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36화 (136/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한참을 실의에 빠져있던 나가사키 쥬리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식당을 나서지만 메데이아는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한참 자신의 힘을 자신하던 차에 처참하게 깨졌으니 지금은 누가 말을 걸더라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자리에 남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마스터 킴의 말대로라면 계획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아손은 김형준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는지 그렇게 메데이아에게 말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역시 이럴 때 의지할 건 계략에 능한 메데이아인지라 이아손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일본의 이능력자 정도로는 안 된다잖아."

직접적으로 1등급 몬스터를 퇴치한 세계유일의 인물이 한 말이니만큼 무게가 실렸다. 이아손의 걱정 어린 시선에 메데이아가 요염하게 웃었다.

"일단은 마스터 킴이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지."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 다들 불편한 기색이다. 마음껏 기세를 뿜어냈고, 또 망언을 일삼은 일본의 이능력자에게 수치심도 주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 탓에 사람들은 잔뜩 굳는 내 눈치를 살피느라 덩달아 어두운 얼굴이고.

"일본의 이능력자가 저보러 겁쟁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입을 열자 사람들이 단번에 나를 주목한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간 비겁자라고."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과연 내가 그렇게 화를 낼만 했다고 생각했는지 앞다투어 일본의 이능력자를 욕하기 시작했다.

"경우가 없는 여자로군요."

이건 지현의 짤막한 평이고,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화를 푸십시오."

이건 진태식의 말이다.

"미친년. 어디 야동배우처럼 생겨서 개소리질이야!"

김도연의 폭언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한 그녀도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자신에게 쏠리자 조금은 찔끔한 모양이다. 아니, 지현의 무심한 눈빛에 내심 자신의 거친 입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고.

어쨌건 상황도 설명했고,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의 대처와 내 결정뿐이다.

"일단 상황이 복잡하지만 그리스의 대처가 어떨지가 우선이니까 결정은 그때 하자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모두에게 그렇게 말하니,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내 의사니만큼 모두가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

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지며 그렇게 말하니, 지현이 대답한다.

"가진 게 많으니 지킬 게 많고, 지킬 게 많으니 숨기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지요."

그녀의 말처럼 유게네스의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여야 할 상황이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를 하려고 해도, 속이 쓰린 건 사실이다.

요 근래 속는 일이 많아져서 그런지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어차피 수 틀리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그래도 먼 거리까지 와서 성과 없이 돌아가는 것은 나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저 유게네스가 현명한 방안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황룡의 능력자도 나가사키 쥬리와 같다면 이번 일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 괜한 일에 목숨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약해도 되나?"

내 기세에 속절없이 밀리던 나가사키 쥬리를 떠올리며 말하니, 지현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보아하니 경지에 오를 때 깨달음이 아닌 뭔가 영단이나 신외지물의 도움을 받은 듯합니다. 내외의 기운이 고르게 조화롭지 못하고 그 수행이 얕아 보이는 것을 보니 정상적인 길을 걸어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억지로 만들어낸 1등급 이능력자라니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해요?"

내 말에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로부터 영단이나, 영약을 이용해 일신상의 힘을 끌어올리는 경우는 제법 있어왔습니다. 맥에서는 깨달음을 주로 강조해왔던지라 지양하는 일이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닙니다. 게다가 왜의 무인들과 중원의 무인들은 당연스럽게 신외지물의 도움을 받아왔으니 이제 와서 새로운 일도 아니지요."

그녀의 말에 나는 실망해버렸다. 기껏 1등급 이능력자를 눌러주었다 생각했더니 그게 반편이란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나 흘러 야심한 시각이 되었다. 문득 메데이아가 전해준 오색의 플라스크가 떠오른 나는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거 한 번 써볼까요?"

내 말에 지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톡톡톡조용한 회의실에 내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대안이라면 저를 비롯한 검맥과 도맥의 인원들은 대한민국으로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단호하기까지 한 내 한마디에 사람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한다. 유게네스의 인물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초인단과 황룡에서 나온 이들의 얼굴에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겠다니 섣부른 발언 아닌가?"

전날은 보지 못했던 중국쪽의 이능력자가 내 말에 넌지시 반대를 한다. 각진 얼굴이 사내다운 인물이었는데, 그가 강렬한 눈빛을 내게 보내왔다.

"1등급 몬스터를 사냥하러 온 것이지 사냥 당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그의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겁쟁이로군."

나가사키 쥬리에게 이미 들었던 소리였던지라 나는 시큰둥하게 귀를 후벼파며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1등급 몬스터를 겁 안내면, 그게 미친놈이지."

도발에 응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을 듣고 넘어가기엔 기분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이름 모를 황룡의 이능력자씨. 나는 유게네스의 요청으로 이 자리에 온 거지 그쪽하고 큰 상관이 없으니 참견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정작 나를 잡아야 할 유게네스에서도 아무 말도 안하는데 그쪽이 너무 나서는 거 아니야?"

처음부터 나를 탐탁찮아 하는 중국의 이능력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더니, 그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뭐라고 반박하려는 그를 무시하고 나는 유게네스의 인물들에게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방금 전에 들은 계획이 전부라면 저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인원들은 철수할 예정입니다."

오디세우스라 자신을 소개한 유게네스의 1등급 이능력자가 내말을 받는다.

"중국과 일본의 추가 지원 1등급 이능력자 여섯이 더 포함된다고 해도 부족하다는 말씀입니까?"

유게네스가 내게 제안한 해결책이라는 것은 단순한 인원보강이었다. 이에 보강되는 이능력자들이 전원 1등급이라면 단순한 해결책을 넘어서겠지만, 이미 일

본의 이능력자 수준을 파악한 내게는 전혀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글쎄요. 저쪽에서 저를 노려보는 나가사키 쥬리씨 정도의 수준이라면 인원이 보강되어봐야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멀쩡히 잘 있는 나가사키 쥬리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설명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터놓고 말씀드리면 진정 1등급 이능력자가 맞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녀 정도의 힘이라면 2등급 이능력자보다 아주 약간 나은 수준이니까요."

오디세우스를 향해 한 말이라 통역반지가 그리스어로 통역을 한 것인지, 내 말을 들은 나가사키 쥬리는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미 보고 받았겠지만 나가사키 쥬리와는 얼마 전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불편한 화제라 그런지 끝까지 모르는 척 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당시 제가 겪은 바로는 나가사키 쥬리와 같은 수준의 능력자 열명이 더 온다고 해도 1등급 몬스터와의 전투는 어렵습니다."

미노타우르스는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처치한 그렌델보다는 더욱 강하다는 평이 있다. 실제 전투를 통해 얻은 정보는 아니지만 전승되는 기록을 토대로 나름 1등급 몬스터들 사이에도 급을 나눈 것인데 제법 신뢰할 수 있는 정보다.

그렌델은 최약체 중의 최약체, 그런 그렌델을 상대하는데도 엄청난 고생을 했던 내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더욱 강력한 미노타우르스를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렌델도 최약체라고 평가 받았지만, 2등급 이능력자 수십이 달려들어서도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 했습니다. 그 중에는 저기 있는 일본의 이능력자와 엇비슷한 수준의 인물도 있었죠."

베오울프는 2등급 이능력자라고 하지만 상당한 강자였다. 만약 나가사키 쥬리와 베오울프 둘중 한명을 골라서 전장에 나서라고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베오울프를 택할 것이다. 저 나가사키 쥬리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풋내기 냄새가 나

거든.

"어쨌건 별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저희는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유게네스 측의 정보 은폐로 일어난 일이니만큼 유감이 없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니 회의실에 있던 인물들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 드리는데 지금 말씀하신 전력으로는 절대 미노타우르스와 싸울 생각 하지 마시기를."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인물들이 나를 잡으려는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곁에 있는 통역사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중국과 일본의 이능력자들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래봐야 황룡에서 나온 자나 나가사키 쥬리나 뭔가 1등급 이능력자다운 면모가 없는지라 나는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했다.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사실을 숨길 경우, 유게네스 측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것을 뻔히 아는데 도리상 숨길 이유가 없다.

"내 말에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어디까지나 생각해서 해준 말이니까."

위로라고 건넨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나가사키 쥬리가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나고 황룡에서 나온 남자 역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름이 좀 알려지니까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구나."

무협지에서나 지껄여댈만한 대사를 읊어대는 중국의 이능력자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차가워진다.

황룡이라면 김보성의 폭주와 민아 건으로 여러 가지 불만이 있는 상태다. 게다가 처음부터 고깝게 나를 보던 남자의 태도가 내 분노를 부추겼다.

"하늘은 무섭지. 근데 당신이 내 하늘은 아니거든."

내 말에 황룡의 능력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얼굴이 잔뜩 붉어진 나가사키 쥬리를 무심하게 바라보니 그녀가 화가 잔뜩 난 와중에도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전날의 일이 알게 모르게 두려움으로 그녀에게 각인된 모양이다.

내가 나가사키 쥬리를 보는 사이에 지척에 다가선 황룡의 이능력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무서워서 그 좁아터진 나라로 도망가는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구나."

남자가 으르렁대듯 지껄여댔다. 주변을 스윽 둘러보니 유게네스의 인물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이쪽을 살펴보고 있다. 어느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없어 보이는지라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이 비웃음이라고 여겼는지 황룡의 능력자가 더욱 얼굴을 사납게 해보였다.

"아, 당신 보고 웃은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라고. 어째 외국 나올 때마다 좋은 꼴은 못 보는 것 같아서 뭔가 내 인생이 슬퍼져서 말이야."

건들거리며 지껄여대니 황룡의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나와라. 여기서 분탕질을 칠 수는 없으니."

남자의 말에 나는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이야? 이런 사소한 말싸움하고 차원이 다른 문젠데?"

서로 간에 하는 도발이야 그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남자는 지금 내게 결투라도 신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등급 이능력자간의 결투라니 그 영향력이 절대 작을 리가 없다. 누가 이기든 지든 원한이 쌓이고 개인이 아닌 단체간의 문제가 될 것이다.

"겁먹은 개처럼 짖어대지 말고 나와라."

남자의 말에 나는 이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유게네스의 인물들에게 물었다.

"마음 놓고 날뛸만한 공간이 근처에 있습니까?"

============================ 작품 후기 민영모 작가님이 댓글로 테러를 하셨더군요. 감사드릴 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만간 저도 테러 한 번 가야겠습니다. ㅋㅋ나는 귀족이다랑 내가 이능력자다랑 비슷하다는 댓글들이 종종 보이는군요. 제 사견이지만 초능력과 이능력이라는 소재를 빼면 그다지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독자분들의 눈은 다른가봅니다. ㅜㅜ주인공은 황룡과 일본의 이능력자들에게 반감이 큽니다. 황룡이야 벌여놓은 짓들이 있으니 그렇고 일본쪽이야 먼저 도발을 해왔으니까요. 다음편에서는 화끈하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ㅎ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미혼이거나 모태솔로이신 분들은 코멘트 달면 검후같은 마누라 얻으실 겁니다. 정말이랑게요.

다음편에서는 화끈하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ㅎ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사랑합니다. 미혼이거나 모태솔로이신 분들은 코멘트 달면 검후같은 마누라 얻으실 겁니다. 정말이랑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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