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07화 (107/223)

<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한참을 베오울프를 따라 들어가다 보니 가뜩이나 한산했던 템플러의 지부가 더욱 한산해진다. 몇 개인가 계단을 내려가고 이리 저리 구불구불한 복도를 걷다보니 깔끔했던 복도가 사라지고 투박한 갱도와도 같은 통로가 계속된다.

어두침침한 통로였지만 앞장 선 베오울프나 나나 아무런 장애도 되질 않았다. 그저 음침한 분위기가 좀 꺼림칙했을 뿐, 어두운 통로에 발소리만이 울린다.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아티팩트라는 것이 귀물이긴 하나 숨겨놔도 너무 숨겨놨다. 베오울프를 따른지 벌써 반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보고 비슷한 것은 보일 생각을 안 한다.

"서두르지 마시오. 아무래도 맛난 음식에는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라."

아티팩트를 둘러싼 사고라도 있었는지 베오울프가 그리 대꾸했다. 어차피 채근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는지라 그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되던 통로가 마침내 끝이 났다.

통로 끝에 위치한 넓은 공동. 이제까지의 좁은 통로와는 달리 넓고 높은 공간에 멈춰선 베오울프가 힐끗 나를 쳐다본다.

"잠시만 다른 쪽을 보고 있으시겠소? 보안 절차를 외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좀 꺼려지는 구만."

역시나 돌리는 법 없는 솔직한 베오울프의 말에 나는 몇발자국인가 뒤로 물러나 돌아섰다.

뭔가 콰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아닌가? 이거였나?"

베오울프의 중얼거림에 나는 실웃음을 지었다. 마치 보안 절차를 까먹기라도 한 듯한 어조라 설마 설마 했는데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이것도 아니고, 그럼 저거였던가. 옳지. 맞구만."

그렇게 거구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마침내 보안 절차를 마쳤는지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돌아서도 되오."

몸을 돌리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거대한 통로가 보인다.

"다 된겁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하니 베오울프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보안절차가 꽤나 까다롭소. 거기에 수백년 묵은 노인네들이 쓸데없는 장난을 좋아해서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다오."

부끄럽다기보다는 절차 자체가 귀찮았었던지 민망해하는 기색 하나 없다. 생긴 모습처럼 단순 명료한 인물이다.

"들어가보시오."

그의 말에 나는 되물었다. 외부인인 나를 보고에 혼자 들어서게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혼자 들어가는 겁니까?"

베오울프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뭐 따로 챙길만한 것도 없소."

어지간히 심드렁한 말투라 그 대범함엔 나도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대범한 건지 무식한건지. 어쨌건 사양할 일도 아니라 새롭게 열린 통로로 들어서니 갑작스레 주변이 밝아진다.

뭔가 형광등이 켜진 것 같은 밝음이 아니라 은은한 조명이 벽에서 흘러나온다. 가만히 보니 벽 사이 사이에 껴진 덩어리들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는데 꽤나 은근한 멋이 있어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렇게 몇 걸음인가 옮기니 저 안쪽에 수십개의 단이 보였다.

"오분 뒤에는 작전지역에 도착합니다!"

귀를 찢는 헬리콥터의 로터음에 조종사의 음성이 숫제 고함이라도 치는 듯 했

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말하는 그가 고래고래 악을 쓴다.

"오분 뒤에 착륙한다고요! 준비 하세요!"

혹시 내가 못 들었을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말을 전해왔다.

"알았다고요!"

내버려두면 한참이나 더 그렇게 있을 것 같아 손짓 발짓을 곁들여 대꾸하니 엄지를 추켜세웠다.

헬리콥터의 시끄러운 로터음과 진동을 느끼고 있으니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종사가 다시 악을 써대며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고맙다고 마주 악을 쓰곤 내리려고 하는데 조종사를 비롯한 이들이 내게 제각각 행운을 기원하는 말을 건네왔다.

"행운을 빕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엄지를 추켜세우고는 헬리콥터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렌델의 습격을 우려한 탓에 헬리콥터는 꽤나 높은 상공에 위치했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애초에 이 정도 높이가 장애가 될만한 상황도 아니고.

가볍게 지상에 착지하니 나를 따라 간달프와 베오울프가 각자의 방식대로 하강하고 있다. 간달프는 다른 수를 썼는지 비행하듯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고, 베오울프는 말 그대로 바닥에 쳐박혔다.

"으이차. 하강할 때마다 이러니 죽을 맛이구만."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의 곁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쇠뭉치가 내리 꽂혔다. 건설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오함마와 비슷한 쇳덩이. 그의 전용 무기인 전투 망치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딱 맞는 물건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간달프가 지상에 착지했다.

"어디 보자. 올 때가 됐는데."

베오울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쪽으로 접근 중인 서른개의 기운을 진즉부터 알아챈 탓이다.

"그래. 늦지 않게 왔구만."

베오울프의 말과 동시에 여기 저기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중장갑 기사와도 같은 모습이라 마치 시대를 거슬러 중세시대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기분이다.

"오셨습니까."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 중 한명이 앞으로 한발자국 나서며 그렇게 예를 취했다. 그 예라는 것도 꽤나 고풍스러운 방식이었는데 왼손으로 심장어림의 흉갑을 두들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왔는가. 여기 이쪽이 멀리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마스터 킴일세."

간달프가 뒤에서 나를 소개하니, 서른명의 중장갑 기사들이 금속제 건틀렛을 낀 손으로 일제히 가슴을 두들겼다.

철컥!

그 묵직한 소리가 어찌나 내 심장을 울렁거리게 하는지 작전은 시작도 안했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기사단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라 남자의 로망이 마구 솟아올랐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온 김형준이라고 합니다."

내 말에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다시 한 번 멋드러진 예를 취했다.

"용맹스러운 귀하의 검 끝에 경의를!"

가장 앞에 나선 인물이 선창을 하니 뒤에 있던 인물들이 복창을 하며 다시 흉갑을 두들겼다. 아무것도 아닌 인사였지만 마치 기사단장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라 괜스레 호기가 솟구친다.

"지금 나와 있는 사람들은 템플러의 정예 중의 정예. 원탁의 기사단입니다."

간달프가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설명한다. 과연 정예라고 할 만한 면면이었다. 하나 같이 칼같은 기운을 풍기는 게 전원 2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들로 구성된 이들다웠다.

"과연. 자랑하실 만합니다."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칭찬하니 간달프가 으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

신들의 정예가 내게 인정을 받자 꽤나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안 보이는 인원들은?"

화색이 만연한 간달프와는 달리 베오울프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전투망치를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귀를 후비며 하는 그의 말에 가장 앞에 나선 망치를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귀를 후비며 하는 그의 말에 가장 앞에 나선 인물이 대답했다.

"그렌델의 동향을 파악하는 인원 다섯명은 현 위치를 고수중입니다. 실제 작전 지역에 들어갈 경우 바로 합류할 것입니다."

뭔가 늘 간달프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베오울프의 모습이 차라리 한결 같았다.

"그래? 그럼 그렌델은?"

귓밥이라도 나왔는지 귀를 후비던 손가락을 비비적 거리던 베오울프가 다시 물었다.

"마지막 보고 이후 3km 정도 동으로 이동을 한 상태이며, 여전히 늪의 경계부근을 떠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누워서 체력을 회복중인 것으로 보입니

다."

베오울프가 어떤 태도를 취하건 간에 한결같이 절도 있는 태도로 보고를 한 선두의 남자가 이제는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베오울프의 건들거리는 모습이 꽤나 익숙한 모양이다.

"누워서 체력을 회복해? 쳐 자빠져 자는 모양이구만."

거침없는 그의 언사에 무리의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시겠소?"

조용히 있던 간달프가 내게 물어왔다.

그의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싼 템플러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물 샐틈 없이 단단히 갑주를 둘러싼 강인한 기사 서른명. 그 기세 역시 어디 내놓아도 꿇릴 것 없는 날카로움이 한결 같았다.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이들 중 한 둘만 나서도 바로 해결이 될 테지만 이번 상대는 특별했다.

그렌델. 대한민국의 괴수보다는 상대적으로 약체라 평가 받는 몬스터였지만 엄

연한 1등급 몬스터다. 이들의 공격은 그렌델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테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들만으론 무리일 듯 싶습니다. 다들 강하긴 하지만 1등급 몬스터에게 비교할 정도는 아닙니다."

듣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야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기분을 생각해줄만한 상황이 아니다.

역시나 기분이 상했는지 선두의 무리를 비롯한 이들의 기세가 날카롭게 일어섰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니 베오울프가 물었다.

"그렇소? 나는 좀 어떻겠소."

내 말에 호기가 돌았는지 가뜩이나 도전적인 자세가 이제는 전투적이라고 할 정도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라면 어느 정도 타격을 주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치명상은 힘들 겁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힘든가보군. 그냥 한 번 물어봤소."

화라도 낼 줄 알았더니 덤덤하게 수긍한다. 보면 볼수록 담백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들거리는 태도 탓에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겪을수록 괜찮은 인물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민용모가 떠올라서 정이 가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그가 평가가 좋다고 해서 그렌델을 상대하는 데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원탁의 기사단이라는 정예들보다는 강하고, 또 2등급 능력자들 중에도 최상의 능력을 지닌 그이겠지만 그 역시 그렌델에게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의 전력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감 하나만 보더라도 역부족이다.

"역시 계획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걱정했던 베오울프는 덤덤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원탁의 기사들이 자존심이 상한 모양새다.

"이 중에서 실제 그렌델과 전투를 해보거나 다른 1등급 몬스터와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있습니까?"

사방이 조용하다. 질문을 던졌건만 대답을 하는 이는 하다도 없다. 원탁의 기사들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간 경계선을 지켜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렌델과 전투를 해보신 분들이 없단 말입니까?"

이건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라 조금이지만 당황해버렸다. 부동자세에서 눈동자만 굴려 서로를 힐끔거리던 원탁의 기사들을 대신 해 간달프가 나섰다.

"사실 초기에 그렌델과 전투를 했던 이들은 전부 전멸했네."

그의 말에 나는 머리가 지끈 거렸다.

"이거 정말 힘들겠는데요?"

그 말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나보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던 이들이 처음으로 내게 항의를 표했다.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인 것도 알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 힘이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도 알겠습니다만, 마치 저희를 애송이 취급하시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처음으로 부동자세를 푼 선두의 기사. 가만히 턱짓을 하며 간달프를 바라보니 그가 대답한다.

"프로도경일세. 2등급 템플러이자 원탁의 위원회에는 들지 못했지만 템플러에서 손 꼽히는 강자일세."

템플러에서 손 꼽히는 강자라. 나는 프로도라는 기사를 향해 한발자국 다가섰다.

"그럼 이분이 원탁의 기사분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에 속하시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숨겨왔던 기운을 모조리 이끌어냈다.

============================ 작품 후기 으아아아. 글을 쓰다가 리듬이 깨지면 다시 손에 잡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

런데 오늘은 한 번도 아니고 수십번 리듬이 깨졌네요. 마눌님이 부르시고 가족이 부르고 손님이 부르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즘 글이 잘 써지는 시기인지 금방 다시 집중해서 한 편 더 올립니다.

껄껄. 독자분들의 선추코쿠가 저를 이렇게 불타오르게 합니다. 포풍과 같은 선추코쿠에 휩쓸려보는 게 소원입니다. 껄껄.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독자분들의 코멘트는 리리플이 없어도 늘 몇번씩 읽어보고 있습니다. 항상 코멘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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