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음. 쉬운 놈이 하나도 없네."
한참 자료를 뒤적거리던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니, 용모가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자료가 뭔지는 알지?"
용모의 말에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지. 1등급 몬스터들 자료잖아."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용모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걸 아는 놈이 그딴 소리를 해? 1등급 몬스터가 쉬운 상대면, 세상이 이 난리가 났겠어?"
나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 용모에게 도리어 핀잔을 줬다.
"아니까 하는 소리야. 그래도 그중에서 나랑 상성이 맞을만한 놈을 찾아야 하
는데, 지금 추려온 자료에는 그런 놈이 보이질 않아서 말이지."
용모는 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그래도 지금 가져온 것들은 그나마 약체라고 평가 받는 놈들이야. 미국의 '드래곤'이나, 일본의 '야마타노오로치' 같은 경우는 '천개의 눈동자'랑 최소 동급이라더라."
한참을 자료를 들추어봐도 별 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나 같이 상대하기 버거운 놈들이라 한숨부터가 나왔다.
"천천히 심사숙고 해. 어차피 한번 결정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용모의 말에 나는 기지개를 펴고는 몸을 일으켰다. 용모가 멀뚱 멀뚱 나를 쳐다보다가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해?"
"잠깐 쉬었다 하자. 하도 봤더니 그놈이 그놈 같아서."
아닌 게 아니라 A4용지로 수백장은 되는 자료를 읽고 또 읽어봤더니 머리가 지끈 거렸다. 온몸을 뒤틀며 죽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지현이 차를 내왔다.
"잠깐 쉬시는 겝니까."
"네. 쉬었다 해야죠. 어차피 단번에 정할 만큼 쉬운 문제도 아니고, 이번에 의뢰 받아들인다고 공표하면 빼도 박도 못 하잖아요."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놓은 자료를 쳐다보며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엄살을 피웠다. 지금 나와 용모는 다음에 수행할 1등급 몬스터의 퇴치의뢰를 추리는 중이었다. 용모가 추린다고 추려서 자료를 가져왔지만, 그 양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자료의 주인공들도 터무니없었다. 그나마 용모가 추려온 자료가 6개국에 나타난 몬스터 정도였는데, 루마니아는 지역 전체가 무덤이 되었고 그리스는 도시가 미로가 됐단다. 다른 나라 역시 도시가 물에 잠기거나 불에 타오르거나. 보면 볼수록 이게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 싶을 지경이었다.
"흠. 이번에는 혼자 못 가십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여.. 연아는요?"
"연아는 수현이 그 아이가 봐주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가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반긴단 말인가. 아무리 그녀가 검후라 불리는 강자라고 하더라도 나 역시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일전의 사건으로 본신의 능력이 아직도 온전치 않은 상태. 막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녀가 다시 내 입을 막는다.
"다시는 혼자 보내드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 기억 하십니까."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나는 결국 생각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멀린과의 전투 이후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녀는 다짐했다고 한다. 다시는 나를 전장에 홀로 내보내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쓸만한 아이들로 몇 추려놓을 테니 그리 아시지요."
진즉부터 생각을 해두었던 모양인지 그녀가 말이 거침 없었다. 용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합류에 긍정적인 기색이었다.
하긴 템플러의 원탁위원회를 뒤집을 때 곁에 있었던 용모의 말에 의하면 다시 예전의 위용을 찾은 것 같았다고 하니,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합류가 반가울 만도 했다.
"얌마. 너도 혼자 가는 것 보다는 덜 위험하지. 네 마누라 이전에 무려 '검후'시다."
그래도 얼굴 좀 익혔다고 그녀 앞에서 가볍게 주둥이를 놀리는 꼴이 얄밉게 그지없었다. 네놈도 나중에 내 마음을 알 날이 올 거다.
어쨌건 그녀의 결심이 워낙에 확고한데다가 이성적으로 반박할 근거가 없어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차를 드시지요. 시장하실까봐 요깃거리를 준비 중이니 준비가 되는 데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자리를 뜨자 나는 용모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왜 임마!"
"자식아 너도 나중에 결혼해봐. 그때 가서 뒤늦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말
고."
용모도 아예 내 속을 모르는 건 아닌지 꽤나 세게 얻어맞고도 별달리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입만 삐죽인다. 커다란 덩치에 입을 밉살맞게 쭉 빼는 모습이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입에서 절로 불만이 튀어 나왔다.
"어유. 이걸 친구라고."
"그래도 너 혼자 가서 잘못 되는 거 보다는 나을 거 아냐. 전에도 검후께서 같이 가셨으면 너도 좀 덜 고생했을 테고.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임마."
머리통을 얻어맞고도 속도 없이 나를 걱정해주는 그의 말에 괜스레 나는 주먹을 들어보였다.
"어차피 너도 데리고 갈 거야."
"나는 왜! 내가 너처럼 괴물인 줄 알아?"
내 말에 용모가 과장되게 울상을 지었다.
"웃기지 마. 대한민국 이능력자 중에 너를 안 데려가면 누구를 데려가리? 너는 내가 저승 갈 때도 손 꼭 붙잡고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재수 없는 소리 하기는. 가기 전에 밀린 일이나 더 해야겠네. 너도 그만 쳐 쉬
고 자료나 더 봐. 이게 빨리 결정이 돼야 나도 검맥 일을 좀 보지."
익살스럽게 겁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용모의 눈은 빠르게 자료들을 훑어갔다.
"이번 목적지는 그리스입니다."
간단한 한마디였을 뿐이었지만 기자들은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녹음기를 쭉 내밀며 소리치는 모습이 꼭 창고방출 세일 마감 임박에 달려드는 아줌마들 같은 모습이다.
"그리스라면 역시 '미노타우르스'가 목표인 겁니까!"
개중 똘망똘망한 목소리의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이번 목표는 그리스의 1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입니다."
플래쉬가 정신없이 번쩍이고 기자들이 질문을 한다고 난리들이다. 몇 번이나 받아본 플래쉬 세례였지만 어지간히 정신없고 눈이 아픈 게 아직도 난 질색이다.
"다른 나라의 1등급 몬스터도 많은데 하필 그리스를 택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리스 정부의 제안 중에 특별한 것이 있는겁니까?"
그 와중에 질문을 하나 잡아 대답했다.
"다른 것보다는 성공확률을 계산했습니다. 그 외의 부가적인 사항은 일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지난 그렌델도 1등급 몬스터들 중 약체로 평가 받았던 바 있었고, 이번에도 개중 만만한 놈을 골랐다니 기자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바쁘다.
"상황의 위급성이나, 피해자, 희생자 역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조금은 민감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잠시 질문을 한 기자를 쳐다봤다. 내 진지한 눈빛을 마주 한 기자가 몸을 움찔 거렸다.
"질문을 한 의도가 뭐지요? 어떤 대답이 듣고 싶은 겁니까?"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이쯤에서 한번쯤은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난 그렌델의 퇴치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었다죠? 자국의 국민들을 나 몰라라 하고 타국의 물질공세에 넘어갔다고."
그렇게 운을 띄우니 기자회견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일전에 자극적인 기사를 내 쏟는답시고 당시에 펜대를 안 굴린 기자가 여기에 한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럼 묻고 싶군요. 대한민국의 이능력자인 제가 타국의 막강한 괴수와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라도 하기를 바라신 겁니까? 그러길 바라셨다면 실망하셨겠군요. 저는 앞으로도 승산이 없는 전투는 하지 않을 셈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은 기자회견장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저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한민국의 이능력자입니다. 대한민국이 '멸망을 지켜보는 눈'으로부터 신음하고 있는 지금 헛되게 목숨을 버리고 싶은 생각 따위
전혀 없습니다."
가만히 나를 주시하고 있는 기자들을 하나 하나 눈을 마주쳤다. 내 시선과 마주 친 이들은 어떤 이는 찔끔해서 눈을 피했고, 또 어떤 이는 기대, 혹은 설레임이 가득찬 눈동자로 나를 마주 보았다.
"제가 1등급 몬스터와의 전투를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오직 하납니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그들에게 입을 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경험을 쌓아 일산의 괴수를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자들이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기사를 타이핑해 전송하기 시작했다.
"일전의 대 괴수전에서 대한민국의 유니온을 비롯한 이능력자들이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까운 인재들이 희생되고 무수한 생명이 덧없이 사라졌지요. 저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족한 힘과 경험을 먼저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 최종적인 목표는 대한민국의 일산에 웅크리고 있는 '천개의 눈동자' 또는 '멸망을 지켜보는 눈'
입니다."
한자 한자 또박 또박 말하니 기자들이 다시 질문 세례를 던져댔다.
"일전의 전투라면 이능력자들이 변절하여 군부의 작전을 방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김형준씨는 그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항간에 떠도는 군부의 공작설이 음모론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이제까지의 소란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기자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지금 정면으로 국가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간 이능력자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 바빴던 군부와 정부. 유니온이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꽤나 많은 수의 이능력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지?
그간은 힘이 없어서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나는 분개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외쳤다. 억지로 만들어낸 표정이었지만 기세를 섞었으니 기자들이 보기에는 내가 제법 화가 난 것으로 보이리라.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 중 어느 누구도 배신 행위는 하지 않았으며, 저희는 최선을 다해 괴수와 싸웠습니다. 수백의 참전자 중 불과 서른명도 살아 돌아가
지 못할 만큼 처참했던 전투입니다. 그 숭고한 희생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간 잠잠했던 이능력자들 탓에 군부는 모든 것이 그대로 무마가 될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건 당신들만의 생각이란 말이지.
내가 활동반경을 넓히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면 한번쯤은 집고 넘어갔어야 할 문제였다. 게다가 그날 희생된 수많은 이능력자들은 나와 같은 처지의 이들.
지금이라도 그 오명을 씻어주어야 한다.
"김형준씨! 한마디만 더 해주십시오!"
아우성을 치는 기자들을 뒤로 하고 나는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용모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김형준씨가 대답하지 않은 부분은 제가 대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용모가 그렇게 말하며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용모가 기자들을 상대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본의 아니게 하루 휴재를 했습니다. 신작은 세편이나 써서 올렸는데 정작 이능력자는 업뎃을 못했군요. 하지만 이능력자를 소홀이 한 것은 절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일전에 소개되었던 베오울프, 그렌델, 아서등의 에피소드처럼 차후의 에피소드들은 각국의 전설과 신화 속의 인물들을 등장시킬 예정입니다. 그런 고로 자료 조사와 여러가지 요소들을 구상하고 정리하다보니 글을 쓰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분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편은 그리스의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입니다! 미로 속에서 벌이는 피 터지는 전투 기대 해주십시오!
*하렘에 관한 설문조사는 계속해서 진행하겠습니다. 극렬하게 반대하시는 분들이 꽤 계시니만큼 차후의 스토리에 거부감이 없으시도록 천천히 내용을 구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렘으로 갈지 안갈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김형준의 활약이 계속됩니다!
*신작 '도살자 - 이토록 멋진 세상'이 어제 처음으로 10위까지 올랐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ㅎㅎㅎ 함 봐주세요! 내가 이능력자다와는 정반대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