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눈을 뜨고 나니 바로 곁에 지현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음..."
머리가 개운치 않은 것이 그다지 컨디션이 좋진 않지만, 잠들기 전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태라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제는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지금은 차갑기만 하다.
윤민아, 그녀의 출신이 중국의 황룡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내 자신이 이제 와서는 민망할 지경이다. 그녀가 내게 뭐라고 그렇게 충격을 받았던가.
단지 자문하건데, 그녀가 나를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을 듣고 쓸데없는 기대를 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의문이었지만 이제 와서 다 쓰잘데기 없는 사실들. 마음이 한결 편해졌지만 그래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불편한 자세로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지현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
러워 보인다. 그녀는 어제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운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니 그녀가 눈을 뜬다.
"어. 나 때문에 깼어요?"
잠시 눈을 깜박거리며 내 기색을 살펴보던 그녀는 내 표정이 어제보다 나아보이자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마음은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 한결같은 염려에 그나마 마음 한구석에 있던 찝찝함이 사라져간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니, 그녀가 얼굴을 확 붉혔다.
"어? 일어났..."
김도연. 저 눈치 없는 년.
이제 막 샤워를 끝냈는지 김도연이 건물에 위치한 욕실에서 기어나오다가 우리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하던 거 마저 하십시오."
수습 같지도 않은 수습을 하며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됐어. 하여간 타이밍도 더럽게 못 맞춰요."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김도연도 그런 내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히죽 웃어보였다.
"어제는 죽상이더니, 오늘은 또 괜찮네. 그러다가 부끄러운 곳에 털 난다."
언제나 돌리는 법 없는 그녀의 말투에 나는 도리어 가슴이 훈훈해져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벌써 났으니까. 걱정할 거 없네요."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고, 어제의 인원이 그대로 모였다.
"민아는?"
내 질문에 용모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일어났어. 아무래도 오후나 되야지 깨어나겠지."
어제 그녀가 정신을 잃은 것이 새벽 두시 반가량이었으니, 아직 8시가 채 안된 지금에 정신을 차렸을 리가 없다.
용모는 민아를 언급하는 내 표정이 의외로 평안해보이자 계속해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은혜의 말에 의하면 지난 참사에 유니온과 정부 둘 다 개입 했었다는 정보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말이기도 하고, 어제 민아 일을 들은 이후로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차분해진 기분이라 덤덤하게 용모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난 괴수전은 유니온에서도 버린 패라고 할 수 있는 이들만 추려서 보냈다는 말이지. 어차피 괴수와의 전투가 가망이 없어 보이니 당시 타격대에 있었던 유니온의 인물이 보고를 하고 군부가 바로 미사일로 타격, 그리고 펑. 그렇게 된 거야."
마음이 차분하다고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백의 이능력자들과 수백만의 시민들이 단지 그들의 파워게임에 휘말려들어 목숨을 잃었다니.
표정이 자꾸만 차갑게 굳어갔다.
"유니온이 얻은 것은 반대 파벌의 숙청, 군부가 얻은 것은 저등급이지만 이능력자 부대의 창설. 둘 다 서로 윈윈하는 거래였던 모양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 탓에 차라리 민아의 배신은 사소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용모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표면상으로 나는 검맥의 수장이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1등급 이능력자. 내 결정에 따라 유니온과 군부의 행방이 달라진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터트려야지."
단호한 내 말에 김도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용모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지현은 그저 한결 같은 얼굴로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만 있었고.
"어차피 썩은 부분은 도려내는 수밖에 없잖아.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수술을 시작해야지."
이대로라면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다.
만약 유니온이 약화되고 검맥과 각종 맥의 후예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태반이 다른 나라로 흡수됐을 것이다. 몬스터들이 범람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능력자 전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국가 위신과도 관련이 있는 중대한 일.
사소하게는 국가의 외교력이 약화되고, 크게는 D섹터와 괴수의 문제도 더욱 악화될 것이다. 간신히 서울로 몰아넣은 몬스터들이 경계망을 뚫고 전국을 들어 엎는 것은 아마 순식간일 테지.
"지난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어. 이대로 가다가 맥의 비전 전수로 겨우 붙잡아둔 이능력자들이 대거 이탈할 판이니까."
검맥을 비롯한 각종 맥에서는 현재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을 이어온 비전을 이능력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그간 등급의 향상이나 그런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능력자들이 각종 비전을 이어받고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확실하게 강해지는 길이 열리니 열성적으로 맥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자부심도 상당히 커지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자체가 맥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지는 가장 큰 이유였다. 비전의 유출을 우려했지만 맥의 수장들이 펼쳐주는 특별한 비법 없이는 연마 자체가 불가능하다니, 그것도 큰 걱정은 아니다. 검맥 같은 경우에는 지현이 그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맞물려 대한민국이 지난 참사를 딛고 일어서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돈 앞에는 장사 없다고, 타국의 스카우터들이 물질공세를 피면 안 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강해진 만큼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유니온에서는 아직도 강압적으로 이능력자들을 대하고 있었으니, 그 반감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이능력자들이 단체로 이탈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미묘한 밸런스를 확고하게 이쪽으로 끌어오려면 지난 참사를 바로 잡고, 이능력자들의 대우를 향상 시켜야 한다.
내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노래를 부르는 애국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고 자란 국가가 이 곳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 된 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힘까지 갖고 있다. 거기에 더해 우리나라가 한층 더 부강해진다는데 꺼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터트렸다가는 반감만 생길 텐데?"
용모가 이의를 제기했다.
"정보를 가공해야지.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방향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용모에게 씨익 웃어주니, 용모가 덩달아 미소를 짓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제길. 결국은 내 할 일이 또 늘어난다는 소리구만."
그 뒤로 세세한 정보를 더 나누다가 대충 모임을 마무리 했다.
"그럼, 일단 각자 머리를 굴려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리고 신은혜는 어떻게 할 거야?"
자리를 일어서려던 용모가 물었다.
"죽일 수도 없고, 지금 이능을 상실한 것만 해도 충분한 형벌이겠지만 그걸로는 왠지 분이 안 풀리는데."
내 말에 김도연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맡겨줘. 알아서 처리 할 테니."
그 스산한 분위기에 신은혜의 앞날이 절대로 편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차피 그녀가 뿌린 씨앗이니 이제 와서 억울하다 하진 못하리라.
"그럼 윤민아는?"
용모의 질문에 분위기가 찬물이 끼얹어진 듯 싸늘해졌다.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그녀가 일어나면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은 그 뒤에 하자."
배신감과 충격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예 편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처우는 당장에 결정하자니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도 많은지라 결정을 보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기다려 줄래요? 잠시 이야기 할 것이 있어서."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지현에게 말하니 그녀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잠시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용모에게 물었다.
"희선씨는?"
내 말에 용모와 김도연 둘의 몸이 동시에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내심 떠오르는 것이 있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이쪽도 마찬가지인가.
"그냥 얘기나 하려고 그래. 일전의 일로 마무리 지을 것도 있고."
용모가 마지 못해 복도 끝의 방을 가리켰다. 나는 다시 한 번 지현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형준씨. 나..."
마침 일어난 참이었는지, 내가 방문을 열어주니 희선씨가 나를 맞아준다. 잠시 상투적인 안부인사가 오고 가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희선씨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말 안해도 돼요.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내 말에 눈을 크게 떠보였다. 나는 왠지 가슴이 아릿아릿해왔지만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희선씨. 유니온의 지시로 저한테 접근 한 거였죠?"
그 노골적인 질문에 그녀가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혀.. 형준씨..."
뭐라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내 이름 뿐이다.
"이상했어요. 갑자기 희선씨가 저에게 호감을 보여서."
애초부터 조금은 작위적인 만남이었던데다가 이후의 상황들이 나를 께름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로 인해 나는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접근이 그저 순수한 호감뿐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달까.
민아의 일로는 그렇게 충격을 받아놓고 희선씨의 일은 이렇게나 담담하다니. 종 잡을 수 없는 내 감정 변화에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사과 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와서 상처 받고 할 것도 없고. 당신은 지시를 따랐을 뿐이잖아요? 막판에 저도 신세 졌다고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모셔준 건 오히려 제가 고마워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얼굴빛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그 얼굴에 왠지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만 이제 와서 제가 궁금한 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제게 접근한 거죠?"
당시의 나는 4등급 이능력자, 유니온의 입장에서 그렇게 중요할 것도 없는 수많은 이능력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뭐가 있어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형준씨... 미안해요..."
그녀는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게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내가 에게 듣고 싶은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단시 희선씨가 숨기는 것이 있었을 뿐이고, 그 이후로는 오히려 내 에서 신세를 졌으니 그냥 서로 빛 갚았다고 생각하도록 해요. 유니온이 제게 바란 게 뭐였는지 대답해줘요."
어쩌면 매정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내 말에 그녀가 울먹거리다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떠듬떠듬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준씨는 모르겠지만 형준씨 각성시의 등급은 4등급이 아니었어요."
전혀 생각지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
다. 간신히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의 말을 잘랐다가는 또 골치 아픈 신파극이 벌어질 것 같았던 탓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이 차갑기만 할 것이라는 것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민아를 향했어야 할 배신감마저 엉뚱한 사람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이은 사건에 나는 그녀를 배려할 만큼 마음이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나는 눈빛으로 그녀의 설명을 재촉했다.
"형준씨의 각성시 측 등급은 2등급. 그것도 순전히 전투에 특화된 것으로 분류 됐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4등급 이능력자와 3등급 이능력자는 대우가 다르다. 덕분에 나도 등급 상향을 위해 그렇게 등급 재심사를 받았었는데, 모두 미끄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애초부터 2등급이었다고 하니 나로서는 의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저는 분명 수차례 등급 재심사를 받았고, 전부 4등급으로 나왔었습니다."
사지를 헤쳐나가며 지옥을 겪었던 안개 속에서의 시간이 나를 2등급으로 각성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내가 2등급 이능력자였다니.
"아뇨. 분명한 2등급이었어요. 다만 각성시의 트라우마 덕에 능력이 봉인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뿐이죠."
============================ 작품 후기 음. 유부남이 아니신 분들도 많으시군요. 껄껄.
그리고 독자님들이 오해하시는데 저는 공처가가 아닙니다. 애처가입니다. 제가 마눌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데요. 오죽하면 마눌님이 백미터 밖에서 보이면 저는 달려가서 마눌님을 영접합니다. 이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니 공처가는 아닙니... 정말이랑게!!
췟. 미혼분들은 언젠가 이 지극한 공경과 순종을 배울 날이 올 겁니다. 유부남님들은 이미 배우셨겠지요. ㅋㅋㅋㅋ어쨌건 그간 모아왔던 떡밥들을 연달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이 민아의 배신에 지나치게 흔들린 건, 그 자기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면 남자들 흔히 흔들리고 막막 믿어버리잖아요. 그러다보니 근거 없는 믿음과 호감이 더욱 쌓이고, 그걸 배신 당하면 화나죠. 막 충격과 공포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나서 바로 털어버렸습니다. 저런 감정은 원래 자고 일어
나면 금방 또 수그러 들 떄가 있응게요.
독자분들의 하해와 같은 사랑과 관심 덕에 어제는 노블 투베 15위까지 간만에 올라갔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는 추천과 코멘트 세례로 저를 저 높은 곳까지 올려주소서! 메모라이즈 바로 아래 서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ㅋㅋㅋ 첨언이지만 메모라이즈 로유진님의 본명이 로유미라는 소문이 있.... 그리고 그 자태가 그렇게 고우시다던데 ㅎㅎㅎ참고로 노블 게임 판타지 '네임드' 작품화면에 새로운 홍보영상이 올라왔는데 꼭 보십시오. 전세번 봤는데 뒤집어졌습니다. 정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