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27화 (127/223)

< --  2-4. 세계로...  -- >

잠시지간 도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놀라는 얼굴들 하고는. 가관이네. 킥."

신은혜의 조롱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내가 뭐랬어. 윤민아는 배신자라고 했잖아."

황룡. 황룡. 황룡.... 폭주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김보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그들을 조심해...'

반쯤 녹아내린 눈꺼풀 사이로 눈물을 흘리던 그가 말했었지.'화.. 황룡을 몸에 새긴 자들...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과 인연을 맺지 않았을....

끄으윽!''나... 그 사람들에게 유니온의 정보를 넘겼.. 크윽.. 대한민국 이능력자의 데이터를 통째로..''위.. 위험한 사람들.. 큭.. 후회해.. 용서 받을 수 없겠... 크윽..'그의 폭주에 관여했던 이들, 그들의 몸에 황룡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김도연은 민아의 몸에 그 황룡 문신이 숨겨져 있단다.

두가지의 사실이 머릿속에서 부딪치며 그 연결고리가 자꾸만 툭툭 끊어졌다.

"왜 민아가..."

허탈하기만 한 내 음성이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다.

"형준아..."

용모가 다가와 내 어깨를 짚었다.

"나 대체 무슨 이야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 용모가 다시 한 번 어깨를 두들겨준다.

용모라면 알 것이다. 내가 어떤 각오로 유니온의 안가에 잠입했었는지. 나는 최악의 경우, 유니온 자체를 지워버릴 각오로 그녀를 구출한 것이다.

스스로는 우리의 파워게임에 휘말린 그녀가 가여워서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내가 그녀를 왜 구하려고 했지?

"사람이 사람을 보되, 그 안의 욕망을 비추니 사람 자체로 하나의 거울이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추하면 어떻고, 잘나면 어떠하리. 그저 거울은 거울인 것을..."

청량한 기운이 가득한 지현의 음성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하고 나니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약해빠졌군."

신은혜의 조롱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민아에 대한 믿음이 내 생각보다 컸는지 충격을 크게 받은 내가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던 모양이다.

"형준아..."

용모의 안쓰럽다는 표정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뿌리치고 나는 얼굴을 굳혔다.

"윤민아는 중국의 첩자인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신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윤민아는 황룡이 유니온에 심어둔 첩자야."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내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차가운 한기가 등가를 쓰다듬고, 그 자리를 배신감이 대신했다. 그 뒤로는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염려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지현의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다.

"나, 이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녀를 구하려고 애를 썼는지, 그리고 왜 제가 배신감이 들죠?"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내 말에도 그녀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녀와 그렇게 친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가 허탈하죠?"

그녀와의 접점이라고 해봐야 유니온의 임무를 수행할 경우뿐이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도 크게 없고, 사적인 만남을 가졌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배신감이 드는 것은 간혹 가다 보였던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 탓이었을까.

모르겠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얼마만큼 믿었는지, 또 그녀가 왜 배신을 했는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한참을 앉아있으니 용모와 도연이 자리로 거실로 나왔다.

"어때. 좀 괜찮아?"

용모의 염려스러운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유. 멍충이. 전부터 그렇게 사람을 잘 믿더니, 내 언젠가 뒷통수 맞을 줄 알았어."

김도연의 까칠한 말에 울컥했지만, 그녀의 걱정 가득 담긴 눈매에 나는 그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어쨌건 신은혜하고 유니온 건은 내가 처리 할 테니 너는 이만 가서 쉬어."

고개를 끄덕여주고 희선씨의 행방을 물었다.

"김희선씨는 당분간 검맥에서 보호하고 있을 거야. 경우는 다르지만 그녀 역시 유니온의 입장에서는 배신자니까."

배신자라는 말에 괜스레 가슴이 서늘해진다.

"용모야."

내 힘아리 하나 없는 음성에 용모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임마."

"내가 약한 걸까?"

윤민아가 대체 내게 있어 어떤 존재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배신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저 그녀가 중국의 황룡이 보낸 첩자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도 심란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서 쉬어."

그래. 지금은 쉬자. 나는 사람들의 염려 섞인 시선을 받으며 거실의 한켠에 놓인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형준이 그렇게 잠이 들자 모두가 김희선이 쉬고 있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김희선이 힘없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네."

머리고 꼬리며 다 떨어져나간 말이지만 그녀가 용케도 그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4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미 신은혜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확인차 질문했던 민용모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윤민아 팀장은 처음부터 그 출신이 명확하지 않았었거든요."

"그걸 알고도 유니온의 핵심 사업에 관여를 하게 하다니, 도무지 유니온의 속을 알 수가 없네요."

윤민아가 관여했던 유니온의 임무만 하더라도 꽤나 굵직굵직했다. 김형준을 이용해 양지로 이능력자들을 이끈다는 계획부터 크고 작은 임무가 그녀의 손을 거쳐갔었다.

"이쪽에서도 역정보를 이용한다는 거 같더라고요."

이미 들었던 이야기지만 그녀를 통해 들으니 더욱 신빙성이 가는 모양인지 그 뒤로도 민용모와 김도연이 꼬치 꼬치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해댔다.

한참을 정신없이 질문하던 민용모와 김도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김도연이 성질을 못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악! 감질나서 못 살겠네. 이봐요. 김희선씨. 하나만 물읍시다."

김도연이 곱게 정리된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네. 물어보세요."

조신하게 대답하는 김희선의 모습에 김도연이 끄응하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럼 당신도 의도적으로 형준이한테 접근한 거 맞아요?"

그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민용모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김도연은 또 그런 그를 보며

'왜! 뭐!'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희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금세 파랗게 푸들거리는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거리다가 다시 닫히기를 여러 차례. 김도연이 다시 그녀를 채근했다.

"형준이를 친유니온 인사로 만들기 위해 접근했다고 하던데, 맞는 이야기냐고

요!"

말을 하다보니 화가 더욱 치솟았는지 김도연의 말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곁에 있던 민용모가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미친개 김도연의 성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놔! 놓으라고! 불상하잖아! 형준이 새끼! 아무 것도 모르고 줄줄이 배신이나 당하고."

다행스럽게 전지현이 형준의 곁에 남았기에 망정이지, 그녀의 폭언을 들었다면 곱게 넘어가진 않았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 거친 말 속에 담긴 염려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아오! 멍청한 새끼! 병신! 호구! 팔푼이새끼!"

김희선은 대답도 않았건만 김도연은 더욱 승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 대답을 안 해! 하긴 양심이 있다면 대답 못 하겠지."

점점 도를 넘어가는 김도연의 언사에 용모가 마지못해 그녀를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진정해. 이러다 형준이 들어!"

그 말 한마디에 찔끔 놀란 김도연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성질이 나는 건 여전한지 눈빛이 곱지는 않았다.

"김희선씨.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저는 당신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 따위 없습니다. 전일이야 어찌 됐건 오늘 당신은 형준이를 위해 유니온을 배신했으니까요."

그 배신이라는 말이 어찌나 아프게 들리던지 김희선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민용모는 자꾸만 발작하려는 김도연을 눈짓으로 타이르며 김희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니온의 명령으로 김형준씨한테 접근 한 게..."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 맞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당장에 김도연이 펄쩍 뛴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민용모의 말에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유니온의 손에 자란 당신으로썬 도저히 그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겠지요. 저도 유니온의 타격대에 있었던 몸, 유니온의 하위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아와 다름없는 아이들 중 각성의 조짐이 있는 애들을 거둬들여 수십년을 유니온에 충성하도록 교육을 시키며 육성한다. 당연히 유니온외의 존재는 그들에게 몰가치하다고 배우며, 성인이 되는 순간까지, 그 이후에도 끊임 없는 사상교육을 받는다.

그것이 유니온이 하위 이능력자들을 유니온의 말단으로 키우는 방식이었다.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김형준을 위해 유니온에서 등을 돌린 그녀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용모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큰 결심을 해주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동정을 받은 탓일까,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그녀의 눈매가 금세 투명하게 일렁였다.

"처음에는 명령 때문이었는데..."

김희선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유니온의 명에 의해 접근했던 김형준이었지만, 뻔한 3류 드라마처럼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품어버렸다. 그간 유니온의 명령체계 속에서만 살아왔던 그녀에게 있어 자유분방한 김형준의 성격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니. 그녀는 임무를 자연스럽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마음이 그에게 가니 자연히 그리 되었던 것인데, 그 뒤로 괴수의 출현과 김형준의 실종이 이어지며 그녀의 임무는 취소되어버렸다.

그것이 도리어 안달이 난 그녀는 그 뒤의 여러 사건 뒤에 지극 정성으로 김형준의 부모를 모시고 김형준과의 재회를 기다렸지만, 다시 만난 그의 곁에 자신의 자리는 없어보였단다. 시간이 흐르고 김형준이 검후 전지현과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김형준을 잊으려 했지만, 마침 검맥에서 정보를 요청해오는지라 선뜻 그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걸 지금 나보러 믿으라고? 막장 드라마 스토리를 읊어라 아주. 나는 이런 저런 스토리 같잖아서 드라마도 막장 드라마는 빼고 보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김도연은 끝까지 이죽거렸다. 용모가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런 눈초리에 기가 죽을 그녀였다면 미친개라는 별명까지 얻진 못했을 것이다.

"배신이 풍년이야 아주. 형준이 새끼만 불쌍하게 됐네."

계속된 이죽거림에 그녀를 무시하고 민용모가 김희선을 달랬다.

"일단 형준이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김희선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당장에 김도연이 방방 뛰었다.

"뭔 헛소리야! 형준이만 병신 만들려고?"

민용모가 쓴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하니 김도연이 금세 진정을 한다.

"그럼, 윤민아 팀장 일로 상심한 애한테 이거까지 말하리? 너 아주 줄줄이 배신당했다고?"

그 배신이라는 단어에 김희선이 다시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파묻었다.

============================ 작품 후기 배신의 비엔나 소세지! 줄줄이 엮어나옵니다 ㅎㅎㅎ많은 분들이 짐작하셨던 것처럼 김희선은 김형준에게 목적을 갖고 접근했었습죠. 독자분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고심하고 고심했지만, 그냥 원래 스토리로 갑니다. 껄껄.

오늘은 배신데이!

*주인공은 난생 처음 배신 당했어요. 하지만 내일 자고 일어나면 말끔하게 정신을 차리겠죠. 곁에 마눌님이 있기때문이에요. 마눌님은 남편의 멘탈을 철사장 단련하듯 만드는 힘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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