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 세계로... -- >
"이제껏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전투가 있다면,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매 전투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제가 1등급이 아니었을 때, 그 무렵에는 특히 더 힘들었던 것 같네요. 혹시 기억하실까 모르겠는데, 일전에 방송으로 나간 용아병과의 전투가 있는데요."
김형준의 말에 여성 진행자가 아는 척을 했다.
"아! 기억나죠! 안 그래도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된 영상인데요. 그때 안타깝게도 이능력자분들중에 사상자가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저는 4등급의 이능력자였습니다. 함께 전투를 한 이능력자들도 전부 저보다 아랫단계의 이능력자들이었는데, 용아병을 만나다니 끔찍했거든요."
그때의 일이 떠오른 모양인지 그가 넌더리를 쳤다.
"용아병은 이제는 3등급에 책정됐지만, 당시에는 4등급 몬스터로 구분된 몬스터였는데, 그게 저희들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하필 촬영 나갔던 일반인들이 잔뜩 있었고요?"
솜씨 좋게 말을 받으며 김형준이 이야기를 풀어놓게 도와주는 여성 진행자의 모습에 대화가 물 흐르듯 매끄럽다.
"네. 교전수칙에 따르면 바로 퇴각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저도 영상 봤는데 정말 상황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렇죠. 우리 공격은 안 먹히는데 용아병의 공격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니 상대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정말 끝이구나 했었죠. 동료들도 참 많이도 희생됐어요."
당시를 회상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 그를 카메라 한 대가 클로즈업한다.
"이야. 이거 그림 나온다."
'스타를 모십니다!'
프로그램의 PD 강용석이 감탄을 한다.
"그러게요. 이거 방송 나가면 대박이겠는데요?"
곁에 있던 촬영스텝이 덩달아 감탄성을 토해냈다. 그들은 세계 유일의 1등급 몬스터 사냥꾼 김형준과 함께 하는 방송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몇 번인가 다른 이능력자들이 출연한 방송들이 있었지만, 뭔가 다른 세계를 산 탓인지 진행이 매끄럽지 않아 기대 미만의 시청률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능력자고, 거기에 더해 잘생기고 말도 잘해. 타고 났네. 타고 났어."
피디의 말에 스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닌 게 아니라 김형준은 마치 경험 많은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능숙하게 진행자와 함께 쇼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일산에 '멸망을 지켜보는 눈'이 나타났을 때, 제가 군인들과 안개 속에서 고립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말 다 포기 했었어요. 구조대는 안 오지, 아군의 수는 자꾸만 줄어가고."
"두달이 넘는 시간동안을 조난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마지막으로 귀환한 생존자들 무리에 있으셨었다죠?"
여성진행자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한 모양인지 그의 말을 막힘없이 받아쳤다.
"두달이요? 예전에는 정보통제 때문에 말씀 못 드렸는데, 이젠 말해도 뭐 상관없겠죠. 안개 속은 좀 이상했어요. 현실감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이상했고. 뭔
가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달까요. 물론 악몽이죠. 쉴 틈도 없이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으니까요. 나중에 가서는 동료의 시체와 몬스터들의 시체들 사이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할 지경이었어요. 저희는 그 안에서 꼬박 1년은 보낸 거 같은데 나와 보니까 고작 두달이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김형준의 말에 PD의 얼굴이 밝아졌다.
"야! 이거 최초다! 한번도 방송 안탄 내용이야. 지희씨한테 싸인 보내. 좀 더 끌어내보라고 해!"
그가 그렇게 말하니 스텝들 중 한명이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더니 여성 진행자, 인기 연기자인 안지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겠어요? 시청자분들도 많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텝들 탓에 말을 멈췄던 김형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에요. 사람들은 우리가 그 안개 속에서 두달을 있었다고 하는데, 저희가 느끼기에는 1년이 넘었거든요. 아무리 시간감각이 망가졌다고 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안개에 뭔가 있다는 거죠."
안지희가 그의 말에 감탄했다. 세계적인 인재 김형준이 방송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자료를 진즉에 찾아본 그녀였다. 4등급의 평범한 이능력자로 시작한 그는 온갖 사지를 뚫고 2등급의 이능력자가 되었고, 마침내 세계 유일의 1등급 몬스터 사냥꾼이 되었다. 그 영화와도 같은 인생사에 매료된 그녀는 그날부로 그의 팬이 되었는데, 지금 그 팬심이 발동한 듯 상기된 얼굴그녀는 그날부로 그의 팬이 되었는데, 지금 그 팬심이 발동한 듯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야. 잘하면 우리 지희씨. 방송 끝나고 스캔들 나겠다."
"그러게요. 얼굴이 완전 사랑에 빠진 소년데요, 소녀. 저 사람 세계적인 애처가로 유명한데. 불쌍한 지희씨."
스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간에 김형준은 계속해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풀어냈다. 그렇게 한참을 질답을 주고 받다보니 어느사이엔가 촬영분을 전부 만든 모양이다. PD의 사인이 나오자 안지희가 김형준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으셨죠?"
성숙한 외모와는 달리 짐짓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자신에게 묻는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지희씨 덕분에 잘 할 수 있었네요. 저 잘한 거 맞죠?"
넉살좋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안지희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완전 잘하셨어요. 아마 이 방송 나가면 난리 날 거예요!"
그녀의 호들갑에 미소를 짓고 있던 김형준에게 스텝들이 차례로 다가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해준다. 인사를 하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게 뭔가 했더니 안지희가 풉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싸인 좀 해주세요!"
그녀가 말하고 나니 그제야 스텝들이 앞 다투어 싸인을 요청했다. 그러고보니 하나씩 종이와 펜을 쥐고 있는 것이 뒤늦게 김형준의 눈에 들어왔다. 어떤 이는 종이에 어떤 이는 티셔츠에 싸인을 받아갔는데, 안지희는 싸인 뿐 아니라 사진도 같이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자,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방송 촬영을 모두 끝낸 김형준이 세트장에서 빠져나가자 스텝들이 이곳 저곳에서 그에게 받은 싸인을 펼쳐들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방송밥 20년 넘게 먹었는데, 애들 봐라. 아주 아이돌 만난 소녀팬 다 됐네. 일 안해? 집에 안 갈 거야?"
강용석 PD의 말에 멍하니 김형준의 싸인을 바라보고 있던 스텝들이 화들짝 놀라 세트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그렌델이 퇴치된 후로, 벌써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간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일산에 웅크리고 있는 괴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의 몬스터 소탕이 일어났다. 김형준을 비롯한 강자들이 대거 포함된 이능력자들이 그간 몬스터들에게 빼앗겼던 지역들을 차례로 탈환해, 이제는 일산과 서울의 서쪽부근을 제외하고는 몬스터 구경을 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 와중에 김형준을 비롯한 이능력자들에 대한 인식이 대폭 좋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은 국민들은, 비록 몬스터들의 체액과 악취 따위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자신의 집에 절망했지만 이능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
지 않았다.
그렇게 몬스터를 정리한 대한민국은 유니온과 비유니온 이능력자들의 구분 없이 검맥의 아래 모여들었다. 유니온이 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부렸지만,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김형준에 의해 부산지부가 박살이 났을 뿐이다.
또한 전승이 끊겼다고 생각했던 각종 단체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허준영이 이끄는 '도맥'뿐만 아니라 '비맥'과 '궁맥'의 이름을 업은 이능력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제 와서는 유니온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선도의 뒤를 잇기를 표방하는 무리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이능력자 시대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변화는 대한민국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각국에서 1등급 몬스터에 대한 소탕작전과 견제 작전이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었다. 실패에 불과할 지라도 정보가 모이고 경험이 쌓이면 언젠가는 그들도 성공할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는 영국의 '그렌델'을 퇴치하는데 성공한 김형준의 주가는 내려오지 않으리라.
"어이구 우리 연아! 어이쿠! 넘어진다! 넘어진다! 넘어져!"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연아의 모습에 나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연아가 뒤뚱거리며 나에게 달려오는 탓이었다.
"압빠! 압빠!"
그 발음이 어찌나 귀엽던지 연아를 훌쩍 안아 볼을 마구 비벼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요리라도 하고 있던 모양인지 지현이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우아! 뭐 맛있는 거 하나봐요! 나 배고파요!"
괜히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호들갑을 떠니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렌델을 퇴치하고도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연아는 세 살이 되었고,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간 미친사람처럼 대한민국의 몬스터를 박멸하기 위해 날뛰었고, 그 덕에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몬스터의 위협이 덜한 국가가 되었다. 아직 일산의 괴수가 있었지만 놈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렌델을 퇴치한 후에 자신감을 얻어 괴수에게 도전해볼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멀찌감치서 바라본 모습만으로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힘을 얻은 나라도 도저히 도전할 생각이 들지 않는 존재감에 나는 괴수와의 리매치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저런 놈이 1등급 몬스터라니 그렌델과 비교하기도 미안한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저 비맥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일산부근에 자리를 잡고 괴수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힘을 모아 괴수를 처치할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번엔 어딘데요?"
"중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일단 당신이 부재중이라고 말하긴 했는데 꽤 집요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1등급 이능력자이자 유일하게 1등급 몬스터를 퇴치하는 데 성공한 내 주가는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덕분에 각국의 단체에서 의뢰를 빙자한 영입제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이번엔 중국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다.
"음. 중국은 별론데. 그냥 거절하지 그랬어요."
아직까지 영국을 제외한 의뢰는 수락한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에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도 내팽겨치고는 타국부터 도와준 내 행동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지라, 우리나라를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한 탓이었다. 물론 비난 때문에 벌인 일은 아니었고 그저 나와 그녀, 연아가 살아갈 곳이라 내친김에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런 비난을 한 사람들은 전부 반사회적 발언을 한 사람들로 간주되어 벌금을 물거나 했으니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말투가 집요한 것이 괜스레 척을 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리 했습니다. 그리 말하시니 다음에는 제대로 거절을 하지요."
그녀가 내 밥그릇에 반찬을 얹어주며 말했다.
"뭐, 그런 생각이라면야."
그렇게 말하며 밥을 한수저에 입에 넣고는 꼭꼭 씹었다. 안그래도 좋았던 그녀의 요리실력이 요즘 들어 더욱 향상됐다. 덕분에 밥을 먹는 즐거움이 배가 되어 이제는 살이 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물론 이능력자인 내가 비만이 되는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녀가 차를 내온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어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드디어 결심이 서신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됐고, 일전에 흡수한 힘도 이제 내 몸에 완전히 안정되어 자리를 잡았다.
이제 때가 온 것이다. 또 다시 1등급 몬스터와의 전투를 치러야 할 때가.
============================ 작품 후기 새로운 에피소드 시작합니다!
더욱 강해지고 더욱 빠릿빠릿해진 주인공이 이제 드디어 깽판을.... 그리고 완결은 당분간은 생각 안하고 쭈욱 갑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쿠폰 투척이 어제 많았더라고요. 덕분에 마눌님에게 사랑을 받아 어제 연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