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김형준의 어깨가 뒤로 쳐졌다가 배는 빠르게 앞으로 내쏘아졌다. 대기가 찢겨나가고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렌델의 비명.
"키악!"
얼굴을 가린 거인의 양손이 그대로 미스틸테인에 꿰어졌다. 공격을 한 김형준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깜짝 놀라 미스틸테인을 보니 그 본체에 돋아난 새싹들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겨우살이의 가지. 생명력의 상징이라더니 김형준의 힘과 무시무시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모양이다.
어쨌건 얼떨떨하게 그렌델을 쳐다보다가 살짝 뒤로 물러나는데 템플러들이 여기 저기서 뛰쳐 나왔다.
"이제 맏겠습니다!"
대경한 그가 말리려 했지만 템플러들은 거침없이 그렌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마 기회가 오면 살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 지금이 기회로 보인 모양이다. 신호를 따로 주기로 했었건만 생각해보니 거인의 양팔이 꿰뚫린 지금만큼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개미때처럼 달라붙어 그렌델을 몰아붙이는 템플러들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라 지금이라도 기회를 살려야 할 것 같았다.
김형준이 손을 내뻗고 복잡하게 이리 저리 휘젓는다. 그의 손에서 내뻗어진 붉은 줄기가 이내 가시덤불 숲이 되고 점점 커져가고 있다. 한참을 김형준이 붉은 줄기들을 이리 저리 꼬아가며 힘을 들이 부었다. 영역을 넓혀가던 가시덤불 숲은 어느 순간 자라지 않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높다랗게 솟구쳤다.
그렇게 김형준이 그렌델을 공격하기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템플러들은 신나게 그렌델을 두들기고 있었다. 양손이 미스틸테인에 봉인된 탓인지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템플러들의 공격에도 그저 웅크리고 있을 뿐인 거인, 사람들의 사기가 솟구쳤다.
어쩌면 하는 생각이 조금씩 템플러들의 사이로 퍼져나갔다. 이대로라면 마스터 킴의 마무리가 없더라도 자신들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무리가 아닌 것이 템플러들이 쏘아댄 검격과 불덩이, 얼음덩어리, 벼락 따위에 이리 저리 베이고, 데이고, 얼려지고, 지져지는 그렌델의 모습이 순식간에 처참하게 변한 탓이다.
거인의 입을 통해 쉴 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오고 템플러들은 한층 더 가열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의 요청은 그저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 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그들이 전력을 다 하게 하고 있었다. 저대로라면 시간을 끄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템플러들의 공격이 과열되고 조금씩 그렌델의 몸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겉가죽을 베는 얕은 상처였지만 놈의 몸에서 피가 보이자 템플러들의 공격이 점점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맹렬해진다.
그 순간 비명을 마구 질러대던 그렌델이 입을 닫았다. 아기 울음소리와도 같은 울부짖음만큼이나 칭얼거리던 놈의 입이 악다물어지고 미스틸테인에 꽂힌 양손이 벌어진다.
"킥..."
어마어마한 통증 탓에 가뜩이나 흉측하던 거인의 얼굴이 더욱 끔찍하게 일그러지고 으드득 거리는 이가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온다. 하지만 미스틸테인에 꿰인 양손에 가려진 탓에 그 얼굴을 보고 경각심을 갖는 템플러는 없다.
김형준은 멀찌감치서 그런 광경을 조금은 질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견제가 아니라 자살공격이다. 그렌델이 마음만 먹으면 템플러들이 몰살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경고를 하자니 지금의 자신은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놈의 이목을 끌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어금니를 꽉 물고 그저 힘을 모으는데 집중했다.
사방 몇십미터는 되는 가시덤불의 숲에 솟아오른 한그루 거대한 나무, 섬뜩한 사방 몇십미터는 되는 가시덤불의 숲에 솟아오른 한그루 거대한 나무, 섬뜩한 붉은 줄기와 가지들이 조금씩 거대해져가고 있다. 그리고 높게 솟구치는 그 가지만큼이나 영역을 확장하는 거목의 뿌리들이 흉물스럽게 꾸물거리며 사방으로 뻗쳐가고 있었다.
"끄아아악!"
처음으로 템플러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템플러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미스틸테인에 꿰뚫린 손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 그렌델이 손을 뻗어 자신을 공격한 템플러를 움켜쥔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갑주채로 우그러진 그 이름도 모를 템플러의 몸에서 마치 육즙처럼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광기에 전염이라도 된 듯 템플러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비록 그 공격이 거죽에 입는 얕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사명이라도 되는 듯 베어내고 찌르고 자신의 온 힘을 동원해 그렌델을 공격했다.
하지만 비록 한손 뿐이지만 미스틸테인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렌델의 공격은 끔찍했다. 순식간에 거인의 손아귀에 잡히거나 이리저리 치이는 인원이 늘어난다. 막 그 숫자가 열다섯을 넘어가자 템플러들은 처음으로 뭔가 잘못 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자신들이 남긴 상처가 피부에 난 생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샘!"
막 검 끝에 잔뜩 불꽃을 모아 그렌델을 베어가던 프로도는 자신의 친우 샘이 거인의 손아귀에 잡히자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어 거인의 손등을 베었지만 거인은 요지부동이었다. 높이 날아올랐던 몸이 떨어지며 멀어지는 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짙게 어렸다.
"키헤에엑!"
그때 터져나오는 그렌델의 비명소리. 템플러들이 공격을 시작한 이후 가장 커다란 비명소리에 광기에 전염되었던 템플러들의 정신이 깨어난다.
"이 멍청한 놈들아! 견제하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화를 돋구라더냐!"
거대한 전투망치를 든 베오울프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의 전투망치가 그렌델의 손등을 꿰뚫은채 덜렁거리는 미스틸테인의 줄기를 후려쳤다. 가뜩이나 고통 탓에 한손을 빼내는 것도 힘들었던 그렌델의 얼굴에 끔찍한 고통이 떠올랐다.
"캭! 캭!"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 저리 날뛰는 게 1등급 몬스터 답지 않게 촐싹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정맞은 발구름에도 템플러들은 이리 저리 채이기 일쑤였다.
"우리 임무는 거인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야! 지금부터 우리는 마스터 킴에게 시간을 벌어준다!"
베오울프의 고함소리에 자신들의 행태를 깨달은 템플러들의 얼굴에 자책이 떠올랐다. 순간 1등급 몬스터의 목을 베는 공명에 사로잡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원탁의 기사들 중 태반이 시체조차 건지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남아있는 이들 역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베오울프는 자신 역시 분위기에 휩쓸렸던 전적이 있는지라 더는 질책하지 못하
고 원탁의 기사들을 재정비하여 그렌델을 상대하기 시작했다.40명에 달하던 인원이 어느 사이에 20명도 채 남지 않았던 탓에 그렌델의 공격에 이리 저리 끌려다녔지만 견제에만 전념했던 덕에 더 이상의 희생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의 실책이 안타깝기만 한 베오울프였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남은 인원을 추슬렀다.
그렇게 템플러들이 스스로의 안위를 지켜가며 그렌델을 견제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반대로 그렌델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한참 자신을 귀찮게 하는 난장이들을 이리 저리 걷어차던 거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늪지대는 완전한 자신만의 영역이라 모르는 것이 없건만, 저 나무는 본 적도 없는 나무다. 크기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겨 10미터에 달하는 자신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고, 그 가지 하나 하나가 그의 몸통만큼이나 거대했다. 거기에 더해 온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뿌리들이 벌써 사방 수백미터는 뒤덮은 듯 했다.
하지만 그렌델을 정말 신경 쓰이게 하는 건 겉으로 드러난 크기나 그 섬뜩한 붉은 빛깔이 아니라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였다.
늪지대는 그의 생명의 원천이자 온전한 자신의 영역이다. 늪 속으로 가라앉은
수없이 많은 난장이들이 그의 힘이 되고 생명력이 되고 있는 마당에 이질적인 존재가 끼어든 것이다.
저 거대한 나무는 그렌델 자신이 받았어야 할 생명력을 빨아먹고 자란 존재다. 자신의 것을 빼앗은 거목의 존재에 거인은 무한한 적개심을 느꼈다.
그렌델은 발치에 치이는 난장이들을 무시하고 거대한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인의 성의 없는 공격을 피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베오울프는 거인이 이동을 시작하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거인이 움직이는 방향에는 마스터 킴이 있었다.
"놈이 마스터 킴에게 간다!"
그렇게 고함을 치며 거인의 걸음을 방해해보려고 하지만 놈은 베오울프를 비롯한 템플러들의 공격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김형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시각 김형준은 엄청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통제를 통해 무럭 무럭 자라던 나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 급작스러운 성장속도에 놀라 힘을 거두려고 했지만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생명력의 흐름을 잡은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본신의 생명력을 뺏기지 않도록 통제를 찾으니 나중에 가서는 어디서 흡수한 생명력인지 저 혼자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가시찔레 꽃과 그의 이능이 맞물려 만들어낸 거대한 나무, 생명력을 원천으로 자란 흡혈목이 끊임없이 성장한다. 늪지대 아래 가라앉아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게걸스럽게 빨아먹고 또 빨아먹는다.
점점 커져가는 그 몸집에 늪지대의 원주인이 분노했다.
"키에에에엑!"
성큼 성큼 걷던 걸음이 어느 사이엔가 달리고 있다. 템플러들은 그 기세에 질려 그저 거인을 뒤쫓을 뿐 감히 그 길을 막거나 속도를 줄여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거목의 뿌리에 다다른 그렌델이 사납게 바닥의 뿌리들을 파헤친다. 자신의 허리만큼이나 두꺼운 뿌리를 잡아 뜯고 이리 저리 내팽겨친다.
뒤늦게 그렌델의 접근을 알아챈 김형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거목이 거인을 맞이했다.
10미터는 넘는 거인의 몸을 더욱 거대한 뿌리가 휘감는다. 분노한 거인이 그 뿌리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기지만 사방에 가득찬 뿌리들은 쉼 없이 거인에게 달려든다. 온몸으로 뿌리들을 짓밟고 잡아 뜯고 저항하던 거인의 모습이 조금씩 뿌리에 가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사방을 둘러싼 뿌리들이 거인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었다.
히 뒤덮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괴성만이 거인이 아직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올 뿐이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베오울프를 비롯한 원탁의 기사들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늘까지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와 끔찍한 거인의 전투. 마치 신화 속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날고 기는 이능력자들이라고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모습에 그만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거인을 옭아매는 거대한 나무를 만들어낸 마스터 킴의 존재에 경이로움마저 느낄 지경이다.
이제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성질 급한 어느 기사가 거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선다.
"물러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김형준의 급박한 경고가 터져 나오고, 이제 막 거목의 뿌리 인근에 다다렀던 기사가 멈춰섰다.
"?"
의아한 표정의 그의 눈앞을 거대한 그림자가 덮었다. 소리 없이 다가서서 그의 지척까지 이르른 거목의 뿌리가 무엇에 막히기라도 한 듯 이리 저리 몸을 뒤틀고 있다.
"통제가 힘들어요!"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에 상황을 파악한 템플러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간신히 흡혈목의 공격에 템플러가 희생되는 것을 막은 김형준은 온 힘을 다해 통제를 되찾는데 집중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렌델이라는 강적을 만나 한결 수월하게 그의 통제가 먹혀든다.
온 사방에 퍼진 뿌리를 통해 주변의 상황이 머릿속에 지도 그려지듯 그려진다. 뿌리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렌델은 아직도 치열하게 거목과 싸우고 있었다. 무려 1등급에 달하는 몬스터가 그가 창조해낸 나무 한그루를 어쩌지 못해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일산의 괴수와는 다르게 압도적인 면모를 보이지 못하는 그렌델이다. 같은 1등급 몬스터라도 그 급수가 차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김형준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잡생각을 하느라 약해진 통제 탓에 흡혈목이 또다시 영역을 넓히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흡혈목의 모든 신경을 그렌델에게로 돌렸다.
그 순간 이리 저리 거목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던 그렌델이 변화했다. 몸을 웅크린 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보였던 거인의 온몸이 부풀어오른다. 손등을 파고들었던 미스틸테인이 밀려나오고 온몸을 휘감았던 흡혈목의 뿌리와 줄기들이 투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
============================ 작품 후기
늦잠잤습니다. 일어나보니 한국시간 새벽 1시네요. 부리나케 한편 써서 업데이트 합니다. 일단 지적해주신 부분들 충분히 생각하고 있사오며 일간 시간이 날때 대대적인 수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 글을 쓰시는 분이 계시다면 아시겠지만 조아라의 시스템상 글쟁이가 자기 글을 돌아보거나 퇴고할 시간을 갖는다는 게 굉장히 힘든 시스템이라서 말입니다.
특히 노블 같은 경우에는 1일 1연재 원칙이 기본적으로 고수되어야 하니, 제가 이능력물을 연재 시작한지 이제 네달동안 책으로 네권 가까운 분량을 쓴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부분이 눈에 보이고 지적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포기 마시고 계속해서 말씀해주시면 언젠가 꼭 수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님들의 피드백은 개똥같은 이 글도 향기가 나는 글이 되는 밑거름이 됩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