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원한다면 소리를 차단하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내 말에 이아손이 반색을 했다. 스스로 나서서 청하진 않았지만 원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탓에 지현에게 눈짓을 했다. 잠시 이질적인 공기의 파동이 퍼져나가고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대략 5미터 정도의 공간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멀리 있던 일행들이 그 파동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 내가 손짓을 하자 다시 물놀이에 열중한다.
"이제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말에 이아손이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색을 했다.
"마스터 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뜸을 잔뜩 들이는 이아손의 태도에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저도 한국에 데려가 주실 수 있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의 질문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부리나케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가 제명에 못 살겠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 간절한 부탁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 지현을 바라보니 마찬가지 심정인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있다.
"무슨 말인지 말 모르겠군요."
그의 간절함에 비하면 너무도 성의 없는 내 대답에 그가 당장에라도 발목을 잡을 듯한 기세로 내게 다시 부탁했다.
"살려주십시오."
이번에는 또 밑도 끝도 없이 살려달라니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연유라도 들어볼까 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못 알아들어요. 천천히 말해봐요."
내가 조금은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를 취하니, 그가 내 마음이 변할세라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이대로 있다가는 저 틀림없이 죽습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오랜시간 애증을 키워온 그의 아내, 메데이아가 곧 자신을 살해할 것이란다. 지난 시절동안 무던히도 그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금방 자신을 찾으러 오는 것이 무언가 조치를 취한 듯 하다고, 눈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간절히 요청한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요."
그의 아내인 메데이아가 왜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는 말인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내 심정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절박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뭘 숨기겠습니까."
그 와중에도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사정을 설명한다.
"제가 젊었을 시절에 자제력이 부족한 관계로 여자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다녔
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저라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온 메데이아였지만, 일이 틀어진 건 글라우케와의 만남 이후였습니다."
글라우케와의 만남이라면 나도 신화를 통해 들은 적이 있다.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글라우케와 결혼을 하려던 이아손 탓에, 메데이아가 그의 장인과 신부를 죽이고 더불어 아이까지 전부 죽였다는 일화였지. 이제는 어디까지가 신화 속의 내용이고 또 어디서부터가 실화인지조차 혼동이 올 지경이다.
그의 설명 역시 신화 속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전부 그대가 뿌린 씨앗, 조강지처를 버리고 좋은 꼴을 볼 수 있을 것을 바랐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위인이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현이 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한남자에게 인생을 바친 여자가 배신당하는 이런 이야기가 듣기에 기분 좋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저도 스스로 뉘우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모릅니다! 제가 어떤 기분으로 살아왔는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말 끝에 가서는 다시 한탄을 하던 이아손이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콜키스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 황금양털을 구해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지요. 당시까지만 해도 그녀는 제게 구세주와 같은 여자였으니까요. 하지만 화가 난 그녀의 부왕이 우리를 추격하자, 그녀는 자신의 친동생 압시르토스를 인질로 삼았습니다. 이런 저런 곡절 끝에 어찌 어찌 배를 탈 수 있었지만 결국은 추격대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지요."
신화의 당사자로부터 신화를 듣는다. 뭔가 기묘한 기분이지만 그 신화라는 것이 하필이면 막장중의 막장이다.
"이제는 빼도 밖도 못하고 황금양털도 빼앗기고 험한 일을 겪겠구나 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수를 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내게 묻는다기보다는 그저 혼자 말하는 모양새라 나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자신의 친동생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바다에 뿌리더군요. 놀란 추격대가 그 유해를 수습하는 사이에 저희는 무사히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
다."
신화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내용에 나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지현도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침중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뒤로 저는 그녀만 봐도 오줌이 찔끔날 만큼 무서웠습니다. 자신의 친동생을 토막쳐서 바다에 뿌리는 여자라니, 게다가 그녀는 슬퍼하지도 않았다구요! 그저 자신의 기지가 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내게 칭찬을 바라는 표정을 짓는 그녀라니. 아아. 정말이지..."
자신의 아내가 처남을 토막치고 그것으로 자신에게 칭찬을 바란다. 대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뒤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답니다. 그녀가 움직이면 꼭 누군가가 끔찍하게 살해당했었지요. 저는 점점 위축되고 나중에 가서는 그녀가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그녀와는 다른 코린토스라는 나라의 공주 글라우케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데이아로 인해 사랑스러운 글라우케도 잃고 장인도 처참하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더욱 끔찍한 건, 저에 대한 복수심 탓에 그녀 자신과 저 사이에 있던 아이들마저도 그녀의 손에 살해당했답니다."
들을수록 끔찍한 이야기다. 친동생을 토막내고 비뚫어진 사랑 탓에 친자식들마저 살해하는 여자라니. 이아손의 외도에 동감은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그가 불쌍해보였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을 그녀에게 붙잡혀,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녀에 비해 보잘 것 없는 힘을 지닌 제가 죽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는지 끔찍한 비약을 만들어 제 생명마저 연장을 시켰습니다. 이제는 죽음으로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그가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며 숨을 몰아쉰다. 한 남녀의 끔찍한 애증의 시절을 들은 나와 지현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도 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한 집착이 그 정도까지라면 메데이아가 쉽게 당신을 포기할 것 같진 않은데요."
만약 내가 그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가만히 있으라는 보장은 없다. 그녀 자체로도 1등급 이능력자인데 내가 무슨 수로 그를 보호해
주겠는가.
내 말에 이아손이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방법인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턱을 치켜드니 그가 갑작스레 내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를 검맥에 받아주십시오!"
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메데이아라도 마스터 킴이 있는 검맥까지 손을 뻗지는 못 할 겁니다!"
다시 한 번 애원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차갑게 굳어간다. 그런 내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이아손이 몇 번이고 검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얼마나 긴 시간을 지옥 속에서 살았는지 모릅니다! 도와주십시오! 마스터 킴!"
구구절절히 자신이 피해자인양 지껄여대는 이아손의 얼굴에 첫날 보았던 유쾌한 인상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나는 그가 붙잡고 있던 손을 슬쩍 뿌리쳤다.
"마스터 킴?"
그제야 차갑게 굳은 내 표정을 눈치 챈 이아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검맥에 들어오겠다라."
내 음성이 차갑다. 가만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봤다는 것이 더욱 맞는 표현이리라.
"지금 이아손씨는 검맥을 방패막으로 쓰겠다는 겁니까?"
그 노골적인 속셈에 나는 굉장히 기분이 언짢아져버렸다.
"어쩌죠? 저희는 남의 부부의 치정문제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데."
내가 내뱉는 단어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이아손도 그걸 느끼
고는 주춤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제가 있는 검맥이라면 그녀도 손을 대지 못한다? 말이야 좋군요."
그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내가 있는 검맥이라면 그녀가 이아손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짧은 만남이나마 내가 파악한 메데이아의 음험함이라면, 그녀는 이아손을 빼돌린 검맥, 아니 대한민국 자체에 해코지를 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녀가 두렵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오랜 시간 그녀와 함께 해왔을 이아손이라면 그녀의 음험함과 집요함에 대하 나보다 더욱 잘 알 터, 진심 어린 호소를 하는 척 하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나는 그 점에 굉장히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당신이라면 그녀의 성격에 대해 더 잘 알잖아."
이제는 존칭마저 생략해버린 내 차가운 말에 그가 몸을 움찔 거린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내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차갑게 웃었다.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봐.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그녀가 당신을 그대로 놔줄 것 같아?"
그와 그녀의 사이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화로라면 충분히 들을만큼 들었다. 가진 능력에 비해 야망만 큰 이아손과 그를 뒤에서 물심양면 받쳐주는 메데이아. 끔찍한 조합이다. 무능한 주제에 터무니 없이 욕심만 많은 남자와 그 남자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라니.
어쩌면 그의 파멸은 스스로가 재촉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자업자득인 것 같은데."
자신을 위해 부모도 형제도 버리고 뛰쳐나온 메데이아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다니, 내가 메데이아라도 눈이 돌아가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자신의 자식들마저도 살해한 천성은 끔찍하지만 이아손이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미루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메데이아의 지독스러운 집착과 음험함을 알면서도 타인을 끌어드리려는 그의 음흉함에 나는 분노했다.
"나는 말이야. 그간 병신처럼 여기 저기 이용을 당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래서
누가 나를 이용하려고 하면 굉장히 기분이 나빠져."
사납다기보다는 차갑기만 한 내 말에 이아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오므렸다 닫기를 수차례,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안 들은 걸로 하지. 생각 같아서는 이 정도로 넘어가고 싶지 않지만 일단은 우리는 손님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 시선을 거두자 이아손이 몇 번이나 더 말을 걸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풀장을 빠져 나갔다. 일행들은 모두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이아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을 보니.
"굳이 끝까지 듣고 있어야 할 이유를 못 느껴서 일찍이 기막을 풀었습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보자 지현이 뒤에서 이유를 설명했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지현 역시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럼 이틀의 시간이 더 있으니 그때까지 방법이나 잘 찾아보라고."
이아손이 다녀간지도 벌써 하루가 지나버렸다.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호텔에서 시간만 무료하게 보내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킴."
수화기를 드니 대뜸 들려오는 목소리가 메데이아의 그것이다.
"아. 메데이아씨."
이제는 그리스의 일이라면 오만정이 떨어진 상태라,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니 그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 말을 받는다.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요."
그녀의 뜬금없는 감사에 당장에 이아손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모르는 척하고 시치미를 떼니 그녀가 수화기 너머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아손 그 멍청이의 말에 넘어가지 않아주셔서요."
역시나 그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왠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섬뜩했다.
"아."
대충 얼 빠진 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아주니 그녀가 다시 설명했다.
"덕분에 유게네스와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우호관계를 다질 수 있게 되었어요. 아니 그 이전에 저 메데이아가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답니다."
그녀의 말이 드물게 호의 가득한 어투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조만간 큰 선물을 하나 드리도록 하지요. 지난 선택에 후회가 없으실 겁니다."
딱히 대답하기도 뭐해 말 없이 수화기만 들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내게 말을 했다.
"이아손 그 바보가 마스터 킴에게 거절을 당하고는 '초인단'과 '황룡'을 찾아갔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부부간의 치부를 자꾸만 드러내는 것이 불편해져 그녀에게 물었다.
"마스터 킴이 받으실 선물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 작품 후기 메데이아의 선물은 무엇일까요~ㅎㅎㅎ*복귀를 환영해주신 독자님들, 저야 말로 다시 찾아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릴 뿐입니다^^*연참한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는 코멘트에 찔끔했습니다. 조금 기다려주시면 연재분량 외에 추가분량 만들어서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글을 쓸 때 공들이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예전처럼 연참을 후다다다다
하기가 워낙에 힘들어져서 ㅜㅜ 양해 부탁드립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그리고 추천과 코멘트 선작 쿠폰을 주신 독자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정말 제 요즘 유일한 낛이라고는 조아라 연재밖에 없네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