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24화 (124/223)

< --  2-4. 세계로...  -- >

차디 찬 기운이 윤민아의 온몸을 훑어갔다. 그 바람에 깊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정신이 단숨에 깨어났다.

"컥..."

콧구멍이며 입이며 할 것 없이 쏟아져 내린 물세례에 엉망으로 물을 받아들인 탓에,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토악질이라도 하듯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자. 꿀맛 같던 휴식은 끝.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농밀한 색기를 풀풀 풍기는 여인, 전 서울 지부장 신은혜의 말에 윤민아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뭘 그렇게 겁을 먹어. 어차피 너도 이렇게 될 거 각오했던 거 아냐?"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려 더 이상 손을 댈 곳도 없어 보이는 윤민아의 전신을 훑어내리는 그녀의 눈빛이 마치 뱀의 그것과도 같이 차갑기만 하다.

윤민아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퉤'하고 침을 뱉었다. 시뻘건 피가 태반인 그녀의 침이 신은혜의 발치에 떨어졌다.

"아직 기운이 남았나봐."

그녀가 어디선지 모르게 채찍을 꺼내들었다. 마치 살모사처럼 살아 움직이는 채찍의 끝에 정말로 뱀의 대가리가 붙어있다.

"그렇게 기운이 좋아서, 김형준이랑 붙어 먹었어?"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에 이어 윤민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

그 처절한 비명에 신은혜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 그런 소리를 낸 거야? 응?"

애초부터 윤민아가 정보를 넘긴 쪽이 김형준이 버티고 있는 검맥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다. 심문을 해봐야 나올 것은 하나도 없건만, 신은혜는 미친 사람처럼 채찍을 휘둘러댔다.

"잤어? 잤어? 잤지? 그지?"

윤민아는 비명과 신음성을 번갈아 질러대느라 그녀의 말에 대꾸할 틈도 없건만, 그녀는 맹렬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 날카로운 기세와 소리를 듣다보면 윤민아가 버티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지만, 신은혜는 절묘하게 치명상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심문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것. 그저 윤민아의 고통에 찬 신음에 도취된 것처럼 한참이나 채찍질을 해댄다.

"하아. 하아."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윤민아를 몰아붙였는지, 신은혜마저도 숨을 몰아쉰다.

단정했던 옷가지는 이미 넝마가 되어 드러나지 않은 부분보다는 드러난 부분이 더욱 많다. 새하얗던 피부는 시뻘건 상처로 가득하다. 한참을 숨을 몰아쉬던 신은혜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큭."

고개를 한계까지 제친 신은혜가 아직도 생기가 죽지 않은 윤민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제법이네. 책상 체질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이런 것도 잘 버티네. 킥."

심문을 하는 이의 진지함도, 집요함도 없다. 그저 신은혜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저열한 쾌락과 조롱 뿐. 윤민아의 눈동자에 표독스러움이 어렸다.

"그런 눈빛으로 봐봐야 너만 곤란할 텐데."

그녀가 허리춤에 감은 채찍을 꺼내 윤민아의 앞에서 장난스럽게 흔들어보였다. 그럴때마다 그 끝에 달린 뱀대가리라 쉭쉭거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것이 여간 끔찍한 것이 아니었던지라, 윤민아도 이때만큼은 질린 얼굴을 해보였다.

"그래. 훨씬 나아. 그런 얼굴 아주 좋아."

이에 만족한 신은혜가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치료해."

그녀가 한발자국 물러서며 말하자, 밀실의 구석진 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 한자락이 튀어나온다.

"너무 깨끗하게 말고,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 해."

지독스러운 말을 태연하게 지껄이는 신은혜의 말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도 질린 얼굴을 해보였다.

신은혜가 물러서자 이제껏 강단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윤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채찍이 한번 몸을 스쳐갈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생전 겪어보지 못했던 끔찍스러운 것, 악으로 버텼지만 금세 몸이 무너져 내린다.

철컹거리는 사슬이 그런 그녀를 마음껏 눕지도 못하게 양 팔을 붙잡고 있다.

새하얀 빛이 잠시 그녀의 몸을 스쳐가고 발갛게 부어올랐던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간신히 피만 멈추는 치료에 불과하지만 잠시나마 시원한 기분에 윤민아의 얼굴이 편안해진다.

"그만!"

표독스러운 음성에 그녀를 감싸고돌던 빛무리가 단숨에 사라져 버린다. 기분 좋은 청량감이 단숨에 날아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통증, 차라리 좀 전이 낳았어라고 생각한 윤민아가 흐릿한 눈을 움직여 자신을 치료한 이를 바라본다.

"미안해요."

들릴락 말락 그 작은 사과에 윤민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유니온의 하위 능력자들의 운명은 간부들의 장난에도 이리 저리 휩쓸리는 것. 눈앞의 치료계 이능력자 또한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윤민아를 치료한 이능력자가 다시 어둠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밀실의 하나뿐인 등 아래에 비쳐진 그녀의 꼴은 더욱 끔찍스럽다. 낭자했던 선혈이 사라지고, 뱀이 기어가듯 선명한 상처들만이 퉁퉁 부어 온몸이 괴물처럼 흉물스럽다.

고왔던 그녀의 자태는 이제 와서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다. 그저 그나마 온전한 얼굴만이 신은혜의 변덕이 미치지 않은 유일한 부분이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신은혜의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섬뜩하게 번들거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

진 채찍이 다시 허공을 가른다.

"바로 코앞에 있었네."

어둠을 의지해 몸을 숨긴 내가 그렇게 말하니 저쪽의 어둠에서 용모의 대꾸가 들려왔다.

"이러니 우리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지."

놀랍게도 유니온의 안가는 유니온의 부산지부 바로 맞은편의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저 구멍가게와 이런저런 상가건물들이 늘어선 건물이 유니온의 안가라니.

"이번에도 내부의 협력자 덕이라고 봐야 하나?"

내 말에 용모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너 생각보다 인망이 엄청 높았구나."

내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저쪽에서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해온다. 민아의 처지에 대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용모가 재주도 좋게 그녀의 소재지를 파악해왔다.

이번에도 내부의 동조자가 있었던 덕에 생각보다 조용하게 일 처리가 가능 할 것 같다.

"대단하신 용모."

또다시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은밀함이 요구되는 임무에서 나는 입을 쉴세 없이 놀려댔지만, 용모도 그리고 어둠에 은신하고 있던 어느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안가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아직 건물에 들어서지도 않았건만, 희미한 피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그것이 부디 민아의 피가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돌입시기를 기다렸다.

"셋, 둘, 하나. 들어간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심정으로 타이머만 확인하고 있던 나는 소리내어 작전의 시작을 알리고는 바로 어둠에서 뛰쳐나왔다.

"헉!"

안가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경계를 서고 있던 두명의 이능력자가 순식간에 내 손아귀에 잡혀 무력화됐다.

"급하기는. 내가 처리하기로 했잖아."

목줄기를 세게 틀어잡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던 두명의 이능력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내 곁에 다가선 김도연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나는 그 두명의 이능력자를 그림자 속으로 숨겼다.

"가자."

오랜만에 만난 김도연이지만 임무가 임무니만큼 나는 별다른 반가움도 표하지 못한 채 유니온의 안가로 돌입했다. 바깥의 이능력자들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안가 자체가 발견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인지. 안가의 경계는 허술하기만 했다.

꾸불 꾸불한 복도를 통해 한참을 달려가는데, 희미하던 피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피냄새에 섞인 비명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복도의 끝에 다다른 나는 그 막다른 길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이런 건 원래 비밀 통로가 있..."

김도연이 다가서 벽의 한구석을 손으로 더듬는 사이 나는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잠시 뿌연 먼지가 앞을 가리고 김도연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먼지! 이 미친놈아!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렇..."

그녀가 작전에 합류한 것은 허준영에게 배운 몇가지 술법을 이용해 은밀함을 더하기 위했던 것, 자신의 합류 자체를 무색하게 만드는 나의 행동에 그녀가 불만을 토하다가 말을 멈췄다.

"뭐야!"

몇 번인가 보았던 신은혜 서울 전 지부장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민아의 모습.

방금 전 내 주먹질에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단하나의 실내등이 어지럽게 방의 내부를 비춰준다. 그 흔들리는 노란 불빛 아래 드러난 민아의 모습, 넝마가 되어버린 옷가지가 차라리 옷을 안 입은 모습만도 못하다. 엉망으로 찢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온통 파랗고 붉다.

"이런 개 같은 년..."

잇새를 뚫고 튀어 나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살기를 가득 머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상의를 벗은 채 그 커다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던 신은혜 지부장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분노로 이가 덜컥거렸다. 온몸이 떨려오고 통제불능의 기운이 내 몸 바깥으로 넘실대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건 유니온의 내부의 행.... 컥.."

그 가증스러운 입을 놀려대는 서울 지부장년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그 오만

하던 얼굴에 고통이 가득 떠오르고, 간악한 주둥이에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김형준 미친 새끼야!"

김도연의 새된 비명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목이 비틀린 서울 지부장의 얼굴을 뒤늦게 발견하고 나는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악!"

비명과 기침을 번갈아 하는 그년에게 나는 한자 한자 씹어뱉듯이 경고했다.

"함부로 움직이면, 그 잘난 몸뚱이를 미라로 만들어 줄 테니 그렇게 알아."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나는 부리나케 민아에게 달려갔다. 넝마가 되어버린 몸뚱이를 하고도 도도한 눈빛으로 왜 왔냐는 눈빛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멍청한 짓을 해서..."

나와 정부의 파워게임에 휘말려 지금의 꼴이 된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실로 복잡했다.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모진 꼴을 당하리

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유니온이라면 본보기로 처형을 할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고문까지 받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왜 왔어..."

결국은 그녀가 그 한마디를 내뱉고야 만다. 그 한결같은 모습에 나는 울지도 결국은 그녀가 그 한마디를 내뱉고야 만다. 그 한결같은 모습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큰 부상은 없어. 흉이야 지겠지만, 누가 중간 중간 치료를 해준 모양인데?"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는 그녀의 양손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힘으로 끊어버렸다. 힘없이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부축하고 쟈켓을 벗어 차라리 걸치지 않으니만 못한 꼬락서니의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숨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전부터 내 신경을 건드리는 기운이 묘하게 익숙해 사납게 경고했다. 그리고 밀실의 그림자 속에서 주춤거리며 나타난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형준씨..."

============================ 작품 후기 벌충분입니다. 원래는 오늘처럼 순위가 멸망한 날은 올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지만, 어차피 봐주실 분들은 봐주실 테니 그냥 올립니다.

제가 노블에 연재하는 이유는 용돈벌이를 겸해서이기도 하지만, 제 글을 즐겁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덕에 신바람이 나서거든요. 내일 올릴까 오늘 올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휴재에 대한 벌충이라 생각하고 올립니다.

이런 제가 사랑스럽지 않으십니까? 비록 시커먼 서른 두짤 중년이지만 저를 어여삐 봐주소서.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이 받아주는 곳은 마눌님밖에 없는 저를 살아 숨쉬게 합... 어쨌건 여기 한편 더 올리고 마눌님이 저를 연행해가지 않는 한 비축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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