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41화 (141/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마치 퀴즈라도 내듯 지껄여대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글쎄요."

말은 애매하지만 태도는 명백한 부정이다. 교활한 메데이아가 어리숙한 이아손에게 그런 내용을 알려줬을 리가 없었을 테니.

내 말에 그녀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보였다. 역시다 의도한 모양인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리고, 남은 하나의 어깨끈이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듯 위태위태해보였다.

"이아손은 그들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이라도 했는지 오늘 아침에 내가 일부러 방치한 비약 몇 개를 들고 그들을 찾아갔답니다. 아마 나가사키 쥬리가 있는 초인단으로 갔겠죠."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그녀가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다시 문제, 이아손이 가져간 비약은 대체 무슨 비약일까요?"

녀의 질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다. 그녀의 같지 않은 스무고개를 들어주는 것도. 이아손이 집어간 비약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는 마치 나를 조롱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그녀의 쓰잘데기 없는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메데이아씨. 저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끌면 선물이고 계약이고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잘 듣고 있던 내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자 그녀가 잠시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마스터 킴도 비약의 정체를 들으시면 흥미가 생..."

"그만. 대충 들어보니 이아손의 요청을 받아들인 다른 나라의 이능력자들에게 복수라도 한 모양인데 거기에 나까지 끌어드리지는 말기를. 지금도 충분히 적이 많은 사람이라 피곤합니다."

단호한 내 태도에 그녀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갑작스레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오디세우스의 경고가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있던 탓이다.

그녀의 선물을 받은 이들의 끝이 좋지 못했다니, 그녀가 내게 준다는 선물도

필시 불길한 것임에 분명하다. 당장 이아손이 선물이랍시고 들고 간 비약만 해도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좋은 꼴 보기는 글렀다.

거기에 더해 자꾸만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해 보이는 것도 불쾌하고.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지만 그녀의 교태는 내게 매력적이라기보다는 음험함으로 느껴졌다.

"그 선물이라는 것 받지 않겠습니다."

단호하게 쐐기를 박으니 메데이아가 입술을 깨무는 와중에도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한쪽 어깨끈이 내려갔던 그녀의 상의가 흘러내려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버렸다.

이거 변녀 아냐! 속옷도 안 입고 뭐 하는 짓이야!

수치심도 없는지 그 뽀얀 젖무덤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설득했다.

"마스터 킴! 들어보면 분명히 마스터 킴도 만족하실만한 선물이라니까요!"

그 집요하고도 간절한 말에 머리가 더욱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렇게까지 선물

을 주지 못해 안달을 내는 그녀를 보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어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만족할만한 선물이고 뭐고, 저는 필요 없습니다. 옷이나 제대로 입으시죠."

다시 한 번 거절하며 그녀의 옷매무새를 지적했지만 그녀는 옷을 추스를 생각도 않고 입술만 씹어대고 있다.

"용건이 끝났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축객령을 내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거 받으세요."

갑작스레 그녀가 엄지 손톱만한 유리병을 꺼내 내게 건네준다. 아무 색도 없는 투명한 액체가 꼭 물 같았는데 나는 그게 오히려 더 꺼림칙해져 고개를 흔들었다.

"됐습니다. 선물이라면 일전에 주신 비약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내 말에도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까 오디세우스가 텔레파시라도 보낸 모양인데, 저에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에게까지 이 드러내는 그런 미친년 아니니까 그냥 받으세요."

그 노골적인 지적에 나는 뜨끔했다. 내 눈에는 충분히 그런 미친년으로 보였으니까. 제 친동생을 토막 내어 바다에 뿌리고 좋아하는 여자가 미친년이 아니면 뭔가.

그런 내 기색에도 그녀가 손을 계속해서 내밀었다. 그나마 덜렁 드러나 있던 자신의 가슴을 가린 것이 이제는 좀 정신이 든 모양이다.

내가 그저 문을 연채로 그녀가 내민 약병을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녀가 약병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문을 나섰다.

"슬퍼요.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가증스럽게 떠들어대는 그녀의 얼굴이 겉보기에는 가련해 보이기만 한다. 그 안에 숨겨진 본성이야 친동생을 토막 내고 남편을 천천히 고사시킬 정도로 사악했지만 말이다.

"좋은 친구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 하이톤의 웃음소리가 광기마저 서린지라 나는 괜스레 등이 서늘해졌다.

"믿음이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말이군요. 남편을 위해 동생도 죽였고,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내게 남은 것은 집착과 소유욕, 비틀린 사랑뿐이랍니다."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그녀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 모습이 방금 전처럼 희대의 악녀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에 그만큼 절절한 감정이 담겨있던 탓이리라.

'제가 마스터 킴에게 호의를 보인 건 단지, 당신과 소드 엠프레스의 관계가 부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정말로 호의를 갖고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황룡과 초인단과 트러블이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는 무언가 그들을 골탕 먹일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입맛이 썼지만, 이제 와서 그녀의 선물을 받을 생각은 없다. 방금 전에

한 말처럼 그녀와 나는 아직까지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니까.

지현이 돌아와 테이블에 놓인 약병을 발견하고는 내게 들이 밀었다.

"아까까지는 없던 것인데, 이게 뭐지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고 말한다.

"메데이아라... 어려운 문제군요. 악인의 호의라니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좋은 결과가 오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선물을 거절하신 것은 잘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에도 찝찝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단순히 악인이기 때문에 어떤 선의를 베풀어도, 세상은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인가.

지현의 말대로 어려운 문제다.

"이 물약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다고 버리기에도 뭐하고. 이럴 때 처치곤란이란 이야기를 쓰는 가 봐요."

흉측한 것이라도 만지듯 손가락 끝으로 집어든 나는 멀찌감치 약병을 치워버렸다. 그것이 꼭 메데이아 본인의 호의를 패대기치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한 기분이 이어졌지만 나는 고개를 털어 그 기분을 날려 버렸다.

호텔에 있는 동안 중국과 일본에서 추가적인 인력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간의 말미를 두고 계획을 숙지시켜 두 팀으로 나누어 미노타우르스가 웅크리고 있는 미로에 들어간다는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몸이 절로 긴장했다.'천개의 눈동자'와 '그렌델' 벌써 둘이나 되는 1등급 몬스터를 접했고 그중 그렌델은 내 손으로 직접 헤치우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1등급 몬스터의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물론 나를 신처럼 떠받드는 일행들의 앞에서까지 그런 내색을 하지는 못했지만, 지현과 단 둘이 있을때는 유사시를 상정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

역시 전날 일산에서 패퇴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상태에서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압박감에 차라리 출발날짜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데 시간은 더디지만 확실하게 흘러 어느새 당일이 되었다.

호텔의 옥상에 위치한 헬리콥터 착륙장에 거대한 헬리콥터 한기가 시끄러운 로터음을 토해내고 있다.

"이대로 출발하는 겁니까!"

투타타거리는 소음 탓에 내가 고함이라도 치듯 헬리콥터의 파일럿에게 물으니 그가 다른 이들은 이미 미궁 앞에 집결해 있단다.

마지막으로 일행을 둘러보니 모두가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다. 오직 지현과 나만이 그나마 평안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차피 미노타우르스와의 실질적인 전투는 나를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이 할 거야. 그러니 모두 너무 긴장하지 말도록 해."

2등급의 이능력을 지닌 강자들이지만 지난 그렌델과의 전투를 통해 그들이 얼

마나 1등급 몬스터 앞에서 무력한지가 입증이 됐다. 1등급 이능력자의 전력이 충분한 지금에 와서 그때처럼 희생을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전부 검맥과 도맥을 이어가는 주역들, 남의 나라에서 헛된 죽음을 맞게 할 생각은 없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는 피하고, 회피와 도주에만 신경 쓰도록 하고.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명심해. 여기는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괜한 공명심에 일이 잘 못돼지 않도록 몇 번이나 주의를 준 내가 헬리콥터에 탑승하자 뒤를 이어 일행들이 헬리콥터에 자리를 잡았다.

일산의 괴수전 때는 허준영과 지현이라는 1등급 이능력자의 힘을 믿었던 데다가 1등급 몬스터의 힘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패배한 전적이 있는 지금의 일행들은 그때에 비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듯 했다.

그렌델을 퇴치함으로써 1등급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쳐낸 나조차도 긴장으로 입이 바짝 말라오는데 이들이야 오죽 하랴.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라도 풀어줄까 하다가 소용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저 시끄러운 헬리콥터의 로터음을 노래 삼아 어서 목적지에 다다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가만히 헬리콥터의 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끝없는 장벽이 보였다. 마치 때깔 좋은 건축물처럼 하얗고 거대한 그 장벽은 도무지 끝이 날 생각을 안 했는데,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한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것이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창밖을 보고 있던 김도연이 침음성을 삼키며 말했다. 때마침 끼어든 파일롯을 통해 저곳이 원래는 아테네시였으며 이제는 미노타우르스의 둥지가 되어버린 미궁이라고 한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질 않는 미궁의 겉을 바라보는 동안 헬리콥터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고도를 낮췄다.

"마스터 킴! 오셨군요!"

목적지에 도착하니 사나우면서도 냉철한 인상을 가진 사내, 오디세우스가 우리

를 반겼다.

"우리가 제일 마지막인가요?"

거대한 미궁의 앞에 늘어선 면면이 낯설었다. 오딧세우스를 메데이아를 제외하고는 전부 안면이 없는 이들이었는데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들이 인상적이었다.

"네. 중국과 일본의 이능력자들을 포함한 선발대은 먼저 출발했고, 미궁의 내부를 탐색중입니다."

팀을 나누더라도 다 같이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메두사와 페르세우스의 사이가 워낙에 좋지를 않아서요. 어차피 미노타우르스는 미궁의 중심부에나 있다고 하니 아킬레우스를 포함한 선발대는 먼저 외곽을 돌고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갖은 몬스터가 넘쳐나는 미궁의 크기가 도보로 3일은 헤매야 하는 크기라니, 먼저 나선 이들이 길을 닦아둔다면, 후발대가 전력이 온전하게 유지될 것이다.

"통신기를 통해 다섯시간 거리를 유지할 예정입니다만 혹시 모르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요. 아시겠지만 이곳은 미노타우르스의 영역, 비틀림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입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시기를."

오디세우스가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는 동안 저쪽에서 메데이아가 유게네스의 이능력자들을 통솔하여 미궁의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다.

미궁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만큼이나 거대한 입구가 시꺼먼 입을 열고 우리를 기다린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쪽의 전력은 여러분들과 유게네스의 2등급 이능력자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등급 이능력자 전력은 저와 메데이아, 페르세우스, 그리고 마스터 킴과 소드엠프레스를 포함하여 총 다섯명입니다."

먼저 출발한 선발대에는 중국과 황룡의 1등급 이능력자들을 포함하여 일곱명의 1등급 이능력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2등급 이능력자들의 수도 이쪽에 비해 월등한 50명이라고 하니 선발대가 먼저 전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들은 대열의 최후미이니 저희를 따라 움직이시면 될 겁니다. 안은 지독스럽게 어두우니 주의하시기를."

이미 전날의 작전설명 때 들었던 내용이지만 오디세우스가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준다. 나는 그러마하고 일행들을 모았다.

내가 최후방이고 지현이 우리 일행의 최선두, 혹시 모를 상황을 앞뒤로 대비하기 위한 진형을 갖추고 우리는 유게네스의 인원들을 따라 시커먼 미궁의 주둥이로 들어섰다.

============================ 작품 후기 약속대로 한편 더!

껄껄. 전편 댓글 보고 깜놀했습니다. 뭔가 했더니 제가 뒷부분을 누락시키고 올렸네요. 길게 올린다고 하고 똑같이 올리고. 덕분에 다음 편이 빨리 써졌지만 서두 ㅎㅎㅎ어쨌건 연참분 하나 더 투척합니다!

포풍과 같은 코멘트로 제 연참욕에 불을 질러주소서! 들판을 태우는 들불처럼 추천과 코멘트 쿠폰으로 저를 뜨겁게 태워주소서!

추천과 코멘트 쿠폰으로 저를 뜨겁게 태워주소서!

*어제부로 네이버에 깔린 제 출판작 '아름다운 세계'가 벌써 몇권 팔렸더군요! 완전 행복합니다. 조아라 연재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네요 이게.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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