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희선씨?"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난 탓에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희선씨가 여기에는 왜..."
그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그 갑갑한 기분에 나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야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희선씨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그녀로부터 민아를 가리고 경계 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어두워진다.
"지금이라도 치료 안 하면, 흉 질 거예요."
그 어조가 어찌나 씁쓸하던지 왠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지만, 희선씨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일전에 나눴던 좋은 감정은 다 어디가고 이제 와서 남은 것은 불신과 의혹뿐이라니, 나도 마음이 편치 못한
건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망설이는 기분으로 민아를 품 안에 숨기고 있는데, 뒤늦게 따라 들어온 용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이번 일을 도운 내부의 동조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용모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희선씨를 바라봤다. 용모의 말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민아의 상처를 되짚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퍼져나온 청명한 빛무리가 민아의 온몸을 쓸고 지나가고, 흉측하게 부어올랐던 상처들이 이내 사라진다.
"악!"
그리고 익히 알고 있었던 희선씨가 감당해야 할 이능의 피드백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민아의 어깨만 그러쥐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용모가 그녀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는 내 심정이 실로 심란하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것은 비단, 이능의 피드백이 주는 격통 때문만은 아니리라.
"아..."
희선씨의 치료덕인지 풀려있던 민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거의 기대다시피 내 품에 안겨있던 그녀가 힘겹게 스스로를 일으키려 한다.
"그대로 있어. 뭘 미련을 떨고 그래."
그 모습이 어찌나 가련해보이는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겨 다시 품에 안았다. 품 안에서 희미하게 몸을 떨어대는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신은혜를 찾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게 저편에서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풍만한 젖가슴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드러낸 그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길래 저런 꼬락서니일까.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 하나. 그녀는 민아를 단지 심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만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전부터 묘하게 가학적인 면이 보이던 그녀였으니 어쩌면 심문을 핑계로 민아를 학대하는 것 자체가 그녀의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잠시지간 몸을 움찔했다.
"이건 유니온 내부의 행사다. 외부인인 당신이 끼어들만한 일이 아니야."
잔뜩 주눅이 들어서도 입을 놀려대는 꼴이 어찌나 보기 싫던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주둥이를 다물게 만들고 싶었다.
"유니온의 내부 행사? 웃기지 마."
짧게 응수하니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재차 나에게 항의했다.
"검맥과 유니온의 관계를 봤을 때, 이건 명백한 유니온에 대한 적대행..."
쾅!
여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김도연이 날린 부적 한 장이 굉음을 내며 신은혜의 발치에서 폭발했다.
"까고 있네. 지랄도 이정도면 풍년이다. 미친년아."
한동안 못 본 터라 잊고 있었지만, 김도연의 별명은 미친개, 내지는 미친년. 신은혜의 말이 그녀의 성질을 건드린 모양이다.
"뭐? 유니온의 내부 행사? 미친년. 이게 뭐하자는 행산데? 앙?"
그녀의 주변에 부적이 날아오르고 술식이 개방되어 빛무리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내부의 배신자를..."
짝!
기세에 눌린 신은혜가 변명을 내뱉는데 짝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아오! 낯짝 두꺼운 년 때리니까 내 손이 다 아프네."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신은혜가 멍한 얼굴로 김도연을 올려다 본다.
"야이 오라질 년아. 누가 너희들한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권리를 줬는데. 사람 위에 사람 있어? 미친년. 있어도 너희들은 아니야."
속사포같이 내뱉는 김도연의 욕설에 내 가슴까지 시원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듣는 당사자는 그렇지 않았는지 뒤늦게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짝!
"눈깔아! 이 시버럴 년아! 뭘 잘했다고 노려보긴 노려 봐!"
보는 내 입장에서야 시원하긴 하지만 2등급 이능력자로 알려진 신은혜와 지나치게 가까운 김도연의 모습이 조금은 위태위태 해보였다.
"미친년이 그간 배때지에 기름차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퉷!"
걸쭉하게 침까지 내뱉는 모습이 건달처럼 껄렁껄렁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폭언과 욕설에 신은혜가 모멸감을 느끼는지 온몸을 떨어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민아를 살펴보니 뒤늦게 긴장이 풀렸는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어있다. 워낙에 가벼운 그녀인지라 체중을 내게 실어도 별반 차이가 없는지라 이제야 그녀를 발견했다. 신은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니 그녀를 내려둘 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차가운 바닥밖에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그녀를 아예 안아 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그녀를 내려두기에는 그녀가 치른 고생이 너무나 컸다.
"눈에 독기 흐른 거 봐. 미친년아! 젖통이나 가려! 잔뜩 쳐져가지고 할머니 찌찌 같은 게. 어디서 흉물스럽게 젖통을 내놔. 내놓기를."
역시나 한번 입이 풀리니 김도연의 폭언은 멈출 생각을 안 한다.
"아오! 내가 그간 이년한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도연. 그만."
"응? 왜? 이제 시작인데?"
천연덕스럽게 내 말에 반문하는 모습이 태연하기만 하다. 역시 김도연은 김도연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그녀를 타일렀다.
"여기서 밤 샐 거 아니잖아?"
눈으로 품에서 잠이 든 민아를 가리키니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지미. 잠자는 숲속의 공주여, 뭐여."
말로는 불평하면서도 선뜻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고초가 심했을 민아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할 말이 있다면 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처럼 날이 서있다.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신은혜가 내 말에 몸을 떨었다.
"내가 왜 지금 참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줘."
지금도 내 품에 안겨있는 민아의 꼴을 보면 화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어쩌면 괜한 일에 휘말리게 만든 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일지도 모를 감정이 비겁하게도 신은혜를 향했다.
"그녀가 유출한 정보 탓에, 우리는 많은 부분을 정부에 양보해야 했.."
"그러니까 왜? 같은 이능력자잖아? 근데 왜 이능력자들의 누명을 벗기는데, 괴수와의 전투 동영상을 유출했는데, 그게 왜 당신들한테 해가 되지?"
그녀의 되도 않을 변명에 나는 다시 반문했다.
"유니온은 당시의 전투를 극비로 취급했고, 당연히 영상은 보안을 요하.."
"그러니까 왜냐고. 박 터지게 싸운 건 우린데 니들이 뭐라고 그 기록을 갖고 있냐고."
"..."
이제는 내심 짐작하고 있지만, 유니온과 정부 사이에 뭔가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간부라는 작자들이 괴수전에 코빼기도 안 비췄지.
"변명할 생각 말고, 나를 설득해 보라니까. 나 지금 정말 겨우 참고 있다고."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능의 힘을 발현했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바닥이 쩌저적 갈라지며 모래처럼 부스러진다. 발치에서 시작된 균열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다가 그녀의 지척에서 겨우 멈춰 섰다.
"마지막 기회야. 헛소리로 기회를 날리지 마."
한자 한자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신은혜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요.. 용서해줘. 다 잘못했다. 윤민아의 건은 없던 일로 할게."
아직도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지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대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더욱 차갑게 식어 내렸다. 권력자라는 것들은 원래 이런 놈들이었지. 지극히 자신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런 괴악한 습성이 있는 놈들이다. 지금의 신은혜 역시 자신의 처지는 깨닫지 못하고 되도 않을 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한다.
내 표정이 더욱 차가워지자 신은혜가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내 발치에 매달렸다.
"정보? 정보가 필요해? 내가 다 줄게."
흉물스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가슴이 내 허벅지 어림에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녀를 보니 마치 싸구려 창녀와 같은 표정으로 내 발에 자신의 몸을 비벼오는 모습이 비참해 보일 지경이다. 나는 혐오감에 진저리를 쳤다.
"원하는 건 다 말 해줄 테니까. 제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도도한 얼굴만큼이나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 세상 누구라도 눈 아래로 깔아보던 그녀의 지금과 같은 모습에 나는 입맛이 쓰다.
"형준아."
용모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왔다.
"알아. 손대지 않을 게. 이 여자가 필요하다는 거지?"
내 말에 용모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유니온까지 한번에 솎아낼 건덕지다. 아마 신은혜가 그 빌미를 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용모가 나를 만류했다.
"그.. 그래! 당신들한테 필요한 정보는 다 알려줄 수 있어!"
나와 용모의 대화에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에 대해 어필했다.
"가자. 너무 오래 있었어."
용모가 그런 신은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도연은 못 볼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걸쭉한 침을 내뱉었다.
나는 용모에게 알았노라고 말하고는 신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가슴을 드러내놓고 수치심도 없는지 내 발치에 몸을 비벼오던 그녀가 교활한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이런 여자는 언제고 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뱀 같은 여자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줄기 몇가닥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악! 뭐야! 약속이 틀리잖아!"
깜짝 놀라 고래 고래 악을 써대는 그녀를 무시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과연 2등급 이능력자라는 것이 그저 이름표만은 아니었는지 가늘게 이어진 줄기를 통해서 꽤나 거대한 생명력이 전해져왔다.
"야! 이년 기절했잖아!"
김도연이 사납게 불평했다. 뒤를 돌아보니 충격과 공포 탓에 의식을 잃었는지 신은혜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용모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가 옮기기엔 꼴이 좀 그래."
아닌게 아니라 상체는 젖가슴이 드러나있고 그나마 걸친 짧은 스커트 역시 잔뜩 말려올라가 민망한 검정 속옷이 그대로 보이는 모습이다. 용모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니 김도연이 다시 불평했다.
"아나. 내가 니들처럼 몸 쓰는 사람인줄 알아? 아오 빡쳐!"
입으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그녀가 신은혜를 들쳐 맸다. 아무리 그녀의 이능이 술법에 특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엄연한 이능력자, 여자 한명 들쳐 매는 것은 일도 아니다.
"뭘 먹고 살았길래 가슴이 이렇게 커? 에이. 걸리적거려. 무겁긴 또 더럽게 무겁네. 돼지 같은 년."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불평을 들으며 우리는 유니온의 안가를 나섰다.
============================ 작품 후기 간만에 정시 업뎃합니다! 당분간은 내가 이능력자다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겠습니다. 신작보다 글 쓰는데 배는 시간이 걸리는 지라 그간 조금 소홀해졌던 것이 사실이라 정신 바짝 차리고 페이스 올려보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코멘트는 늘 저에게 힘이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유부남 독자님들의 공감이 저를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군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