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30화 (130/223)

< --  2-4. 세계로...  -- >

검맥의 지부를 벗어난 나는 집으로 향했다. 용모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머리도 복잡해 걷는 걸 선택했다.

"머리가 아직 복잡하신지요."

지현이 그런 나를 뒤따르다가 내게 물었다.

"아? 아. 그냥 그렇네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니 나를 따르던 그녀의 발소리가 딱 멈춰섰다. 무슨 일인가 해서 뒤를 바라보니 지현이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왜요?"

내 질문에도 그녀는 한참이나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만 본다.

"당신도 꽤 심마가 많은 편이었지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기분이 나쁜 일이 있어도 당신은 늘 다음날이 되면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낙천적인 기질 탓인줄 알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항상 간결하고 직접적이던 그녀의 말이 다소 장황했다.

"베이고 찔린 것을 그대로 두면 곪게 마련이지요."

그녀의 말에 량차오웨이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어, 대꾸했다.

"곪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니 이제 와서 탓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 말에도 그녀는 고개를 휘저었다.

"진정 그리 생각하십니까?"

올곧은 눈빛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당당하기만 한 시선에 왠지 마음이

껄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네. 어차피 그녀와 우리는 갈 길이 달랐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진정이십니까."

집요하게 물어오는 그녀 탓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그래요. 뭐 하고 싶은 이야기 있어요?"

말투가 나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변했다. 말해놓고 나니 그녀에게 이런 공격적인 말투를 썼던 적이 없었던지라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안하고 다시 물었다.

"그저 가는 길이 달랐다. 그것이 진정 당신의 생각입니까."

세 번째 던져오는 같은 질문,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지 그녀의 얼굴이 단호하다.

"민아 그 아이. 가여운 아입니다."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굳이 지금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꺼

내는 이유가 무엇이며, 황룡의 첩자인 그녀가 가엽다고 말하는 저의가 뭘까.

량차오웨이는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파견된 중국의 첩자다. 도대체 얼마나 될지 모르는 기밀을 빼낸 그녀의 행동은 엄연한 적대행위. 굳이 이쪽에서 그런 사정까지 일일이 봐줘야 하는 걸까.

"자기가 선택한 길이라면 감수해야죠."

"과연 스스로 선택한 길이겠습니까."

답답하다. 지현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그녀와의 대화에서 갑갑함을 느꼈다.

"말 돌리지 말고 해요."

불편한 속을 억누르고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바짝 나에게 다가섰다.

"민아 그 아이가 생각이 있다면 유니온의 정보를 빼돌리고, 바로 나왔겠지요. 지금의 유니온은 이빨 빠진 호랑이와 진배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가 왜 기울어가는 유니온에 남아있었겠습니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왜 마지막까지 유니온에 남아 있으려 했던 것일까.

"또 고초를 당할 것을 알고도 왜 그런 것을 감수하려 했겠습니까."

알 수 없다.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 아이만의 사정이 있을 겝니다. 당신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사려가 깊은 사람. 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이 품이 좁다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이 비웃어도 당신은 그저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품에 안는 분, 지금의 모습은 그저 토라진 아이와도 같아 보기가 불편하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도, 저렇게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저 말없이 그녀가 하는 말만을 듣고 있었을 뿐.

"손발이 묶인 짐승은 그저 시키는 데로 해야 하는 법이지요."

량차오웨이가 손발이 묶인 짐승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시지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검맥의 건물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윤민아 아니, 량차오웨이는 망연자실하게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뒤엉켜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린 기분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질문부터가 잘못된 질문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면 더 나은 방식으로 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하기만한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웃기 시작하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에게만큼은 량차오웨이가 아닌 윤민아로 기억되고 싶었건만. 이제

는 윤민아고 뭐고, 황룡의 첩자로 그와 마지막 이별을 하게 생겼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떠올리던 량차오웨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야 혼자 무슨 궁상을 떨고 있는지. 스스로를 질책했다.

지금 자신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만약 자신이 속한 황룡에서 타 세력의 첩자를 발견했다면 가장 끔찍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뭔지를 보여줬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몸 성히 살아있는 것에만 감사하자.

지금은 포로라지만 별다른 제제도 없었다. 그저 방문을 나서면 감시의 눈길이 잠시 그녀를 훑어볼 뿐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봐도 머리가 복잡한 건 어쩔 수 없는지라 량차오웨이의 무표정에 조금은 고통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량쯔요우'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벌컥!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이제는 포로라 사생활도 없는 것인가 하고 쓴웃음을 지은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차가운 표정으로 안녕을 고하고 사라졌던 김형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떠나갔을 때와는 달리 조금은 누그러진 빛이다.

"형준?"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누그러진 눈빛에 이제는 버렸다고 생각했던 헛된 바람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좀 우습긴 한데, 까먹은 게 있어서."

차갑게 돌아설 땐 언제고 다시 돌아오니 그것이 못내 겸연쩍었는지 불퉁거리는 그의 말투에 그녀가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그것이 또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도 뻔뻔한지라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해보였다.

"네가 황룡을 따르는 이유가 뭐지?"

그녀의 눈이 갑작스레 일렁였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물어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 저도 모르게 8년을 간직해왔던 비밀이 흘러나오려 했다. 소스라치며 양손으로 입을 막아보지만 턱끝까지 올라온 간절한 외침이 자꾸만 새어 나간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는지 모른다. 두손으로 꼭 막은 입이 자꾸만 벌어진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굴려 그의 얼굴을 보니 언제까지고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려 줄 것만 같은 얼굴이다.

"여동생이 둘 있어."

어렵사리 시작한 이야기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자 막힘이 없었다.

"한명은 황룡의 본부에 그대로 남아있고, 한명은 나와 같이 유니온에 들어왔어."

"인질인가?"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김형준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황룡에 남아있는 동생은 많이 힘들어질 거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식상한 스토리건만 그것이 본인의 이야기임에야 옴짝 달싹 할 수가 있을 리가 없다.

"본인도 고위의 이능력자니만큼 큰 고초를 당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앞길에 어려워질 건 분명하지. 애초부터 첩자로 자란 나와는 다르게 그 아이는 재능이 있었거든. 거기에 야망도 있었고."

김형준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탓인지 그녀의 입을 통해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아이는 내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바라지 않고."

"그게 이유야?"

단순히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자신이 첩자질을 했다는 것에 실망한 것일까. 김형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황룡은 유니온처럼 무른 조직이 아니거든."

그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말로야 앞길이 어려워질 거라고 이야기 했지만 자신이 황룡의 명을 제대로 이

행하지 못 할 경우, 본토에 남은 동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니온과는 달리 황룡은 철저하게 출신성분과 사상을 중시하는 그런 폐쇄적인 조직이었으니까.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가족 중에 반중화 사상을 가진 인물이나 정치범이 있다면 배척받고 심하게는 린치를 당하는 곳이 황룡이다. 억압받는다고 하지만 자유로운 사상의 자유를 가진 대한민국과는 다르다.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듣지 않고도 짐작했는지 그의 얼굴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이 가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안도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유명무실해진 유니온에 왜 남아있었지?"

여전히 공격적인 말투긴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그 속에 담긴 것이 적의와 배신감이라기보다는, 그저 알고자 하는 마음이라 그녀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동생이 두명 있다고 했지? 한명은 유니온에 같이 잠입했다고."

그녀의 또 다른 동생 량쯔요우는 8년전 그녀와 함께 유니온에 잠입했다. 자신과 다르게 직접전투계로 판정받은 그녀는 언젠가 부턴가 황룡이란 이름 대신

유니온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아마, 청소부로 임명되면서 교육을 다녀와서부터 였을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김형준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완전히 유니온으로 돌아섰어."

구구절절한 사연이 마치 싸구려 느와르 영화와도 같다. 청소부 교육을 받고 온 그녀의 동생이 황룡을 부정하고 유니온을 찬양했다. 세뇌라도 당했나 싶어 줄곧 동생을 감시해온 그녀였지만 그 어떤 세뇌의 조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수십년을 황룡의 사람으로 살아오고도 단 1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유니온의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선 그녀의 동생, 자신이 황룡의 첩자라는 사실은 아마도 량쯔요우를 통해 새어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조작된 신분이 노출 될 이유가 없다.

이미 첩자라는 사실이 노출 됐음에도 그들이 그녀를 내버려 둔 것은 아마 역정보 내지는 다른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조기에 첩자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그다지 쓸모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유니온의 입장에서야 량쯔요우를 인질로 오히려 그녀를 통해 역정보를 흘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당장 본토에서의 재촉 탓에 정보를 안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보를 유출하자니 딱 보아도 거짓 정보일 게 분명한 사안들만이 그녀에게 주어졌었을 뿐이다. 굵직한 임무를 몇몇 수행했다고 해도 모두 대외적인 일들일 뿐, 그녀가 8년간 모아서 보낸 유니온의 정보는 전부 그런 것들 뿐이었다.

둘째는 중국 황룡의 충성스러운 이능력자고, 셋째는 대한민국 유니온의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하는 청소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벌써 몇 년이 흘러버렸다. 자매들은 황룡의 이능력자, 유니온의 청소부. 그리고 황룡과 유니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첩자로 몇 년을 살아왔다. 한 배에서 나온 세 자매의 운명이 우스울 정도로 서로 엇갈리고 옭아맸다.

"나까지 황룡을 배신하면 본토에 남은 아이가 곤란할 테고, 그렇다고 유니온에서 빠져나오자니 다른 아이가 마음에 걸렸어."

스스로 내뱉고 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잘도 버텼구나 싶었다.

"그게 내가 황룡도 유니온도 벗어날 수 없던 이유야."

말끝이 놀라울 정도로 덤덤하다. 처음에는 주절주절 두서없이 시작했던 이야기가 끝에 가서는 마치 남 이야기라도 하듯 고저조차 없다. 다 말해놓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평안해졌달까. 그리고 처음으로 털어놓은 진심을 들어준 이가 그라는 것에 조금은 안도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김형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결국 유니온에도 황룡에도 인질이 잡혀 있다는 말이야?"

인질이라. 다들 스스로의 신념에 의해 운명을 결정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인질이라는 말이 크게 틀린 일도 아니리라. 잠시 고민하던 량차오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긴!"

그가 화를 내는 모습에 왜 그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던지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그녀의 얼굴에 아주 조금이지만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진짜. 이놈이나 저놈이나 양아치 흉내야!"

괜스레 성을 내며 발을 구르는 그의 모습에 량차오웨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잠시만이라도 량차오웨이가 아니라 다시 윤민아가 되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 작품 후기 어제 어이없는 실수로 혼동을 드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ㅜㅜ제가 잠을 못자서 혼미한 와중에 무리하게 수정작업을 하느라 본작 최신화까지 삭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번 보신 분들이 두번 같은 글을 보게 되는 본의 아닌 낚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ㅜㅜ엉엉. 정말 잘못했어요.

ㅜ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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