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Korea's master is coward. Don't you agree Mr. Iason?"
(한국의 마스터는 겁쟁이군요. 이아손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갑작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든 낯 설은 음성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영국에서 얻어온 통역의 반지를 통해 알아들은 내용은 충분히 도전적이었다.
저 멀리서 몇 명의 인원을 이끌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동양인 다섯에 그리스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한명. 그 중에서 그리스의 인물로 보이는 이는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으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대화에 끼어든 건 그 중에서 가장 선두에서 당당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인물이었다.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 보아왔던 일본의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도전적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누가 보아도 나를 도발하는 듯한 여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을 해주니, 여인의 입가가 비틀렸다. 순진해보이면서도 묘하게 색정적인 여인의 얼굴이 위험스러운 매력을 풍긴다.
풍기는 기세가 2등급 이능력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가 1등급 이능력자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저 좀 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라고 생각했더니 과연 나를 도발할 만큼의 능력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자니 스스로가 우스워질 판이라 그저 비웃음을 입가에 떠올렸을 뿐이다.
"하도 피바라기 피바라기 해서 어떤 인물인가 했는데 소문이 과장됐었군요."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자꾸만 나를 자극하는 일본의 1등급 이능력자가 우습기만 하다.
"미안하군. 헛소문이라서. 그런데 그쪽은 누구지?"
이미 일본의 1등급 이능력자라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조롱하는 의미를 담아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이아손이 황급히 그녀의 소개를 대신 해준다.
"일본에서 온 1등급 이능력자 '검성' 나가사키 쥬리님입니다."
역시나 내 예상과 다르지 않은 이아손의 설명에 나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몰라봤군."
시종일관 평대를 유지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미간에 파인 고랑이 더욱 깊어졌다. 어차피 통역반지를 믿고 건성으로 그녀를 상대하는지라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시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겁쟁이니 뭐니 도발하며 나타난 일본의 이능력자를 뭐가 이뻐 환대하겠는가.
"이아손씨. 분명 '우리'를 위해 이 호텔을 비웠다고 하지 않았던 가요."
웬 떨거지들이 나타나 식사를 방해하냐는 질책에 이아손이 식은 땀을 뻘뻘 흘려대며 눈치를 살핀다. 사실 그리스를 돕기 위해 온 일본의 이능력자가 여기로 온다는데 딱히 말릴 건덕지가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렇게 지적을 한 것인데 메
데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아손이 일본으로 도망 간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스터 나가사키. 방금 전의 발언은 저희 그리스 역시 겁쟁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제가 잘 못 들은 건가요?"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지만 무시는 참지 않는다는 건지, 메데이아가 예의 그 음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리가요. 그리스를 '도우러' 온 제가 그리스를 무시하다니요."
돕는다는 말에 유독 강조를 하는 것을 보니, 도움 받는 입장이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말이다.
"그럼 제가 잘못 들었나보네요. 아무렴 그 정도 보수를 받고 오신 분인데 생각 없이 말씀 하실 리 없죠."
메데이아도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대가를 받고 하는 행동이니 선의로 돕는다는 식을 말은 어폐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들을 도우러 온 이능력자에게 이를 드러낸 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그쪽 숙소에는 먹을 게 없었나 보지? 시장기가 돌아서 온 것이라면 여기 앉아서 식사들 하도록. 마침 우리 쪽은 식사가 끝난 참이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현을 포함한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마무리를 미처 짓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다시 이야기를 해도 될 테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라? 이건 또 뭐하는 짓이지?
막 식당을 벗어나려는 내 앞을 쥬리라는 여인이 막아섰다.
여전히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는 쥬리를 바라보다가 턱 끝을 치켜 올렸다. 여자 치고 꽤 키가 큰 그녀였지만 역시 내게는 미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는 형국이다. 그녀는 또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1등급 이능력자라더니 정신 수양이 한참은 모자란 모양이다.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녀 역시 1등급에 올라선지 얼마 안 되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었다.
"음식은 많으니 마음껏 먹고 돌아가게. 배가 고파서야 미노타우르스고 뭐고 기력이 모자랄 테니."
생각해주는 척 말했지만 내용은 명백한 조롱이다. 마치 거지취급하듯 그녀를 대하고 나니, 그녀가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흥! 이름값이 아무리 높아봐야 겁쟁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유치한 도발에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만약 그녀가 다음의 말만 하지 않았다면.
"그러니 자국의 괴수전에서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지."
도발도 좋고, 고까운 시선도 다 좋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선을 넘어섰다. 그녀의 말에 내가 걸음을 멈춰 서자 모두의 걸음이 나를 따라 멈춰 섰다.
그녀의 방금 전 발언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지난 괴수 전에서 전사한 300명에 가까운 이능력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뭐라고 지껄였지?"
분노라기보다는 차가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울컥 올라왔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고 저절로 기세가 일어난다. 이아손을 향해 기세를 뿜었을 때야 단순한 과시에 불과했지만 이번만큼은 통제 불능의 기세가 사납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내 말이 틀린가요? 아. 그 당시에는 2등급 이능력자였다고 했던가?"
차가운 분노가 내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고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서로 우호를 다져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나를 자극하는 것일까. 그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1등급 이능력자의 이름값이 아깝다.
그녀가 내 기세에 맞서 사납게 기세를 일으켰다.
"그렇게 사람 속을 긁어놨으면 뒷감당 할 자신은 있는 거겠지."
그 우쭐대는 모습이 너무도 하찮다. 과연 1등급 이능력자라고 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기세였지만 그녀는 이제껏 보아왔던 그 어느 1등급 이능력자보다 미약한 기세를 흘리고 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지현이 일행들의 앞에서 일본의 이능력자가 뿜어대는 기세를 막아서고 있다. 덕분에 진태식과 김도연을 비롯한 인물들의 표정은 그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아한 기색 뿐이다.
"그 알량한 힘을 믿는 건가."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만큼 더욱 강렬하게 뿜어지는 내 기운에 그녀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언제까지 그런 얼굴일지 두고 보지.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진지해진다. 나를 따라 기세를 끌어올리는 그녀.
다시 한 걸음.
방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재미있다는 표정이 사라진다.
다시 한 걸음.
이제는 조금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다시 한 걸음.
그녀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만만하게 나를 도발하던 그녀는 없다. 조금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안간힘을 다해 내 기운에 저항하는 그녀의 표정이 표독스럽기 그지 없다.
그지 없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은."
한걸음 더 나서니 그녀가 뒤로 물러선다. 그녀의 뒤편에 있던 인물들은 어느사이엔가 저 멀리 쫓기듯 물러서 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했어."
아아.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그날의 전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내 부족한 어휘력에 스스로가 갑갑하다.
"그런 그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
나를 모욕한 것이지만 결국은 그들을 욕되게 한 것과 마찬가지. 유치한 도발이라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지나친 언사에 나는 진정으로 분노했다.
다시 한 걸음.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다.
멍청하고 멍청하다. 겨우 이 정도 되는 힘으로 그렇게 우쭐댔던 것인가. 막 한 걸음 더 나서려 하는데 누군가의 음성이 나를 잡는다.
"마스터 킴. 고정하시지요."
고개를 돌려보니 헬쓱하게 질린 이아손의 앞을 막고 있는 메데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화가 난 상태라고 하지만 그리스에 꼭 필요한 능력자를 너무 몰아세우자니 조금 미안한 감이 있던지라 막 내딛던 걸음을 멈춰 섰다. 이미 충분히 몰아세우긴 했지만 이제라도 멈춰야 하지 싶다.
필사적으로 기운을 내뿜으며 나에게 저항하던 나가사키 쥬리가 모멸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걸린 검에 다가가고 있다.
"뽑으면 죽는다."
기세 싸움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무기까지 뽑아들면 나도 그저 위협만으로는 끝내지 않는다. 아무리 그녀가 그리스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모욕을 하고 무기까지 들이댄다면 내 쪽에서도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
살기를 가득 담은 내 음성에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아마 맹렬하게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로 손을 뻗자니 뒤가 걱정되고 그렇다고 손을 거두자니 자존심이 상할 테고.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는 시선을 거뒀다. 천천히 기운을 거둬들이며 주변을 살펴보니 고급스럽던 식당이 난장판이 됐다. 식기는 전부 깨져 음식들과 함께 지저분하게 널부러져 있고, 샹들리에고 뭐고 온통 깨지고 부서진 파편들로 너저분하다.
"이제는 먹지도 못하게 됐군."
심드렁하게 중얼거리고는 나는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섰다. 내 뒤를 따라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 식당을 나서려던 나는 메데이아와 이아손을 향해 한마디를 남겼다.
"저런 1등급 이능력자라면 열명이 있어도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 어쩌지 못 할
겁니다. 만약 다른 대안이 없다면 저는 이대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1등급 이능력자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나가사키 쥬리는 분명 그 중 최약체 중 한명일 것이다. 저런 정도의 힘이라면 템플러의 베오울프와도 큰 차이가 없는 힘이라 1등급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식당을 부순 것은 미안합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김형준이 사라지고 난 식당에 남은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형준의 힘에 굴복한 나가사키 쥬리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고,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은 그녀가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메데이아는 그런 나가사키 쥬리를 바라보다가 김형준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바라기, 피바라기 하더니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다.
홀로 1등급 몬스터 그렌델을 척살한 이능력자라고 유명세가 파다했지만, 내심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과 그 힘의 차이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메데이아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 힘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기세만으로 평가했을 때 유게네스의 아킬레우스와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일본의 이능력자가 그의 기세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막상 전투를 벌이면 어떻게 변할지 몰라도 지금만 봐서는 그 힘의 차이가 명백했다.
"제길. 돌아간다."
한참을 실의에 빠져있던 나가사키 쥬리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식당을 나서지만 메데이아는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한참 자신의 힘을 자신하던 차에 처참하게 깨졌으니 지금은 누가 말을 걸더라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자리에 남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마스터 킴의 말대로라면 계획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이아손은 김형준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이는지 그렇게 메데이아에게 말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역시 이럴 때 의지할 건 계략에 능한 메데이아인지라 이아손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했다.
"일본의 이능력자 정도로는 안 된다잖아."
직접적으로 1등급 몬스터를 퇴치한 세계유일의 인물이 한 말이니만큼 무게가 실렸다. 이아손의 걱정 어린 시선에 메데이아가 요염하게 웃었다.
"일단은 마스터 킴이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지."
============================ 작품 후기 원래는 저 여인의 설정 상의 이름은 나가사키 로유미였습니다. 메모라이즈의 작가님께 의견을 물으니 허락하셔서 그리 등장시킬 예정이었지만 캐릭터 자체가 비호감이라 후일을 위해 로유미의 등장은 남겨두겠습니다. 껄껄.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더욱 재미있는 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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