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16화 (116/223)

<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국에서의 일들을 마무리 지은 우리는 영국정부의 전세기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세기에 탑승했다.

잠시 공항에서 지현이 싸들고 온 기다란 보퉁이 탓에 소란이 있었지만, 영국 정부의 배려로 큰 탈 없이 전세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보퉁이에 쌓인 물건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녀는 그런 것도 개의치 않았을 만큼 그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선물받은 모양새라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더니, 금세 얼굴을 붉혔다.

"무.. 무인에게 좋은 검은 좋은 벗과 다름이 없습니다."

드물게 변명조로 말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저 '엑스칼리버'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날 내가 병상에서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아서는 부리나케 달려와 가장 먼

저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스터 킴 덕분에 멀린과 귀네비어가 편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드릴 것은 없고, 이 엑스칼리버가 마스터 킴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게 생명의 빛과 이런 저런 일로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는 자신의 검을 내게 내밀었다. 이미 일전의 시도로 엑스칼리버가 내게 맞지 않음을 깨달은 탓에 사양하려 했지만 그의 말에 의해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소드 엠프레스께 격이 맞는 무기가 될 것이니, 부디 사양치 마십시오.'

그렇게 받아낸 엑스칼리버는 그녀의 손에 쥐어지자마자 그 형태가 바뀌었다. 서양의 롱소드에 가깝던 모양이 그녀의 손에서 모양을 바꾸더니, 나중에 가서는 그녀가 사용하던 장군검과 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모습이 바뀐 '엑스칼리버'는 지금 보퉁이에 싸인 채 그녀의 품에 고이 안겨 있었다.

"뭐, 이번 일로 당신이나 나나 얻은 게 있긴 하네요."

나는 멀린과의 힘겨루기에서 당당히 승리를 했다. 미처 내 이능을 파악하지 못한 멀린이 어설프게도 금단의 마법이라는 에너지 드레인을 시도한 것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꼼짝없이 그 검은 안개에 당했겠지만, 나 역시 생명력을 매개체로 다루는 이능력자. 게다가 멀린이 재수가 없었던 것이, 힘겨루기는 1:1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가시찔레 꽃'과 '겨우살이의 가지'가 있었으니까.

무려 한달이 넘는 시간을 혼수상태에 빠져있긴 했었지만 덕분에 나는 강대한 힘을 손에 얻었다. 게다가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수작질을 부리려던 템플러의 행동 탓에, 보수 역시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받았다.

무려 9천억원. 그렌델의 퇴치보상금과, 멀린의 퇴치보상금. 거기에 더해 아서 팬드래건의 치료대금. 그 모든 것이 맞물려 9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보상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이루었다.

솔직히 아서의 치료는 나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었고. 그저 막연하게 흡혈목을 이용해 그렌델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면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을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전투가 끝나고 나니 흡혈목에 붉은 열매가 열렸는데 그걸 흡수한 아서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악재가 겹치고 겹쳐 나에게는 호재로 돌아왔다. 덩달아 아서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내가 취한 이득이 훨씬 막대했다.

돈과 힘, 그리고 엑스칼리버, 템플러의 전폭적인 지원.

얘기를 들어보니 그 간달프란 노인네가 보통 음흉한 게 아니었지만, 제 자리로 복귀한 아서와 베오울프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퉁이를 끌어안은 그녀가 잠에 빠져든 것이 보였다. 여전히 소중하게 엑스칼리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찰칵, 찰칵, 찰칵.

공항의 게이트를 빠져나온 나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플래쉬 세례에 어안이 벙벙했다. 게이트를 가득 채운 인파의 사이 사이에 낯 간지러운 문구가 새겨진 피켓이 가득했다.

'대한민국의 힘! 김형준!'

'사랑해요! 형준 오빠!'

'피바라기가 갑이다!'

온갖 유치하면서도 민망한 문구들 사이에 기자들이 연신 플래쉬를 터트리고 있었다. 보안요원들이 왜 그렇게 많이 달라붙었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

조금은 당황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기자들이 질문 세례를 던졌다.

"김형준씨! 의식을 잃고 있으셨다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계 최초로 1등급 몬스터를 퇴치하셨는데 소감이 어떻게 되십니까!"

고래고래 악을 쓰며 녹음기 따위를 내미는 기자들의 손이 당장이라도 나를 찌를 듯 했다.

"비켜주십시오. 회복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보안요원들이 거칠게 기자를 밀쳐내며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번 일로 이능력자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는데, 개인적인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보안요원의 제지에 속절없이 물러나면서도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의 모습이 워낙에 맹렬해서 질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얼떨떨한 기분으로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한 채 보안요원을 따라 공항을 빠져나왔는데, 바깥까지 기자와 사람들로 인산인해의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삼 격세지감을 느껴 그들을 바라보다가 보안요원의 안내를 따라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탑승했다.

차량에 탑승하니 하루 빠른 항공기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있던 용모가 운전석에서 내게 인사했다.

"완전히 스타 되셨네?"

용모의 말에 나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거들먹거렸다.

"내가 이래봬도 1등급 이능력자 아니냐. 이런 정도야 기본 아냐?"

그렇게 너스레를 떠니 용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딱 봐도 저도 놀랐기만 당연하긴 개뿔이."

그 격의 없는 농담에 그저 웃어보였다.

"너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국은 난리도 아니었나보더라. 그간 영국정부나 우리나라 정부나 곤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영국은 음모론에 시달렸고, 우리나라는 이능력자들을 너무 박대한 거 아니냐고 여론이 퍼져나가서 말이지."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용모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소식을 들으며 성남시의 내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저 멀리에서 수현씨와 연아, 그리고 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준!"

도도도거리는 발걸음으로 내게 달려온 현지가 내 품에 안겨들었다. 그저 이름만 불러대며 내 가슴팍에 볼을 부비적거리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서 나는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돌아오셨네요."

품에 안고 있던 연아를 지현에게 건네준 수현씨가 내게 인사했다.

품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를 않는 현지 탓에 내게 손짓하며 웃어보이는 연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 안본사이에 뭔가 엄청 자란 느낌의 연아다.

"다들 잘 지냈죠?"

내 말에 그녀가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현이 연아를 품에 안고 달래고, 현지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러댄다. 용모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장거리 운전이랍시고 피곤하다 투덜거리고, 수현씨는 그런 용모에게 핀잔을 준다.

정겨운 나의 집.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우아. 어떻게 된 게 쉴 틈이 없네요."

침대에 몸을 내던지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말에 지현이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만큼 당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인게죠."

그녀의 말에 나는 중요한 사람 두 번 되면 사람 잡겠네, 라고 투덜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 돌아왔다고 좋아할 틈도 없이 나는 하루 종일 방문자와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의 인사들과, 유니온의 인사들. 무슨 말이라도 맞춘 모양인지 동시에 집에 들이닥친 그들은 한참이나 내게 환영인사를 전하다가 사라졌다. 일전과는 딴판으로 바짝 숙인 고개를 보는 마음이 다시 한 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저자세에 나중에 가서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에 죄라도 지은 것처럼 사과를 하고 쫓겨간 이들 다음에 나를 괴롭힌 것은 온갖 전화였다.

이미 사람이 다녀간 정부와 유니온은 말할 것도 없고, 지인들의 전화까지. 한

국에 도착한 이후로 전화만 하루종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님 어머님께는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희가 너무 했었나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그간 정신이 없었지 않았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래서 자식 키워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덕분에 한참을 잔소리를 들어야했었지만.

"으아아아.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한 느낌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침대를 이리저리 뒹구니 그녀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올랐다.

"피곤하실텐데 이제 그만 쉬시지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쉬긴요. 일로 와봐요."

그렇게 장난을 치니 그녀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일단 저는 씻고 오겠습니다."

잔뜩 당황해서 욕실로 도망치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여전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방에서 홀로 침대를 뒹굴던 나는 문득 영국에서의 일을 되씹어보았다.

그렌델을 퇴치하고, 멀린을 소멸시켰다. 그리고 넘치는 힘을 얻어 다시 한 번 껍질을 벗었으며 미스틸테인과 엑스칼리버를 얻었다. 그 도중에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힘이 없었다면 이렇게 모든 일이 좋게 마무리가 되었을까.

간달프를 비롯한 템플러들의 괘씸한 작태가 새삼 떠올라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그간 스스로를 나태하다 꾸짖으면서도 깨닫지 못 했던 나의 과오들.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의식을 찾은 순간 가장 먼저 보인 수척해진 지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자책하고 자책했다.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굳이 템플러들과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을 테고, 그녀가 나를 그렇게 걱정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김형준아. 김형준아.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내 힘을 남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리라.

그녀가 말한 힘과 자리에 걸 맞는 정신, 할 수만 있다면 흉내라도 내보일 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어내며 그녀가 들어섰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나는 표정을 바꾸며 헤벌쭉 웃어보였다.

"당신 새애앵각!"

============================ 작품 후기

영국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많이 생략이 되긴 했지만 주인공은 멀린의 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크게 성숙하게 됐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말씀하신 힘에 걸맞는 존재로 거듭나 진정한 1등급 이능력자의 행보는 이제 시작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 아마도요;;)*150화를 완결로 생각하던 차라 30화 정도면 이미 던진 떡밥들을 회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독자분들의 말씀을 듣고 완결을 늦추는 방향으로 생각을 많이 고쳤습니다.

기존에 뿌린 떡밥이나 그런 것을 회수하면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당분간은 더 스토리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