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진즉부터 느껴오던 존재감. 일전에도 한번 겪었던 거대한 존재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그렌델의 거체, 차라리 작은 동산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집채만한 크기에 흉물스러운 녹색피부, 그리고 듬성듬성한 머리털. 보기만 해도 흉측한 그렌델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일행을 등지고 잠을 자는 놈 탓에 얼굴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이미 드러난 모습까지만 해도 충분히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인지 피바라기의 붉은 갑옷이 어느 사이엔가 온 몸을 둘러싸고 있다. 그 묵직한 감촉에 조금이지만 긴장이 옅어지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신호하면 바로 백업을 부탁드립니다. 그때까지는 대기하고 있으시기를..."
내 말에 원탁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베오울프 역시 그들을 따라 몸을 날리고, 간달프만이 내 뒤에 남아 있다가 한마디를 남기고는 몸을 숨긴다.
"부디 행운이 있기를."
그렇게 간달프 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렌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생명력을 끌어모으느라 그 속도가 더디기만 했다.
기운을 모으면서도 간절히 원했다. 이 한방이 그렌델에게 어느 정도 타격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일전에 허준영과 지현 그녀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런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생명력의 창을 길게 뽑아내었다.
붉게 빛나는 불길한 창을 손끝에 쥐고 나는 계속해서 힘을 모으고 모았다.
그리고 그 창의 길이가 내 키의 두 배는 자랐을 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던질지 아니면 힘을 더욱 모을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렌델이 눈치 채기 전에 기습을 하기로 결정하고 창을 조준했다.
"키히이이?"
그 순간 나는 내 몸만큼이나 커다란 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언제 몸을 돌렸는지 누렇고 탁한 놈의 눈동자가 끔벅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기운을 모으는데 너무 집중했다!
"크악!"
나는 비명과도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힘차게 창을 내질렀다. 귀청을 내찢는 굉음과 그렌델의 괴성이 터져 나온 것은 동시였다.
"키헤에에엑!"
놈은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가 우는 듯한 괴성을 내지르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렌델과 눈이 마주 친 순간 놈이 몸을 일으킬 것을 예상
하고 내쏜 붉은 궤적이 허공을 가르고 그렌델에게 꽂혔다.
폭음도 없었고, 그 어떤 요란스러움도 없었다. 내가 공들여 모은 붉은 창은 놈의 손아귀에 잡혀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을 뿐이다.
"젠장. 뭐 하나 쉬운 게 없어."
공들인 공격이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자 불평이 절로 나왔다.
그렌델은 잠시 자신의 손아귀에 쥔 창을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금세 질렸는지 저 멀리 내던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방향이라는 것이 이름도 모르는 원탁의 기사들 중 한명이 숨어있던 위치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피해!"
하지만 내 경고에도 불과하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원탁의 기사가 그대로 붉은 창에 꿰인다. 꼬치 꿰이듯 창에 꿰뚫린 기사의 몸이 저 멀리까지 날아가 볼품없이 늪지대에 쳐 박히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그렇게 그렌델과의 전투는 시작부터 어그러져버렸다.
프로도는 늪의 한켠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굉음이 귀를 찢고 섬광이 눈을 멀게 한다. 수시로 터져 나오는 에너지의 폭풍과 어마어마한 생명력의 격돌.
감히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힘든 엄청난 전투였다.
"저런 놈하고 우리가 싸우려고 했었단 말인가?"
질린 기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니 곁에 있던 그의 동료 샘이 그의 말을 받았다.
"미쳤었군."
그 음성에 가득한 것이 차라리 자괴감에 가까웠다.
거대한 체구의 거인이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온다. 그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주먹이 내질러질 때마다 온 세상이 몸을 떤다. 그 걸음마다 땅이 울리고 몸짓 하나 하나가 압도적이다.
"하룻강아지였군. 우리."
타국에서 날아온 1등급 이능력자를 보았을 때, 어쩌면 자신들이 힘을 합치면 그와 비슷한 전력이지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그런 마스터 킴이 자신들을 애송이 취급했을 때, 그는 자신이 분노했던 것이 차라리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단지 기세만으로 원탁의 기사들 모두를 바닥에 내동댕이 친 그에게 자존심을 세워봐야 무얼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마스터 킴은 경이로울 정도로 그렌델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렌델의 주먹을 피하고, 방망이를 흘린다. 여의치 않을 땐 믿기지 않게도 마주 공격을 내질러 놈의 공격을 상쇄한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그렌델을 맞아 그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맹렬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
붉은 선이 사방에 수없이 수놓아지고 거인을 옭아맨다. 수백가닥이 거인의 손
끊기고 다시 수천가닥이 거인을 옭아맸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검이 사납게 거인을 찔러간다. 물론 아무리 두들겨봐야 거인이 상처를 입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의 검이 몸을 때려댈 때마다 움찔거리는 기색이 아예 타격이 없는 모양은 아니다.
"제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 프로도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이래서야 정작 기회가 왔을 때 자신들이 저 끔찍한 놈을 잡아둘 수나 있을지 걱정이 든다.
그렇게 베오울프와 간달프를 비롯한 원탁의 기사들이 김형준의 전투를 보고 한참 질려있을 때, 김형준 역시 속으로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괴수와는 다르지만 그렌델 역시 1등급 몬스터라는 이름에 걸 맞는 놈이었다. 공들여 뽑아낸 가시찔레 꽃의 줄기는 뽑아내기가 무섭게 가닥가닥 끊겨 사라졌고, 필사적으로 내지른 검격은 단지 놈을 움찔거리게 할 뿐이었다. 공격을 할 때마다 단단한 벽이라도 후려치는 것 같아 차라리 답답할 지경이었다.
조금 더 힘을 모아서 공격을 해야지 싶었지만 수시로 짓쳐드는 그렌델의 공격
에 잠시도 짬을 내기가 힘들었다. 진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힘들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최악이다. 조금은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자신의 어떤 기술도 놈의 움직임을 움츠러들게 할 수 없었다.
반대로 자신은 놈의 공격 하나하나에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오고 가고 있으니 반대로 자신은 놈의 공격 하나하나에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오고 가고 있으니 죽을 맛이 아니라면 이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그렌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잡힐 듯 안 잡히는 조그만 녀석의 공격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 조그만 놈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공격을 곧잘 피하고 어떨 때는 마주 공격해오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놀랍게도 자신의 손이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키헤에에에엑!"
그 탓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그렌델의 입에서 기괴한 괴성이 길게 뽑아져 나왔다.
잠시 그렌델이 고함을 치는 사이에 몸을 뒤로 물린 김형준은 빠르게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야 몇날 며칠을 싸워도 기회는 오지 않는다. 조금 더 공격의 강도를 올려야 한다. 어쩌다가 성공한 공격이 놈의 사지 중 한 곳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만이라도 된다면 그 뒤는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다.
한손에 쥐었던 붉은 검을 흐트러트리곤 그는 품에서 조그만 나뭇가지를 꺼냈다.'겨우살이의 가지, 미스틸테인'그것이 이 볼품없는 나뭇가지의 이름이다. 템플러들의 보고에서 찾아낸 초라한 나뭇가지는 놀랍게도 전설의 무구 중 하나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라그나로크를 시작하게 할 인물이라 전해졌던 오딘의 아들이자 광명의 신인 발두르, 덕분에 다른 신에 의해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발두를 해하지 않는 다는 약속을 받아낸 오딘의 아내 프리크. 하지만 로키의 장난에 넘어간 발두르의 아우 호드르의 손에 쥐어져 결국은 라그나로크를 불러오고야 말았다는 전설의 무구다.
켈트족의 드루이드들이 신앙의 상징으로 섬기는 겨우살이. 한겨울에도 새파란 잎을 피워내는 생명력의 상징인 겨우살이의 가지 중 한 조각이, 수천년의 시간을 지나 김형준의 손에 의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그 끝과 푸른 잎이 드문드문 달린 반대편의 줄기. 품에 쏙 들어갈 정
도로 조그마했던 겨우살이의 가지가 조금씩 늘어난다. 듬성듬성했던 푸른 입이 풍성해지고 바싹 마른 몸통이 어느새 살이 통통하게 올라 딱 알맞게 그의 손바닥에 쥐였다.
"본게임 시작이다. 이 비러쳐 먹을 새끼야."
한참이나 괴성을 내지르던 그렌델은, 자신을 성가시게 굴던 조그만 난장이가 뿜어내는 한층 강력한 살기에 고개를 이를 드러냈다.
김형준은 망설임 없이 그렌델에게 달려들었다.
간달프는 투명화의 마법을 사용한 덕에 남들보다 조금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렌델과 마스터 킴의 전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들이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한 직후였다.
너무 가까이 접근했는지, 그들이 한번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마법사인 자신이 받아내기엔 너무도 강력한 에너지의 파동이 수시로 그
를 짓눌렀다. 마법이라도 펼쳐 몸을 보호할까 생각했지만 그렌델이 눈치 챌까 두려워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그렇게 괴로운 위치에서 관전을 시작했다.
한참이나 공방을 주고받던 그렌델과 마스터 킴이 잠시 떨어져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키에에에에에!"
거인의 덩치를 생각하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울음소리. 마치 어린 아이가 우는 듯한 소리가 그렌델의 입에서 길게 이어졌다.
그런 거인을 노려보던 마스터 킴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미스틸테인?"
마법사인 그는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켈트 족 드루이드들이 생명력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겨우살이의 가지라니. 무언가 파괴적인 무기를 꺼내지 않을까 하던 생각이 단숨에 무너졌다.
전설의 무구라고 하나 미스틸테인 자체는 그리 파괴력이 높지 않은 아티팩트다. 그 탓에 수 없는 시간을 템플러의 보고에서 썩어가고 있던 것인데 지금 마
스터 킴이 그 미스틸테인을 꼬나쥔 것이다.
그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순간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김형준이 그렌델에게 달려듬과 동시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단번에 뿜어져 나온 수백 수천 수만가닥의 붉은 줄기들이 그렌델의 거구를 휘감았다. 그리고 지상에서 그렌델의 하체만을 공격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김형준이 높이 몸을 띄어 올렸다. 붉은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고 미스틸테인이 거인의 심장어림을 찔러간다.
"키악!"
자신의 몸을 칭칭 동여맨 붉은 줄기가 성가신지 괴성을 내지른 그렌델이 온몸을 비틀었다. 붉은 줄기가 가닥가닥 끊어져 온 사방에 흩날린다.
"캭!"
막 자신의 가슴께까지 뛰어 오른 김형준을 발견한 그렌델이 허겁지겁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뜩이나 따끔한 난장이의 공격인데 얼굴이라도 맞았다간 큰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모습이 전광석화와 같다.
"이거나 쳐먹어라 이 거인 새끼야!"
============================ 작품 후기 독자분들의 의견 수렴하여 더욱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깽판을 칠 필요는 없으나 조금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최대한 수용하여 이후 전개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쿠폰과 선작 코멘트 추천 역시 늘 감사드리고 있으며 달아주시는 코멘트는 늘 몇번 씩 곱씹어 읽어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연참하느라 컴터 앞에 좀 오래 앉아있었더니 마눌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오늘은 어찌 달래드리고 연참을 하느냐가 관건이군요.
*달아주신 댓글 중 1화에 다시 남기신 감상평은 삭제했습니다. 107화까지 보시고 굳이 1화에 다시 그런 평을 달아주신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규독자분들의 유입을 막겠다라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생각
이 있었지만 그냥 불량이웃 처리했습니다. 비평과 조언은 수용하겠으나 정도 이상의 비난은 제 집필의지를 저해하는 바, 불량이웃으로 처리했으니 해당 독자님은 제 글 자체가 열람이 안되실겁니다. 앞으로도 비병과 지적, 조언은 수용하겠으나 정도 이상의 비난이나 인신공격 욕설등을 삭제하고 불량이웃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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