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몽롱한 와중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귀를 때려댄다.
여기가 어디지?
마치 허공을 떠다니는 기이한 부유감이 온몸을 이리저리 밀어낸다. 눈을 떠보려고 해도 눈꺼풀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저 미칠 듯이 고막을 때려대는 쿵쾅대는 심장소리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떻게 된 걸까.
눈앞에 사자의 갈기처럼 머리가 뻗어나간 남자가 보인다. 그 곁에 무표정한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 보인다. 또 그들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카메라의 영상처럼 온통 뿌옇기만 한 세상 속에서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전날 밤 진탕 술이라도 마시고 새벽에 갈증에 일어난 상태와 비슷한 붕뜬 기분이 온몸을 휘어감는다.
아서?
망가진 영사기의 화면처럼 흐릿하고 탁하기만 했던 사물들이 조금씩 분간이 가기 시작한다. 아서와 귀네비어...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형체가 점점 선명해진다.
번쩍 번쩍 빛나는 금빛 해골,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시커먼 어둠만이 존재한다. 온갖무늬가 수놓이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는 존재.
멀린... 멀린... 멀린?
온몸에 느껴지는 열기가 한순간 솟구친다. 지독하게 현실감 없던 신체가 그 열기의 흐름에 따라 하나 하나 깨어난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그 끔찍스러운 고통에 의식이 선명해진다.
'훌륭해! 너라면 내 영생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멀린이 턱을 덜컥거린다.
'닥쳐! 이 변태 같은 해골바가지야!'
'네놈의 생명이 다채롭게 빛을 발하는구나.'
'시끄럽다니까!'
'이제 넌 나와 함께 영생을 사는 것이다!'
멀린의 앙상한 손가락 끝에 쥐어진 지팡이가 검은 기운을 뭉클뭉클거리며 쏟아낸다. 그에 저항하듯 검붉은 가시덤불이 줄기를 뻗어나간다.
불길하고 불결한 두 개의 기운이 서로 맞닿는다.
'뭐지? 네놈 무슨 짓을 한 거야!'
'빨대는 너만 꽃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지루하게 두 기운이 서로를 미러내는 힘겨루기를 한다.
'아.. 안돼에에에!'
'크윽!'
멀린의 머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기운이 담배연기처럼 흩어져간다.
'네놈만은 내가! 네놈만은 내가!'
'우아! 여유 있으신가 봐! 말 더럽게 많으시네!'
검은 기운이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붉은 가시덤불이 빠르게 시들어간다.
'네놈만 날뛰기냐!'
바짝 시들어 부스러질 듯 말라가던 가시덤불이 검은 안개 속에서 꿀렁댄다. 바싹 말랐던 줄기에 통통하게 살이 차오르고 꽃봉우리가 활짝 펼쳐진다. '끄아아아아아아!'
맞은 편의 가시덤불을 밀어내던 검은 안개가 허리부터 뚝 끊어지고 온 사방에 검붉은 줄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뭔가에 꽉 막히기라도 한 듯 비명은 턱 끝에서 사라지고 흘러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뿐이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기 위한 과정이 쉽지는 않을 터, 탈태와 환골이 이뤄지고 있으나 그 여력이 만만치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니, 깨어나셨을 때 어떤 모습일지 실로 기대가 되는구나!'
'그럼 마스터 킴이 혼수상태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렇소. 무슨 기연을 얻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분은 지금 스스로의 힘을 몸에 받아들이기 위해 휴면에 빠진 것이오.'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누구지? 뭘까. 이 그리운 기분은?
'역시 마스터 킴의 아내 분 다우시군요. 저는 몇주나 마스터 킴을 살펴봤지만 도무지 알수 없었던 사실입니다.'
요 근래 지겹게 들었던 음성이다. 아서 팬드래건인가?
'저희가 힘을 쌓아온 방식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내면을 관조하고 기운을 다스리는 수련을 하다보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의 기운을 살펴볼 수도 있소.'
고운 미성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엄이 느껴지는 음성. 나의 사랑하는 그녀, 지현의 음성이다.
'그저 이제부터 기다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일인 게요.'
그녀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지만 도무지 입이 열리지를 않는다.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와중에도 온몸을 흐르는 격류가 되어 요동을 치던 열기가 더욱 거세어진다.
선명했던 의식이 다시 흐릿해져간다.
'어서 돌아오세요. 제발...'
그녀의 간절한 말이 꿈결처럼 아련해진다.
"마스터 킴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서 팬드래건은 오늘도 김형준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더 큰 힘을 갈무리 하기 위한 신체의 적응기간이라는데 그는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스터 킴의 그녀인 소드 엠프레스가 이곳에 온지도 어느새 이주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얼마 전에 한번 발작이 있긴 하셨소만, 큰 탈 없이 지내고 계시오."
검후 전지현의 대답에 아서 팬드래건의 시선이 병상의 아래 위를 훑어간다. 확실히 처음보다는 혈색이 좋아지고 많이 안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말대로 깨어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그 녀석들이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검후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왔었소. 바로 쫓아 보내긴 했소만."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아서 팬드래건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어리석은 놈들, 한 치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 앞의 이득만 쫓다가 가장 척을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척을 졌구나. 그의 표정이 더 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 죄송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셔도 된다 하지 않았소. 그저 내 눈에 탐탁치않을 뿐이니, 크게 개의치 마시오. 어차피 나는 곧 떠날 사람이 아니오. 나보다는 그대의 식구들을 다독여주시오."
그녀의 말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곧 떠날 사람이라. 타국의 1등급 이능력자들을 언제까지고 붙잡아둘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 오랜시간을 잡아두고 싶은 심정이다. 벌써부터 떠날 채비를 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 킴이 깨어나면 다시 뵙고 사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에서는 템플러의 대표이자 1등급 템플러인 자신이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는 불평이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힘이 있으면 어떻고 대표면 어떤가.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를 하는 당연한 일조차도 체면을 대입하여 고개가 뻣뻣해진 이들. 어찌 보면 자신의 자식들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처음 각성 했을 때부터 이제까지 쭉 그가 돌봐온 이들이 어느새 그렇게 검게 때가 타버렸다.
마스터 킴의 상태를 알렸을 때 위원회의 표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 아서는 혀를 찼다. 저렇게 후회할 짓을 왜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저들은 나름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들. 뭔가 저들만의 생각이 있었겠지 하고 더는 질책하지 않았다.
이미 소드 엠프레스의 엄벌로 제 다리로 멀쩡히 걷는 이들이 없었으니,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인 그의 입장에서는 일견 가슴이 아프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차도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병실을 나서는 아서 팬드래건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그가 떠나고 난 병실, 검후는 김형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더 탈태를 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벌써 몇
주간이나 깨어나지 않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렇게 애 태우시깁니까."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간절하기만 하다.
"얼마나 강해지시려고 하시는 겝니까.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2주간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살핀 그의 상태는 언제 깨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몸속에서 흐르던 미처 소화하지 못했던 기운들도 이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지금은 그저 이따금씩 온몸을 떨며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 다였다.
그것이 제 몸으로 흡수하고 난 기운의 찌꺼기를 뱉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그저 한결같이 그를 지켜볼 뿐이다.
강팍하게 패인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야 언제까지고 깨어날 때까지 그와 함께 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만약 이번주 내로 그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민용모에게 그를 맡기고 한국으로 떠나야 할 성 싶었다.
다른 바쁜 일은 없지만 연아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온 터라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그리 편하지 않은 그녀였다.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진다. 이런 상태의 김형준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지만, 어쩌랴 한 남자의 아내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어미이기도 한 것을.
애틋한 손길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새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뺨에 닿았던 손을 마주 잡아주는 손길에 검후의 눈이 뿌옇게 바랬다.
"나 일어났어요."
참으로 바보같은 말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그렇게 마음을 졸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고운 뺨에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오래 기다렸죠?"
바보같이 헤실거리며 지어보이는 얼굴에 그녀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흑... 흑..."
그녀의 눈가를 그의 손길이 스쳐간다.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내도 눈가는 여전히 축축하기만 하다.
"왜..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나오는 말이라고는 고작 그 한마디였다. 말을 내뱉고도 이게 아닌데 싶었다. 기다렸다고, 깨어나셔서 기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게요 너무 늦었죠?"
제 속도 모르고 바보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작품 후기 늦잠자는 바람에 글을 늦게 썼습니다. 업데이트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여건만 대면 연참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전편에 달아주신 코멘트중 천오백년 가까이 살아온 아서가 모르는 걸 어떻게 검후는 단박에 알아차리시냐고 하셨는데,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아서는 외적으로 발휘되는 힘에 치중해온 존재고, 검후는 그보다는 짧은 시간아서는 외적으로 발휘되는 힘에 치중해온 존재고, 검후는 그보다는 짧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내적 수련과 선도를 닦던 인물이죠. 특성이 달라 그런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될듯합니다.
*완결에 관한 사항은 제가 사실 글 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 글쟁이라 장편으로 가면 제대로 마무리 지을 자신이 없습니다. 5권만 해도 이미 제 능력 이상의 분량인데, 우려되는 바가 너무 많아서요. 일단 독자분들의 의견대로 완결을 늦추는 방향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내용이 준비된 건 많은데 훗날의 에피소드로 남겨두려고 했는데 그 에피소드들을 엮어 분량이 나올지 궁리해보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