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38화 (138/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숙소로 돌아가자. 이 정도로 허접할 줄 알았으면 근처에서 처리하는 건데."

다소 건방지게까지 들리는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형준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 차례로 사라지자 공터에 남은 사람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 받았다.

자신들 중 가장 강자인 저우제룬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중국의 이능력자들을 제외한, 유게네스와 초인단의 인물들이 서로를 복잡한 시선으로 주고 받는다.

유게네스의 입장에서야 공들여 초빙해온 1등급 이능력자들이 하자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감해 하는 것이고, 초인단의 이능력자들은 그런 유게네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눈빛을 주고 받으면서도 속내를 끝까지 내비치지 않던 두 단체의 이능력자들이 이내 공터를 벗어난다.

중국의 이능력자 저우제룬을 완전히 밟아준 직후 메데이아의 연락을 다시 한 번 받았다. 그녀가 나에게 부탁한 시간은 1주일, 그 시간 안으로 내가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어 미노타우르스 퇴치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어떤 방법을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중국과 일본의 1등급 결함품들이 추가되어 올 뿐이라면 나 역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면 될 터, 조금은 애를 태우듯이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다.

더불어 부수입이라면 부수입인 추가수당 역시 주어졌고.

처음에는 1등급 이능력자를 무참하게 깔아뭉갠 나를 보고 감탄한 일행들이었지만 지현의 설명에 의해 그들이 완전한 1등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들은 모양인지, 그 놀라움은 길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은 호텔에서 5일째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라 용을 쓰고 있는 중이다.

"꺄하하하하!"

김도연이 광녀처럼 웃어재끼며 다이빙대에서 몸을 풀쩍 날린다. 잘 빠진 몸매로 멋드러진 자세를 취한 그녀가 다이빙을 하고, 그녀를 따라 진태식을 비롯한 이들이 연달아 몸을 날린다. 무료한건 나뿐이었는지 호텔의 실내 수영장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김도연과 다른 인물들을 보면 휴가라도 온 듯한 모양새였다.

"가서 좀 놀아요."

곁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서 내 수발을 드는 지현이 안쓰러워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들은 제 제자와 같은 아이들, 어울려 놀기에는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김도연이 입고 있는 비키니 수영복에 굉장한 거부감이 있는지라 눈살을 찌푸린 상태다. 꽤나 옛날 사람인 그녀에게 헐벗은 것과 다름없는 수영복이라는 것은 용납불가인 물품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김도연이 입고 있는 비키니는 대담하게 그지없는 스타일의 그것이라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꽤나 아찔한 것이다.

"받아라! 얍!"

광녀답지 않은 귀염성 있는 말투로 물장구를 친 김도연이지만 그 결과는 절대로 귀엽지 않았다. 이능의 묘리라도 사용했는지 풀장 안에 일어난 파도가 마치 해일이라도 되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건너편에 있던 진태식이 눈을 빛내며 손을 앞으로 뻗어 물의 장벽을 만들어 물세례를 막고는 다시 반격한다.

"뭐랄까. 하는 짓은 애들인데 박력은 어마어마하구만."

"태식이 저 아이도 그간 진중해 보이더니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또래로 보입니다.."

"진태식이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 셋이라죠?"

한가롭게 그들이 하는 짓을 구경하며 지현과 대화를 나눈다.

연거푸 해일이라도 일어나듯 풀장의 양끝이 넘실거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이 전쟁이라도 난 듯하다. 그 소란에 놀라 달려온 호텔 관계자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인다. 그뿐이 아니라 풀장의 주변에 여기저기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호텔의 직원들이 전부 넋이라도 나간 듯이 그들을 보고 있다.

"마스터 킴, 음료 더 드시겠습니까?"

말쑥하게 차려입은 호텔의 여직원 한명이 쟁반 가득 음료를 담아와 내게 물었다. 유게네스에서 꽤나 신경을 써준 모양인지 호텔 직원들이 전부 한국인들이라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나야 통역 반지 탓에 그녀가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그럼 한잔 부탁할..."

막 목이 말라오던 참이라 그녀를 향해 손을 내뻗는데, 허리를 굽힌 그녀의 등 뒤로 사람 키만한 파도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서늘한 기분이라도 들었는지 고개를 돌린 호텔의 직원이 그 거대한 파도에 놀라 몸이 굳어버린다.

풀장 바깥으로 뻗어 나오는 파도를 보고 놀란 호텔직원이 쓰러지듯 주저앉고, 그와 동시에 지현이 한 걸음 나서 손을 크게 휘저었다. 찰싹뭔가 보이지 않는 막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멈춰 섰다가 이내 풀장 안으로 꿀렁대며 빨려들어갔다. 이제껏 저들끼리 잘 놀다가 갑작스레 풀장 바깥으로 튀어나온 물세례를 보니, 아무래도 김도연이 장난기가 돌아 엄한 짓을 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도가 잠잠해지자 그 너머에서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김도연이 있어 나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괜찮은가."

아직까지도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던 호텔직원이 지현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들자마자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가 가득 놓인 쟁반을 찾기라도 하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길래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쟁반을 재빠르게 주워들었던 내 덕에 음료수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쟁반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많이 놀랐습니까?"

지현의 말에도 대답을 못하던 그녀가 쟁반을 보고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넘어진 것 보다는 쟁반의 상태를 염려했던 모양이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가 허겁지겁 쟁반을 넘겨받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이능력자들이라면 꽤나 넌더리를 칠 모양새다.

"김도연. 노는 건 좋은데 일반인들 좀 생각하면서 놀지?"

그녀의 짓궂은 장난에 피해를 본건 엄한 호텔직원뿐이라 한마디를 하니, 그녀가 모르는 척 물속으로 쑥 잠수를 해버린다. 그녀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 앞

에서 내게 편하게 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검맥의 수장으로 대우를 하자니 또 뭔가 못마땅한지라 한 행동이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애 같아 보일 수가 없었다.

"철 좀 들어라. 언제까지 미친 개 소리를 들을래."

한참만에 물속에서 기어나온 그녀에게 기다렸다가 한마디를 하니 곁에 있던 진태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바로 돌아오는 살벌한 눈빛에 찔끔한 표정으로 저 멀리 사라지긴 했지만, 그녀는 나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친개라는 별명 이제 안 불린지 오래 됐거든요. 이제는 '선자'라는 어엿한 별명이 생겼는데."

마치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다. 한가롭게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다보니 문득 도맥과 검맥의 인물들을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김도연과 함께 나를 따라온 도맥의 또 다른 이능력자 성시현, 이제껏 말하는 모습 한 번 보지 못했을 정도로 조신한 여인이다. 4등급 능력자였으나 도맥에서 수련을 하고 2등급에 올라선 두 여인이 아리따운 몸매를 뽐내며 물장구를 치고 있다.

이미 내 주의를 받고 난 후라 전처럼 이능을 사용한 물장난이 아닌 평범한 물장난이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보기가 좋다. 주변에 그녀들을 둘러싼 진태식을 비롯한 검맥의 인물들 역시 잘 단련된 모습이 매끈한 게 보고만 있어도 마치 청춘드라마도 보는 듯한 기분이다.

평화로운 광경을 한참이나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풀장에 어울리지 않는 원피스차림의 지현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복은 죽어도 안 입는다니, 그래도 개중 가벼운 복장을 입었다고 입은 그녀의 모습이 평소의 기품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산뜻하다.

"당신도 물놀이 한 적 있어요?"

근엄한 그녀가 물장구를 치는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는지라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는 수련만 했고, 경지에 오르고 나니 천방지축 자맥질을 하기에는 이미 세월이 흐른 뒤였지요. 게다가 제가 살던 시대에는 계집에게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던 무렵이라 저렇게 자유분방한 모습은..."

드물게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눈빛에 왠지 부러운 감정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긴, 그녀가 살던 시대를 돌이켜보면 한가롭게 물장난이나 칠만한 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서 왜란을 겪고 그 뒤에도 무수한 변란 속에서 스스로를 갈고 닦았을 그녀에게 저런 자유분방한 시절은 없으리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져 그녀를 끌어당기는데 눈치 없는 음성이 나를 부른다.

"마스터 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니, 이아손이 반가운 기색으로 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다. 예정에 없는 그의 방문에 의아함이 먼저 떠올랐다.

"그저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들려봤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를 맞이한 게 그이니만큼 신경을 써주는 것이 이상하진 않았지만, 자꾸만 눈을 흘기며 풀장의 김도연과 성시현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사심이 가득 보였다.

신화를 떠올려보자면 저런 방종함 탓에 메데이아와 그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하

던데, 여전히 그 버릇은 못 고쳤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같은 남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은 아니라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가 곁에 있던 의자에 몸을 앉히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은 사이가 좋군요."

태생의 한계상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많아, 사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다. 타국에 와보니 템플러니, 유게네스니 서로간의 알력이 장난이 아닌지라 그의 부러움 가득한 한마디에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유게네스는 역사가 긴만큼 아무래도 앙숙인 이들이 많아서."

일전의 메데이아와의 대화에서도 페르세우스와 메두사란 이의 사이가 그렇게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아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전부 실존인물이고 유게네스의 인물들이라면 그런 이들이 제법 더 있겠지.

"뭐 이래도 저래도 지지고 볶고 사는 거죠."

눈으로는 사이좋게 풀장에서 뛰어노는 일행들을 쫓으며 대강 그렇게 대답했다.

"저... 정말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이아손이 눈으로는 내 일행들을, 그중 여성들을 특히 눈여겨보며 내게 물었다.

"네. 별다른 대안이 없다면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처음부터 정보를 조작했던 유게네스의 잘못으로 내가 돌아가는 것이니만큼 전혀 거리낌 없이 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아마, 메데이아와 오디세우스님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아 올 겁니다."

모략으로 이름 높은 메데이아와 지용겸비의 명장 오디세우스라. 그들이 신화의 반만 되는 능력을 일신에 지니고 있다고 하면 뭔가 기상천외한 방법을 찾아올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내 생각이 돌아설지는 나 스스로도 의문이다. 내 그런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데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기색이 언뜻 언뜻 드러났다.

그제야 그가 찾아온 것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부탁하고자 함을 눈

치 채고는 나도 정색을 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아손이 주변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뭔가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제 사람들 뿐입니다."

호텔 직원들이야 김도연의 짓궂은 장난에 질려 풀장을 빠져나간 뒤였고, 이제 남아있는 이들이라고는 내 일행과 이아손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안한 기색의 이아손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안심을 시켜주었다.

"원한다면 소리를 차단하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내 말에 이아손이 반색을 했다. 스스로 나서서 청하진 않았지만 원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탓에 지현에게 눈짓을 했다. 잠시 이질적인 공기의 파동이 퍼져나가고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대략 5미터 정도의 공간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멀리 있던 일행들이 그 파동에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 내가 손짓을 하자 다시 물놀이에 열중한다.

"이제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말에 이아손이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정색을 했다.

"마스터 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 작품 후기 댓글로 염려를 표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스럽게 마눌님은 감기몸살이 심하게 걸려 기침이 심해진 정도의 병이라 한시름 덜었습니다. 물론 기침이 심해지고 알러지성 호흡기 질환이 우려되던 상황이라 깜짝 놀랐었지만서두 이제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공지로 따로 후기를 남길 경우, 보지 않는 분들이 많은 고로 연재글에 남겼던 것인데 불쾌하게 여기시는 독자분들이 있으신 듯 해 앞으로 휴재 공지는 전편 덧글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정상 연재로 돌아갑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제 다른 작품인 '아름다운 세계'가 각종 이북마켓에 깔리기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시차를 두고 각 마켓에 깔리기 시작해서 내일까지는 전체 마켓에 업데이트가 된다는데, 혹시 좀비물이나 생존물, 아포칼립토 좋아하시는 분들은 함 찾아봐주시는 것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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