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31화 (131/223)

< --  2-5. 미궁과 미노타우르스  -- >

대한민국 정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일전의 서울 참사 때 있었던 사건이 대대적으로 불거져 나온 것도 모자라, 정부의 공식 입장표명이 거짓으로 드러난 탓이다. 다시 전의 입장표명을 번복하자니 스스로 거짓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끝까지 부정하자니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김형준의 다음 행선지로 알려진 그리스 정부에서 유감표명을 해왔다. 정부와의 마찰로 인해 김형준의 행보가 늦어지는 것을 우려한 탓인데, 그리스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도 조금은 공격적인 유감을 표명했다.

거기에 더해 미국과 일본, 중국등 세계 각국의 매스컴이 대한민국 정부를 난도질 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이 없는 국가들도 속속 유감을 표명하고 언론에서 이 사건을 심도 있게 다루는 등,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정부는 연일 각료를 모아 회의를 진행했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저 사태가 빨리 잊혀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연일 가두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보면 그것도 요원한 상황이다.

이래저래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인 대한민국 정부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들어 엎은 검맥은 또 다른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기회로 삼아 그간 방치됐던 이능력자들의 처우 문제를 개선할 생각인지 그 행보가 가열 차기만 하다.

이미 이능력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폭주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 그들의 목줄을 제거한 검맥이다. 이제는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이능력자들이지만 이전까지의 생활로 타성에 젖은 모양인지 누구 하나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검맥과 김형준,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갈등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들 전체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으니 검맥으로썬 맥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역시 터트려야 하나?"

검맥의 실질적인 업무의 거진 전부를 도맡아 처리하는 민용모가 머리를 싸맸다. 무대를 기껏 만들어놨더니 배우들이 나설 생각을 하지를 않는다. 주연들은 열연중이지만 조연과 엑스트라들이 없으니 모양이 날 리가 없다.

"아직은 더 두고 봐야죠."

맞은편에서 역시나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김수현이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유니온의 치부까지 터트렸다가는 도리어 반감만 더 도질 거라고요."

유니온과 군부의 거래, 7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긴 참사의 진상이다. 가뜩이나 정부 불신까지 생긴 국민들에게 이번 정보까지 터트릴 경우 사회적인 혼란이 수습 불가능한 사태까지 갈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국민 중 어느 하나 지난 참사에 지인이 연루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그저 반발로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미 공개된 사실만 해도 나라가 마비될 지경인데 검맥의 입장에서는 지나친 혼란은 피하고 싶은 입장이다.

"역시 정부와 협상을 해야 하나?"

민용모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건 형준씨가 절대 원하지 않을 걸요."

김수현의 반박에 민용모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검맥의 수장이자 그의 친우인 김형준이 떠오른 민용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 참사에서 전신화상으로 회생불가의 상태까지 내몰렸던 그는 절대로 이번 사건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의 의지로 인해 참사의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난 상태였으며, 우연이 겹친 일이긴 하지만 유니온과 정부의 거래까지 밝혀냈다. 이 정도 정보라면 대한민국 정부 뿐 아니라 유니온까지 들어내기에 충분한 사건들이었는데.

유야무야 넘어갔다가는 그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말리라.

가뜩이나 거듭된 배신으로 인해 심사가 꼬일 데로 꼬인 그이니만큼,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형준이가 돌아오기 전에 해결을 봐야 할 텐데 말이죠."

민용모의 말에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급하게 간 거 아니에요?"

김수현은 어제에서야 김형준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사실을 들었다. 검맥의 핵심 인사인 그녀가 어제야 알았을 정도이니 보안에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다.

"일단은 정부와의 입장이 이렇게까지 껄끄러우니 나중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잖아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명성이 아니라 실전경험이니만큼, 후딱 다녀오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거죠."

김형준은 다른 신분을 이용해 비밀리에 그리스로 출국한 상태이다. 괴수를 타도하기 위해 모였던 원정대에 미사일을 날릴 정도인 정부가 혹여 엄한 일이라도 벌이지 않을까 하여 비밀을 유지한 탓이다.

일을 해결하고 가자니 비공식적인 루트로 그리스의 재촉이 워낙에 심했던지라 부득이하게 먼저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리스는 그 대가로 더욱 많은 것을 내줘야 했으며, 공식적인 유감 표명 역시 그 대가 중의 하나였다.

"일단은 정부를 조금 흔들어 놓는 정도로 시작할까요?"

김수현이 고민에 빠진 민용모에게 물었다. 그 표정이 무언가 생각해둔 것이라도 있는 것 같아 민용모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번에는 별 일 없이 도착했네요."

나는 기지개를 펼치며 말했다. 지난 영국행 전세기에서는 괴조에게 시달렸던지라 조금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없어 오히려 오는 내내 지루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그리스행 비행기에는 나뿐만 아니라 지현을 포함한 여러명의 인원들이 포함돼 있어 그나마 대화상대라도 있었다는 점 정도다.

"비행기라는 거, 익숙해지질 않는 군요."

지현이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습게도 그녀는 검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비행기에 타고 있는 내내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녀에게 하늘이란 어쩌면 경외의 대상이지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죠. 돌아갈 때도 또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내가 장난스럽게 응수하니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는 나뿐만 아니라 그녀의 제자와 마찬가지인 검맥의 인원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었으니 마냥 풀어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던 탓이다.

안 그래도 그녀를 경외의 눈빛으로 보던 인원들이 장시간의 비행에 피곤할 텐데도 불구하고 바른 자세로 그녀의 뒤편에 늘어서고 있다.

이번에 추려온 검맥의 인원은 총 세명이다. 2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들로 모두 제몫은 할만한 인원이었는데, 검맥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지현에 대한 존경이 워낙에 컸던 인원들이 이제는 그녀의 친위대와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세를 바로 하고 있는데 그 뒤로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행색을 한 이들이 허리를 꺾어대며 요란을 떤다.

"아다다다. 허리가 뽀사지네."

마치 노인네처럼 허리를 비틀며 신음소리를 내던 김도연이 나를 보며 애매하게 말했다. 그녀는 도맥의 대표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인데, 그녀의 뒤로 두명의 도

맥의 전인들이 마찬가지로 온 몸을 풀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그녀의 말투가 애매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는 일개 이능력자가 아닌 검맥의 수장, 소드베인의 마스터이기 때문이다.

"원로에 방문해 주신 소드베인과 매직 베인의 분들을 환영합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었던지라 일반 탑승객과는 다른 곳으로 안내가 된 우리를 반긴 것은 곱슬 거리는 머리에 구리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장난기가 감도는 눈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는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동작이 꽤나 과장스럽다.

게다가 이국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능숙한 한국어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게네스에서 여러분을 마중 나온 이아손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아국의 원조를 위해 와주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이아손의 능숙한 한국말에 조금 놀라고 있을 때, 검맥의 2등급 이능력자 '싸울아비' 진태식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3년전까지만 해도 5등급에 불과했던 이능력자였는데 검맥에서 비기를 전수 받은 이후 놀랍게도 3년만에 2등급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이능력자로 탈바꿈 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D섹터를 촬영하기 위해 민간인들과 D섹터에 들어갔을 때 조우한 용아병과 전투를 벌였던 과거의 전우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검맥의 핵심인물 몇몇을 빼고는 가장 입지가 탄탄하기도 한 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대한 환영식으로 반겨드리지 못하는 점을 사과드립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기에 눈에 띄는 환영식은 하지 못했는지 그가 사과를 해왔다. 사실 보안엄수에 대한 요청은 우리 쪽에서 먼저 요청한 것이기도 해서 우리 쪽에서 기분이 상할만한 사안은 아니다.

"일단은 원로에 피곤하실 테니 숙소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이아손이 정중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미소를 잇지 않는다. 그의 안내를 따라 우리들은 공항을 빠져 나갔다.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최고급 리무진에 탑승한 우리는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저희 유게네스에서 관리하고 있는 호텔입니다. 일단 오늘 하루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고, 내일 다시 유게네스의 인사들과 방문하겠습니다."

영국에서와는 달리 충분히 우리를 배려하는 모습에 나는 달라진 위상을 실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영국행은 부족한 점이 참으로 많았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아손이 다시 말했다.

"참고로 호텔 전체에 계신 분들은 여러분이 전부이니 마음껏 호텔에서 휴식을 취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30층은 되어 보이는 고급스러운 호텔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전체를 비워놨다는 말에 나도 조금은 놀랐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놀란 기색이 다분했는데, 개 중에는 평소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았다고 오해를 했는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부디 평안한 시간이 되시기를."

호텔의 VVIP룸이 있는 최상층까지 우리를 따라온 이아손이 그렇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유게네스'라면 그리스어로 '숭고한'이란 뜻을 가진 그들만의 이능력자 조직이다. 그런 곳에서 나왔다면 필시 이능력자가 분명할 텐데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호텔의 지배인과도 비슷해 보일 지경이다.

"아. 참고로 저는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데스크에서 이아손을 찾아주십시오."

가만히 듣다보니 하는 말이 꼭 나이트클럽의 웨이터와도 같은 멘트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활달하고 유쾌한 어투가 어지간히 싹싹한지라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다.

마지막까지 활달한 미소를 띤 채 이아손이 엘리베이터로 사라지자 도맥에서 나온 인물들이 각자 배정된 숙소로 하나 둘 짐을 들고 사라졌다.

"이아손이라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데."

이아손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진태식의 말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영국에서는 아서와 멀린, 귀네비어, 그리고 베오울프를 만났다. 그

렇다면 그리스라고 해서 고대의 인물이 생존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혹시나 그가 신화 속의 이아손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그리스 신화라면 너무 먼 얘긴데?"

영웅설화라기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아무리 황당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세계라지만 이번만큼은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생각한 나는 진태식을 비롯한 검맥의 인물들에게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것을 명했다.

"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이아손의 마지막 인사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어투가 워낙 절도 있어 느낌만큼은 전혀 다른 인사를 남긴 진태식이 바로 옆의 방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들어가죠."

양손에 하나씩 길다란 보퉁이를 들고 있는 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실로 들어섰다.

"우와. 좋은데요?"

탁 트인 전망은 저 멀리 바다를 담고 있고, 실내에 배치된 가구는 하나같이 고급이다.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방보다 화려한 그 실내의 모습에 감탄한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당신도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생활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화장실을 장식한 대리석에 감탄하고 있던 내게 지현이 넌지시 말해왔다. 그녀로서는 드물게 하는 농담에 가까운 말이라 나는 피식 웃음 지었다.

"글쎄요. 액수가 단번에 올라가니까 그냥 숫자놀음 같아서 제가 부자라는 실감은 아 나네요."

지난 영국행의 보수로 챙긴 돈과 그간의 재산을 합치면 거의 1조원에 가까운 현금자산을 보유한 나다. 살림에 부족함 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딱히 사치라는 것을 부려본 적이 없어서 이따금씩 내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을 잊고는 했던 나다.

성남의 저택도 꽤 크고 고급스럽긴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버려서 내가 부자라는 실감을 할 일이 없다. 딱히 쇼핑을 하는 취미도 없고.

내 말에 그녀는 뭔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소함이 미덕인 검

맥에서 수백년을 청정하게 수련만 해온 그녀는 본질적으로 사치를 혐오하는 여자였으니만큼 내 대답에 꽤나 기꺼워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여기 저기 설치고 다니며 실내장식을 구경하던 나는 그것도 이내 질려버리자 창 밖에 보이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나라의 바다와는 근본적으로 틀린 빛깔의 바다가 저 멀리 보이고 마치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 창너머로 늘어서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이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이 아름다운 나라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원흉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 그것이 내가 그리스에 온 이유다.

============================ 작품 후기 정신없이 살다보니 오늘이 현지 공휴일인 '아버지의 날'이라는 것도 있고 있었네요. 부리나케 아버지의 묘에 다녀오고 나니 하루가 다 가버렸군요. 덕분에 오늘은 업데이트가 늦었습니다. *전편 내용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는 일일연재라는 특성상 전편이 기억이 나지

않으실 수도 있어서 그리 한 것이었는데 독자분들이 원치 않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요즘 들어 1인칭과 3인칭을 자주 오가는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실 제가 글로 대단한 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있게만 읽어주십사하는 바람으로 그저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에피소드를 구상하다보니 부득이하게 시점이 움직이는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 스스로 글을 쓰면서 글에 무엇을 남기려는 시도는 한번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신바람이 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혹자가 글의 구성이나 이런 저런 부분들에 대해서 혹평을 하더라도 저는 지금의 독자님들께서 즐겁게만 읽어주신다면 충분히 만족하거든요.

그러니 부족한 글이고 이런 저런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시더라도 그저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지하철에서 이동하면서, 짜투리 시간에 잠깐 읽으면서,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저 한편 읽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게 되는 글이더라도 보는 순간만큼은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글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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