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유니온의 안가에서 벗어난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SUV차량에 탑승해 서둘러 부산을 빠져나갔다. 유니온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굳이 분란을 크게 키울 필요는 없으니까.5인승 차량이었던지라 용모는 운전석, 김도연은 조수석. 그리고 나는 뒷좌석에 민아와 희선씨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자리가 묘하게 불편해서 자꾸만 몸이 움찔 거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뭐해 전방을 주시하고 있자니, 자꾸만 용모와 눈이 마주쳤다.
"뭐 임마."
괜스레 무안해져서 그렇게 말하니 엉뚱한 김도연이 대꾸를 한다.
"아주 양손에 꽃이네. 김형준 오늘 계 탔어."
그 어조에 가득한 놀리는 기색 탓에 나는 헛기침만 내뱉었다. 가뜩이나 희선씨와의 감정 탓에 불편한 마당에 김도연의 말을 듣고나니 더욱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좀 괜찮아요?"
김도연이 답지 않게 다정한 어투로 희선씨에게 물었다.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능이 주는 피드백은 나도 잘 알고 있던지라 그녀를 살펴보다가 눈을 딱 마주쳐버렸다.
"네. 괜찮아요."
풀죽은 어조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오래 전에 있었던 그녀와의 교감이 이제는 무의미한 상황이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그녀를 하루 데리고 놀고 버린 남자일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괴수의 출현이니 이런 저런 일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감정이 희미해진 탓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 했지만,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행이네요. 덕분에 고운 처자 하나 구제했네요."
제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지껄여대는 김도연이지만 희선씨도, 나도 차마 웃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을 뿐이다. 그 미묘한 분위기에 김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지냈어요?"
어색하게 침묵이 내려앉은 분위기를 먼저 깨고 나선 것은 의외로 희선씨였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김도연이 또다시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가 용모의 눈치를 받고 영문을 몰라 한다.
"네. 희선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그 의례적인 안부인사에 그녀가 처량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 3년이란 시간만큼이나 서로의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함이 더 이상의 대화를 막아버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불편한 침묵 속에서 용모와 김도연만이 무언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찔끔해보였다.
"으음..."
품안에 안기다시피 한 민아가 차체의 흔들림에 작게 신음했다. 단정했던 단발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피딱지를 덕지 덕지 붙인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다.
희선씨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민아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녀는 유니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청해서 내부의 협력자가 된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막연한 정의감?
아닐 테지. 지현의 말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녀가 위험을 자초한 것은 나를 위해서였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망상이다. 망상.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차는 어느새 검맥의 성남지부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민아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린 게로군요."
복잡한 표정의 그녀, 지현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왠지 모르게 품안의 민아가 무거워진 기분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말투가 주눅이 들어있다.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 지현이 민아를 넘겨 받았다.
민아를 품에 안으며 그 갈기갈기 찢겨나간 본 그녀의 표정이 서릿발처럼 변했다. 자연 그녀의 눈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김도연이 들어올린 신은혜가 있다.
"금수만도 못한...."
그 말투가 어찌나 스산하던지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는지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안하는 김도연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아하하하. 안녕하십니까. 기체후일향만강하시죠? 검후님."
그 뜬금없는 인사가 자신을 향한 지현의 매서운 눈매 때문임은 분명한 사실, 하필 신은혜를 자신이 들쳐 맨 것을 다시 후회라도 하는 모양이다.
"일단 안으로."
신은혜의 꼴이나 민아의 꼴이나 헐벗은 것은 매한가지라 그녀가 사람들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검맥은 유니온과는 다르게 친목단체와 비슷한 조직이다. 성남의 지부라고 해봤자 그거 건물 하나를 얻어두고 유사시에 숙소로 사용하는 처지라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군가 있을 리가 없다.
텅빈 건물의 내부로 들어선 사람들이 제각각 어디론가 흩어졌다.
"잘 하셨습니다."
민아를 침대에 내려놓은 지현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그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자세한 사정은 이미 들었습니다. 정부와의 알력다툼에 그녀가 휘말려든 것이라지요."
그 의외로 차분한 말씨에 나는 적잖이 안심해버렸다. 가시방석과 다름이 없던
자리가 조금은 편안해졌다.
"사람이 일을 벌였으면 그 책임을 져야지요. 참으로 잘하신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고초가 심했을 텐데, 가여운지고..."
그녀가 자상하게 민아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애롭던지 나는 그만 감동해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 민아가 탐탁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그녀의 모습이 과연 그녀답다고 할까.
침대 속에 몸을 파묻은 민아의 표정이 그녀의 손길에 조금은 편안해진 것으로 보였다면 내 착각이려나.
몇 번인가 민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지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자애로운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냉기가 흐르는 얼굴을 해보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해결할 일이 남았으니,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시지요."
그 말에 찔끔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방안의 공기가 미치도록 무겁다. 누군가 불평을 할법한 분위기건만 그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다. 모두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가 마찬가지임에야 그 누가 불만을 토로할까.
휑한 실내의 한가운데에 신은혜가 의자에 묶인 채로 앉혀져 있다. 아직도 기절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그녀가 몸을 꿈틀거린다.
잠시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지현이 성큼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슥슥 휘저었다.
"으음..."
지현의 손길이 스쳐가자 정신을 잃고 있던 신은혜가 눈을 떴다.
"흐윽."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그녀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온다. 그리고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무력감이라도 느끼는지 온몸을 떨었다. 안가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나는 이미 그녀의 생명력을 상당부분 갈취했다. 지금의 몸으로 이능을 발현했다가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육체가 붕괴할 것이다. 그녀 역시 그런 점을 깨달았는지 절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살기 등등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반쯤 체념한 표정을 해보였다.
"비참하네."
그녀의 첫 한마디는 자조였다. 아무도 추슬러주지 않은 탓에 여전히 상반신은 나신이고 하반신 역시 민망한 꼴이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하나 동정하는 빛이 없으니 스스로 수치심을 느낀 듯 하다.
"자업자득이지."
그래도 지현의 앞이라고 말을 조심하는 김도연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 신은혜의 꼴은 자업자득이다. 그간 쌓아온 악행이 있으니 이런 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테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 물어봐. 빨리 대답하고 쉬고 싶군."
그 체념한 모습에 나는 분노했다.
"어디서 피해자인 척을 해!"
사납게 외치니 그녀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수십년을 강자로 군림하게 해온 이능이 사라진 탓에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듯 보였다. 내 사나운 위협에도 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피해자라. 그래. 어찌 됐건 간에 묻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그 모습이 묘하게 당당해보여, 나는 이를 악물었다. 끝에 가서 힘을 잃고 나니 이제야 자신의 처지가 보인 것일까.
"아. 내가 먼저 말할까?"
아무도 자신을 추궁하지 않자 오히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알아둘 것이 있는데, 윤민아 그녀는 분명한 배신자다."
여기까지 와서도 그 아집을 버리지 못했는지, 한결 같은 주장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분개했다.
"미친년..."
김도연이 지현의 눈치를 본답시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 심정이라 딱히 그녀에게 눈치를 주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겠지. 그 잘난 유니온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배신자겠지."
내가 앞으로 한발자국 나서며 말하니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멍청하구나. 하나 같이."
그 명백한 비웃음에 김도연이 다시 발작을 하려다가 지현의 제지로 입을 다물
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희 유니온이야말로, 이능력자 전체를 배신한 배신자들 아닌가?"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 탓에 오히려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킥. 멍청이들."
그 여전한 비웃음에 이를 가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유니온도 배신자고. 윤민아도 배신자야."
그 한결같은 논리에 뒤늦게 의아함을 느낀 나는 분노도 접어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지금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어."
손끝에서 불길한 가시를 뽑아내며 그녀에게 들이댔다.
"할머니처럼 쭈글쭈글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둬."
힘도 잃고 권력도 잃은 그녀였지만 그 가진 외모마져 잃기는 싫었는지 잔뜩 치켜 올라갔던 입꼬리를 바로 한다.
"내가 윤민아가 배신자라고 한 건 말이야."
그 심상치 않은 어조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킥. 이렇게 말하면 재미없지. 누구든 가서 윤민아의 오른쪽 가슴을 확인해봐."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본다.
"웬 개소리야!"
결국 참지 못한 김도연이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일단 확인해봐. 얘기는 그 뒤에 할 테니까."
난데없는 배짱에 의아함이 들었지만 나는 도연을 재촉했다.
"도연아. 가서 확인 해봐."
내 말에 궁시렁 거리긴 했지만 도연이 바로 방을 벗어났다.
"무슨 생각이지?"
도연이 자리를 벗어난 사이에 그렇게 물었지만 신은혜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다. 태연한 얼굴로 느긋하게 허리를 피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해졌다.
달칵.
방을 나섰던 도연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헬쓱해진 얼굴빛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대체 뭐가 있었길래 그래?"
이제껏 지켜보기만 했던 용모가 도연을 재촉하니, 그녀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황룡."
그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뜨는데 김도연이 말을 이었다.
"윤민아의 가슴에 황룡 문신이 있었어."
============================ 작품 후기 뚜둥! 윤민아의 정체!
아직까지는 하렘노선일지 아닐지 아무도 모릅니다. ㅎㅎㅎ오늘은 신작보다 내가 이능력자다 가 빨리 써지네요. 덕분에 한편 더 올립니다!
껄껄!
*오라전대 피스메이커라면 저도 일전에 재밌게 읽었던 소설입니다만 ㅎㅎ 그 작가님 같다는 말씀은? 제가 쫄쫄이 타이즈 매니아일 것 같다는 말씀이신겁니까!
*충격;;; 황룡은 일전의 김보성이란 유니온 간부의 폭주와 청소부 등장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