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4등급 이능력자와 3등급 이능력자는 대우가 다르다. 덕분에 나도 등급 상향을 위해 그렇게 등급 재심사를 받았었는데, 모두 미끄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애초부터 2등급이었다고 하니 나로서는 의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저는 분명 수차례 등급 재심사를 받았고, 전부 4등급으로 나왔었습니다."
사지를 헤쳐나가며 지옥을 겪었던 안개 속에서의 시간이 나를 2등급으로 각성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내가 2등급 이능력자였다니.
"아뇨. 분명한 2등급이었어요. 다만 각성시의 트라우마 덕에 능력이 봉인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뿐이죠."
"봉인?"
나도 모르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능력이 봉인되어 있었다니, 그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네. 2등급 이능력자 '이야기꾼' 김상현이라고 알고 있죠?"
그녀의 질문에 나는 슬슬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야기꾼' 김상현은 마인드콘트롤러로 유명한 이능력자다. 그 지닌 능력이 기억의 조작과 사람들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라 기피대상이 될법한 이였지만 현실은 정 반대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능력자들이나, 사람들을 치료하는 세라피스트에 가까운 이라 온갖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능력자들에게 꽤나 인정받는 사람이다.
나 역시 D섹터를 오고 가며 그와는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뭔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각성시의 나는 그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니까.
"김상현씨라면 나도 안면이 있긴 해요."
그 음성이 나도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 가득하게 되어 버린다.
"네. 그가 당신의 각성 당시 담당자였어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다. 나는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그가 내 각성시의 담당자였다는 것은, 내가 각성할 당시의 전체적인 상황의 수습과 나에 대한 카운슬링을 맡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 말은 그가 무언가 내 기억을 조작했다는 이야기.
그녀는 내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자 조금은 망설이는 기색을 해보였다.
"말해줘요. 숨김없이. 이제 속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내 말에 그녀가 상처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말로는 서로 간에 주고 받은 것이 있어 괜찮다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를 궁지에 몰다니, 나 스스로가 비열하게 느껴져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형준씨의 각성 당시 보고된 피해는 사망자 셋에 중상자 여섯."
제길. 내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각성 당시 기억이 희미하다 했더니 내가 사고를 쳐도 대형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간 부상자가 나왔으나 전부 완치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뭔가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형준씨 본인도 겹겹이 둘러싼 붉은 고치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답니다.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은 대로였던지라 유니온에서도 처치곤란한 상황이었죠. 여러차례 그 고치를 벗겨내려고 했지만, 결국 힘으로 벗겨내는 것은 포기했어야 했죠."
그녀의 말이 혼란스럽다. 간단명료한 사실이지만 스스로도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나를 짓누른다.
"그래서 동원된 이능력자가 '이야기꾼' 김상현이에요."
모든 일의 전모가 머릿속에서 형체를 갖춰간다. 각성시 폭주가 일어난 내 주변에 있던 동급생들이 그대로 사고에 휘말렸고, 빌어먹을 이능에 의해 그들 중 사망자가 나와 버렸다. 상위 이능력자인 이야기꾼이 나서 모든 일을 수습했을 테고, 그 와중에 내 기억까지 같이 손을 쓴 것이다.
"간신히 고치를 거둬내고 형준씨를 유니온으로 이송했지만, 형준씨는 당시에 거의 폐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들었어요. 그냥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온 걸로 알고 있었지만, 간혹 가다 보이는 폭주에 상위능력자들이 나서야 수습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었죠. 그 탓일 거예요."
빌어먹게도 내 폭주 탓에 희생됐을 희생자들의 얼굴도, 이름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빌어먹을 상황인가! 살인을 하고도 그 희생자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니!
"당신을 폐기하지 못한 것은. 순수하게 전투쪽으로만 특화된 2등급의 이능력자. 유니온에서도 순수한 전투계열 이능력자는 드물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2등급이라니. 유니온에서 당신을 예의주시할 만하죠."
내 표정이 굳어갈수록 그녀의 얼굴 역시 표정이 사라져간다.
"그게 제가 형준씨에게 접근했던 이유랍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인의 충격? 그딴 기분은 아니다. 단지 내 인생의 어느 한부분인가가 누군가가 만들어낸 기억이라니 그것이 차라리 더 충격일 지경이다.
어제 오늘 하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더니 이제 와서는 차라리 감정의 모서리가 뭉툭해진다.
"전투특화 2등급 이능력자, 유니온 내부에서 당신을 부르는 콜싸인은 '흡혈의
천사'였어요."
흡혈의 천사라는 그 섬뜩한 단어가 머릿속을 오고간다.
소희도 내게 말했었지, 흡혈의 이능은 가시찔레 꽃의 힘이 아닌 원래부터 내가 지니고 있던 힘이라고. 그녀는 그저 내 힘을 빌어 꽃을 피울 뿐이라고.
"그랬나?"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지독스럽게도 메말라 있다. 그녀가 내가 방에 들어서고 나서 처음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쳐왔다.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무엇이 미안할까. 굳이 몰라도 될 사실을 알려준 것이 미안한 것일까. 아니면 목적을 갖고 접근했던 것이 미안한 것일까.
이제 와서는 전부 가치없다.
"쉬세요."
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희선씨가 쉬고 있던 방을 벗어났다.
방 밖으로 나서자 복도의 벽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용모가 보였다.
"다 들었냐?"
그 질문에 어쩌면 용모는 희선씨의 접근이 의도적이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내 각성시의 일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거?"
그렇게 물으니 용모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전부."
애매한 그의 대답에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거? 그것도 세명이나? 아니면 희선씨가 처음부터 내게 목적을 갖고 접근했다는 거?"
조금 지치는 기분이긴 하지만 의외로 덤덤하게 그에게 물었다.
"들었구나."
역시 용모는 전부 알고 있었다. 유니온의 타격대 조장으로 있었을 때부터 용모는 정보력이 비상한 편이었으니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에 관한 정보를 모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가치 없고, 하찮다.
"응. 어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도 들었더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어깨를 으쓱해 보이니 용모가 내 어깨를 한번 두들겨주고는 말했다.
"그래.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 염두에 두지 마."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 희선씨의 일이야 그렇다 치지만 내 행동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 손에 희생된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는데도?
가학적인 질문이 연달아 떠오르고 나를 짓눌렀지만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그 생각들을 떨쳐냈다. 이전이라면 미쳐 날뛰었을 이야기를 듣고도 의외로 내 마음이 덤덤한 것은 그간의 사건들 탓에 내 감정이 어딘가 망가져버린 것일까.
마음이 무겁지만 결코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그저 께름칙함, 찝찝함 그런 감정들이 느껴질 뿐 죄책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스스로의 변화에 놀라울만도 했지만, 연달아 받은 충격 탓에 실감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나고, 혹은 몇주가 지나고 뒤늦게 죄책감에 몸부림을 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윤민아가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지금 이야기 해볼래?"
용모의 말에 가슴 한 구석이 차게 식어 내린다.
"가자. 어차피 끌만한 일도 아니니까."
민아가 잠들어있던 방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니, 용모가 뒤를 따르다가 이내 멈춰섰다.
"우리는 간단하게 이야기 했어. 자세한 정보를 심문하는 거라면 지금보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가 낫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저 멀리 사라진다. 물끄러미 사라져가는 용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고리를 잡아 제꼈다.
문을 열자마자 초췌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민아가 보였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전날과 같이 처참한 몰골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쳐 보이는 기색이다.
"왔어?"
미묘하게 변한 그녀의 말투가 신경을 콕콕 찔러왔다.
"어."
막상 방에 들어섰지만 뭔가 무거운 공기에 의해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다. 가만히 방문을 닫고 그녀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사실이야?"
"사실이야."
그 전까지의 특이한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처량한 어조로 대답해오는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이 복잡하다.
"나 황룡의 첩자야."
그녀 스스로가 입을 열어 자신이 첩자임을 밝혀왔다.
"본명은 '량차오웨이' 황룡의 특작대 소속이야."
그녀가 첩자였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윤민아'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인 받으니 가슴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언제부터였지?"
스스로 감정을 추스린다고 추슬렀지만 말투에 날이 서있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내 어투가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민아는 그런 내게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8년전. 황룡의 지령으로 유니온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왔어."
8년이라.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대략 4년이 안 되었으니 그 전부터 이미 첩자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그녀가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중국의 황룡씩이나 되는 것들이 뭐 주워 먹을게 있다고 이 좁은 나라에 기어들어왔어."
말투에 조금씩 날이 서고 날카로워진다.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정보와 D섹터에 관한 정보, 극비 안건이라 나 역시 자세히는 알지 못해. 그저 우리에 비해 턱없이 좁은 나라임에도 넘쳐나는 이능력자들과 D섹터가 관계가 있다라는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우리라. 우리. 황룡을 말하는 것인가. 하긴 그녀는 처음부터 계획된 첩자였지. 이제 와서 황룡을 우리라고 지칭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우리라는 단어에 나는 그녀가 배신자이며 첩자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실감이 났다.
"그래서. 임무는 잘 완수했고?"
내 차가운 말은 차라리 조롱에 가깝다. 그녀가 내가 방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것을 지어보였다.
"형준..."
그녀를 알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가련한 표정에 나는 입술을 짓쳐 물었다.
왜 네가 피해자인 척을 하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뭐야?
"속인 건 미안해."
그녀는 희선씨와는 달랐다. 사과를 하지만 당당했다.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할 뿐이다.
"속이다니. 너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야?"
용모가 자리를 비켜준 것은 나와 그녀의 대화가 이렇게도 지리한 감정의 소모
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제 하루로 털어버리려 했던 배신감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자꾸만 목을 타고 넘어와 그녀에게 쏘아졌다.
"됐어. 그냥 네 입으로 듣고 싶었어."
그녀가 유니온에 잠입했던 이유와, 과정, 그리고 결과는 차차 시간을 두고 밝혀 가면 되겠지. 나는 멍청하게도 그녀의 입에서 확답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빌어먹게도 무른 성격에 그녀의 입에서 확답을 받고 나면, 어쩌면 마음이 쉽게 정리될 것 같아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몸조리 해라."
차갑게 내뱉고 방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붙들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그 가녀린 손길에 나는 멈춰섰다.
"진심으로 사죄할게. 너에게도 대한민국에도."
그 말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들던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 대한민국?"
나는 대체 무엇을 바란 것일까. 잔뜩 일그러진 얼굴표정을 간신히 수습하고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사과하지마. 네 신념을 따른 일이라면 너 스스로 후회는 없어야지."
나오는데로 지껄이고는 방을 나섰다.
"쉬어. 량차오웨이."
그녀가 등 뒤로 나를 부른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고 방문을 닫았다. 이제 윤민아는 없고 량차오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 작품 후기 오마이갓. 신작 리메이크 들어간답시고 글 삭제하다가 내가 이능력자다 최신편을 삭제했었네요. ㅜㅜ이게 무슨 짓인지. 혼동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마이갓. 신작 리메이크 들어간답시고 글 삭제하다가 내가 이능력자다 최신편을 삭제했었네요. ㅜㅜ이게 무슨 짓인지. 혼동을 드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