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37화 (137/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아, 당신 보고 웃은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라고. 어째 외국 나올 때마다 좋은 꼴은 못 보는 것 같아서 뭔가 내 인생이 슬퍼져서 말이야."

건들거리며 지껄여대니 황룡의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와라. 여기서 분탕질을 칠 수는 없으니."

남자의 말에 나는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이야? 이런 사소한 말싸움하고 차원이 다른 문젠데?"

서로 간에 하는 도발이야 그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남자는 지금 내게 결투라도 신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등급 이능력자간의 결투라니 그 영향력이 절대 작을 리가 없다. 누가 이기든 지든 원한이 쌓이고 개인이 아닌 단체간의 문제가 될 것이다.

"겁먹은 개처럼 짖어대지 말고 나와라."

남자의 말에 나는 이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유게네스의 인물들에게 물었다.

"마음 놓고 날뛸만한 공간이 근처에 있습니까?"

바닷가가 보이는 널찍한 공터, 저 멀리서 황룡의 이능력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황룡의 1등급 능력자 저우제룬이다. 동도들은 나를 파검제라고 부르지."

뒤늦은 그의 소개가 꽤나 거창하게 들리는 건 저우제룬이 이번 트러블을 결투화 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줄까 하다가 그냥 피식 웃어주었다.

"예의도 없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지 않나?"

마치 무협지의 비무라도 치르는 듯한 감상인지 지껄여대는 폼이 너무도 우습다.

"바쁘니까 빨리 시작하자고. 네 수다 들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노골적인 조롱에 저우제룬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놈!"

"아. 알았어. 알았어. 나 김형준. 대한민국 출신. 됐지? 빨리 시작하자고."

손발 오그라드는 그의 행동에 맞장구를 쳐주자니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릴 판이다.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던 저우제룬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온 사방에 기세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그의 옷가지가 바람이라도 먹은 듯 부풀어 올랐다. 제법 사나운 기세긴 하지만 일본의 나가사키 쥬리처럼 1등급 이능력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라 도저히 긴장을 할 수가 없다.

피바라기를 현신화 시킬까 하다가 이내 양손 끝만 부분적으로 실체화를 시켰다. 어차피 몬스터와 다르게 속도가 빠른 이능력자간의 전투라면 거치적거리는 갑주야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팔뚝부터 시작해 손가락 끝까지 시뻘건 덩어리가 뭉쳐 꾸물거리다가 이내 단단한 쇠 장갑 모양이 된다.

"무기를 꺼내라."

저우제룬이 아까보다는 차가워진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많은 그의 태도에 그나마 희미하던 긴장감이 자꾸만 사라지려 한다. 아무리 그가 우스워 보여도 1등급 이능력자인데 내가 너무 태만하게 그를 상대하고 있나 염려가 될 지경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태만한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내 눈빛이 조금은 진지해지자 저우제룬이 그제야 조금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지만, 여전히 내가 무기를 꺼내지 않자 다시 역정을 낸다.

"무기를.."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애초부터 무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전투스타일의 나다. 지현에게 검술의 기본을 배우긴 했지만 내게 검이라는 것은 그저 수많은 무기 중 하나일 뿐, 이제 와서 검사 흉내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후회하지나 말아라."

이를 아드득 갈며 으르렁대는 저우제룬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몸을 털었다. 그 모습조차도 도발로 느껴졌는지 그가 눈썹을 찌푸리고 천천히 다가온다. 언제 꺼내들었는지 모를 장검 한자루와 소검 한 자루를 교차한 채로 내게 다가오는 그의 기세가 제법 진중하다.

가만히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릴까 하다가, 내가 먼저 접근하기로 했다. 금세 욱하는 성격에 비해 신중하기만 한 그의 걸음이 내게 다가서려면 아무래도 한참은 걸릴 것 같았으니까.

성큼 걷는 내 발걸음에 검맥의 비전 바른 걸음의 묘미가 담긴다. 눈을 크게 뜨는 저우제룬의 얼굴이 눈 가득 들어오고 나는 오른쪽 손을 그대로 휘둘러 그의 허리춤을 가격해간다.

"큭!"

단 한 수만에 위기에 몰린 그가 왼손의 짧은 검을 휘둘러 내 손을 베어온다. 검 끝에 어린 기운이 살벌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질러가던 주먹을 그대로 내질렀다.

그의 소검과 내 주먹이 서로를 가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악!"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처음 시작부터 김형준을 고까워하던 중국의 저우제룬이 결투를 신청해 이 자리에 모였던지라, 무기를 뽑아들기가 무섭게 나가떨어지는 저우제룬의 모습은 차라리 충격이었다.

분명 서로 간에 일격씩을 주고 받았지만 맨손인 김형준은 멀쩡해보이고 검을 내질렀던 저우제룬이 멀찌감치 나뒹굴었다.

같은 1등급 이능력자간의 전투라는 희대의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순식간에 결과가 나오다니. 당최 김형준이 강한건지 저우제룬이 약한 건지조차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저 멀리 날아간 저우제룬이 한참을 바닥을 뒹굴다가 힘겹게 일어섰다. 단정했던 머리며 옷이며, 산발에 넝마가 되어버린 그가 창백한 얼굴로 검을 치켜들었다.

단 한번의 교차로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저우제룬은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김형준과 자신의 꼴을 번갈아 살피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비겁한!"

대체 뭐가 비겁하다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는 양손에 쥐고 있는 검을 치켜 올렸다. 순식간에 그의 온몸에서 빛 무리가 터져 나오고 검 날이 배로 길어졌다.

"일검파..."

방금 전의 망신을 만회하려는 것인지 기세 좋게 외치던 저우제룬은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게 깔리자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검 한자루가 자신을 향해 내리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콰앙!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오고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질렀다. 오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검이 저우제룬을 그대로 내리찍어버렸으니, 사람들은 그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장 먼저 황룡의 인물들이 먼지가 자욱한 공터로 뛰어들고, 유게네스의 인물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일본의 인물들은 압도적인 김형준의 힘에 경탄과 두려움을 담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검맥과 도맥의 인물들은 그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미 전투 전에 지현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인 듯 했다.

그저 간단하게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김형준과 저우제룬의 전투는, 전투라고 하기에도 뭐하게 끝나버리고 사람들이 흙먼지 속에서 저우제룬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김형준은 그런 그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는 그의 모습에 멀리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유게네스의 일등급 이능력자들과 일본의 이능력자들이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식후 운동거리도 안 됐다는 듯 그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김형준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게네스의 인물들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새삼 김형준의 힘을 확인하고 나니, 그가 했던 말들에 무게가 실렸다. 중국과 일본의 이능력자 열명을 더 모아도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 어쩌지 못할 것이라던 그의 말이 자꾸만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메데이아가 김형준에게 접근했다.

"마스터 킴."

막 일행에게 도착한 김형준이 메데이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말했죠? 저런 사람들 모아봐야 별것 없다고."

그래도 1등급 이능력자라고 어렵게 모셔온 이들을 폄하하는 김형준의 모습에 메데이아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압도적인 힘 앞에 나가떨어진 저우제룬의 힘을 파악하기는커녕 그가 제대로 된 1등급 이능력자인지조차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아무리 김형준이 세계에서 유일한 1등급 몬스터 사냥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힘의 차이가 크니 이제는 이도 저도 모르게 됐다고 할까.

"그렇군요."

딱히 뭐라고 반박할 꺼리를 찾지 못한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제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니, 저는 본국으로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형준이 좀 유치하다 싶은 저우제룬의 도발에 넘어간 가는 척 한 것은,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이번에 모인 1등급 이능력자들의 거품을 걷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까지 힘의 차이를 증명했으니 섣부르게 미노타우르스에게 달려들었다가 험한 꼴을 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형준의 예상과는 다르게 메데이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국가를 대표하는 1등급 이능력자를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이 패대기를 친 김형준의 힘에 감탄해, 오히려 그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김형준의 태도가 워낙에 완강하니 당장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이리 저리 말을 돌리고 있을 뿐, 그녀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살아있습니다!"

이제야 저우제룬의 생사가 확인됐는지 저 멀리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쓴 김형준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현장으로 달려가지 않은 이들의 대부분은 저우제룬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던 탓에 그저 무심하게 시선을 한 번 줬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황룡의 이능력자들과 유게네스의 하위간부들이 호들갑을 떨며 저우제룬을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아손! 이거 한병 뿌려주고 와!"

메데이아가 그런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아손을 불러 빨간색 약병을 건네준다. 김형준을 비롯한 인물들은 그것이 전날 그녀가 선물로 건네준 플라스크와 같은 것임을 깨닫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아손이 저우제룬을 치료하는 것을 구경했다.

비록 먼거리였지만 빨간 약병이 상처에 뿌려지자 괴롭게 숨을 토해내던 저우제룬의 안색이 많이 편안해지는 것이 보였다. 반정도를 상처에 뿌린 이아손이 저우제룬의 입을 열어 남은 액체를 흘려 넣었다.

"내장의 부상에도 효과가 있군요?"

진태식이 감탄했다는 듯 말하자 메데이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속까지 다쳐서야 완치는 어렵지만 응급처치 정도는 될 거랍니다."

검맥에서 수련을 하다보면 거친 수련 탓에 부상이 속출한다. 저런 약이 있다면 검맥의 수련에 조금 더 매진해도 큰 탈이 없을 거라 생각한 진태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쨌건 이대로 가시지 마시고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저희가 마스터 킴이 납득할 수 있을만한 계획을 다시 짜보도록 할게요."

더 있어봐야 새로운 방법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요청까지 무시하기 뭐했던 김형준이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소란이 가라 앉은 공터를 둘러보던 김형준의 눈이 나가사키 쥬리와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몸을 굳히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의 입이 살짝 비틀렸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뭔가 1등급 이능력자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느낌이란 말이지."

본국의 환란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스까지 그들이 걸음을 한 이유는 어쩌면, 저런 반편이 1등급 이능력자들의 힘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그다.

김형준 자신이 실전경험을 위해 왔다면, 저들은 나름 실험이라고 할까.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저우제룬을 보니 그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는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숙소로 돌아가자. 이 정도로 허접할 줄 알았으면 근처에서 처리하는 건데."

다소 건방지게까지 들리는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형준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 차례로 사라지자 공터에 남은 사람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 받았다.

자신들 중 가장 강자인 저우제룬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중국의 이능력자들을 제외한, 유게네스와 초인단의 인물들이 서로를 복잡한 시선으로 주고 받는다.

유게네스의 입장에서야 공들여 초빙해온 1등급 이능력자들이 하자품이라는 것

을 깨닫고 난감해 하는 것이고, 초인단의 이능력자들은 그런 유게네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눈빛을 주고 받으면서도 속내를 끝까지 내비치지 않던 두 단체의 이능력자들이 이내 공터를 벗어난다.

============================ 작품 후기 으아아아아. 일이 많아서 이제야 업데이트 합니다. ㅜㅜ금요일인데 뭐 이리 바쁜지 죽겠습니다. 아주. ㅜㅜ그리고 지난 회의 코멘트가 폭발적으로 늘었더군요. 몇개나 코멘트를 달아야 검후같은 마누라가 생기냐는 분들도 계시고, 거짓말이면 이제 쿠폰 없다는 독자님들도 계시더군요.

이게 사실은 코멘트 한 두개로는 안되고 성심 성의껏 완결까지 달아주셔야 검후같은 여자친구 마누라가 생기는데, 여러분은 웅녀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호녀가 되시겠습니까. 인내심만이 검후와 같은 마누라가 생기는 길입니다.

그리고 빨간먼지님 코멘트에 잠시 눙물이 돌았다능 ㅜㅜ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내 여자는 없다라... 힘내세요 ㅜㅜ 엉엉 ㅜㅜ 나도 울고 ㅜㅜ 독자님도 울고

ㅜㅜ*제 글이 다른 글과 비슷하지 않다는 독자님들의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자식 같은 글인데 아류작 취급받으면 속 상하거든요. 브레이크 다운이라는 글을 리메이크 해서 도살자로 새연재 시작한 이유가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없던 탓이었습니다. ㅜㅜ그리고 댓글 한개가 그렇게 달리니 쪽지를 비롯해 댓글로 아류작 취급하는 분들이 왕왕 생겨서 후기로 징징댄건데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반 연재의 자베트 작가님의 나는 김치다를 추천합니다. 꼭 보십시오. 보고 웃느라 저는 죽는 줄 알았답니다. 5화짜리 글이니 부담없이 보고 코멘트로 또다른 괴작의 탄생을 부추켜주세요!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데헷!

웃느라 저는 죽는 줄 알았답니다. 5화짜리 글이니 부담없이 보고 코멘트로 또다른 괴작의 탄생을 부추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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