열을 정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도연. 전방으로 빛을 몰아줘."
가만히 그들이 하는 냥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도연에게 광구를 쏘아줄 것을 부탁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몇 번인가 손을 휘적거리다가 전방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허공중에 떠 있던 빛 덩어리들이 몇 갈래로 갈라졌다가 그중 몇 개가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텅 빈 복도에 형광등이 켜지듯 전방으로 쏘아지던 빛 덩이들이 높다란 천장에 달라붙고 다시 분열하여 전방으로 쏘아지고 다시 천장에 붙어 분열했다.
그렇게 저 먼 곳까지 시야가 밝혀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때늦게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으면서도 이질적인 그 괴성을 들은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긴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비스라고 했던가. 전장을 겪어보지 못했던 탓인지 1등급 이능력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막강한 전력임에도 그들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보니 2등급이라고 해봐야 오합지졸들이다. 역시 험한 전장을 겪지 않은 이들이다 보니 유사시에 표가 나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 소수지만 단단하게 뭉쳐있는 내 일행들의 얼굴에는 긴장은 있을지언정 두려움은 없었다.
D섹터의 전장을 경험하고 거기에 더해 대 괴수전을 치르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라 그런지 어느 정도 여유도 있는 표정들이었다.
"이 중에 몬스터와의 전투 경험이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전열을 정비하던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쏠렸다. 메데이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몇몇 인물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전투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 수가 다섯도 채 안 돼는 수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필시 이능의 등급만 생각해서 추린 인원들이렸다. 이런 인물들이니 1등급 이능력자가 있는 선발대에서도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분들은 전장에는 처음 나서는 것입니까?"
내심 그들이 한심하다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D섹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이능력자들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우면서도 복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선발대로 포함되어 갔어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메데이아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던 그녀였지만 딱히 어색해 하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그럼 여기 있는 분들로 전투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군요."
나를 포함한 1등급 이능력자들이 미노타우르스와 만나기도 전에 힘이 빠지는 것을 대비한 인원들 탓에, 오히려 힘이 더욱 빠지게 생겼다.
============================ 작품 후기 연참분 투척합니다. 오늘 열두시에 올릴 비축분까지 만들었으니 이제 도살자 연참분 만들러 가겠습니다.
제가 휴재중인 동안에도 쿠폰을 주시고 코멘트를 달아주신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때문에 3달 결제를 또 하셨다는 그 말씀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시간 날 때마다 연참분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비축분 따위 사나이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때문에 3달 결제를 또 하셨다는 그 말씀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시간 날 때마다 연참분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비축분 따위 사나이에게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