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필시 강건했을 육체는 삐쩍 말라 마치 병자와도 같고, 눈빛은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죽어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릿결은 푸석푸석하기 그지없어 손이라도 댔다간 부스러질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남자.
내가 아서 팬드래건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다. 이른 아침 마중 나온 간달프를 따라 아서가 머물고 있는 템플러의 심처에 도착하여 본 아서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들어선 것을 알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달프가 성큼성큼 걸어 아서의 매마른 손을 잡는다.
"간달프?"
그간 자주 찾아왔던 모양인지 아서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간달프의 이름을 내뱉었다.
"네. 아서 경. 저 왔습니다."
간달프의 음성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귀네비어가 자꾸만 보이네. 그녀의 말을 처음부터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힘없는 음성의 한탄이 대뜸 튀어나온다. 간달프는 익숙한지 한참이나 그의 한탄을 듣기만 하고 있다. 꿈을 꾸듯 몽롱한 것 같기도 하고, 회한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하다. 그 유명한 이름과는 너무도 다른 아서의 모습에 나는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비쩍 마른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같은 불치병의 환자와도 같은 모습을 한 1등급 이능력자. 그 처참한 광경에 나는 차마 간달프를 재촉하지 못하고 그저 없는 사람처럼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내 고집만 세웠었다네. 그녀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었다면 나도 그녀도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다 내 잘못이야. 그녀에게 사죄할 방법이 없어."
원하진 않았지만 그의 한탄을 통해 그와 귀네비어의 관계를 알 수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귀네비어는 아서왕의 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저 연인
관계였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친구 비슷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보다 자네는 어쩐 일인가. 다녀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텐데."
간달프가 용건을 꺼낸 건 아서의 한탄이 시작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손님이 왔습니다. 그렌델의 퇴치를 도와주실 분입니다."
간달프의 소개에 나는 아서에게 다가갔다.
"오. 외부의 조력자인가? 그래.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지. 어디서 온 누구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이쪽으로 다가와 주시오. 얼굴이 보고 싶다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던지라 다시 몇발인가 다가서니 아서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 마치 송장과도 같은 모습의 그의 상태에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반갑소. 아서 팬드래건이요. 이런 반 시체의 모습이라 난감하시겠지만. 소개
라도 해주시구려."
자꾸만 그의 모습과 지현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만약 그날의 일이 조금만 잘못 되었다면 그녀 역시 아서와 같은 꼴을 당했을테지. 새삼 내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떠올라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온 김형준입니다. 소드베인의 마스터이며 1등급 이능력자입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화색이 감돌았다.
"오오. 그렌델의 처리를 도우러 오셨다니 예상은 했었소만 생각 이상으로 귀한 몸이셨구려. 한국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소. 사람들이 예의가 바르고 그 됨됨이가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익히 들어왔다오. 반갑소이다. 먼 곳까지 어려운 걸음 하셨소."
한국에 대해 조금은 들은 것이 있었는지 아서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말하는 중간 중간 기력이 달리는지 마른기침을 내뱉거나 숨을 몰아쉬거나 했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예까지 왔다는 것은 이미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는 것일 테고, 귀하신 몸이 반시체나 다름없는 퇴물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니시겠구려. 그래. 엑스칼리버
가 목적이오?"
마치 짐작하고 있었던 듯, 그의 말이 담담하다. 괜스레 내가 죄를 지은 기분이라 공연히 시선을 돌리는데 그가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럴 눈빛으로 볼 것 없소이다. 엑스칼리버는 애초부터 내게 맞지 않는 귀물이었소. 지금 같은 상황에서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와 다름이 없지. 새로운 주인을 찾는 것이 당연하오."
그의 말이 계속되자 간달프가 더는 못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서 털어버리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간달프의 말에 아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게 그리 말해주는 것은 자네밖에 없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그들을 보고 있던 나는 문득 한가지 의문점이 생겨,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템플러처럼 역사가 긴 곳이라면 치유계열 능력자도 있을텐데요? 뭔가 다른 치
료 방법은 없는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서를 포기한 템플러 내부의 분위기에 의아함이 생겨 물었다. 내 질문에 간달프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치료라. 간달프. 잠시 이불을 걷어주시게. 직접 보는 것이 낫겠지."
그가 재촉하지만 간달프는 그저 질끈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간달프가 요지부동이니 아서가 내게 대신 부탁을 해온다.
"손님에게 이런 부탁하긴 뭐하지만 잠시 이불을 들춰보겠소? 대답이 될 거요."
망설이다가 그의 말대로 이불을 들춰보았다.
"헙!"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간 큰 결례라도 저지른 것 같아 아서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그저 담담한 신색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려. 보셨으면 알겠지만 치료가 될만한 상태가 아니라
오."
이불 속에 가려진 그의 몸은 끔찍했다. 뼈 위에 가죽만 씌워둔 것처럼 앙상한 하체. 미이라와도 같은 모습이다.
"그 자의 흑마법에 당한 게요.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사악한 리치의 마법이지. 생명력을 갈취하는 금단의 마법이라오."
생명력을 모조리 빼앗긴 모양인지 당장이라도 부스러져 먼지가 될 것만 같은 그 끔찍한 몰골에 아직도 놀라움이 가지시를 않았다.
"생각보다 끔찍했나보구려."
내 모습을 본 아서가 말했다. 그 어조가 어찌나 씁쓸한지.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놀란 것은 그 끔찍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몰골이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라 마치 뒷통수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 표정 탓에 아서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자 간달프가 조금이지만 힐책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실례인 것을 알지만 아서를 덮고 있는 이불을 다시 들춰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간달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아서 역시 놀랐는지 언짢은 기색이다.
"보기 드문 진귀한 구경이었나보구려."
그의 말에 가득한 자조와 질책이 아프게 나를 찔러왔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가능성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바싹 메마른 몸을 더듬었다.
"잠시만요."
막 나를 저지하려는 간달프에게 말했다.
이런 상태 익히 보아왔던 모습이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처음 보지만 이런 모습의 몬스터들은 수없이도 보아왔다. 왜 아니겠는가. 전부 내가 했던 일인데.
"혹시 제 콜싸인이 뭔지 아십니까?"
영문 모를 내 행동에 화가 잔뜩 나 있던 간달프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행동에 모욕감이라도 느꼈던지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아서 역시 뜬금없는 내 말에 다시 나를 바라본다.
"피바라기. 블러드 써스터(Blood Thirster)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한 그들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짙어진다.
"그리고 저는 가시찔레 꽃이라는 아티팩트를 갖고 있죠."
그래도 내 행동이 호기심 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아무도 나를 제지하거나 사나운 눈빛을 보내오진 않는다.
"저는 피를 매개체로 상대방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능력의 이능력자입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마치 내가 흡혈귀라도 된 듯한 모양새다. 꽤나 못된 이능이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알아들은 그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이는데 그 눈빛 한구석에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남의 생명력을 갈취해 힘을 키운 이능력자라는 생각이라도 한 모양
이라 황급히 설명했다.
"물론 일전에는 제 본신의 피를 이용했었고, 나중에 가서도 몬스터의 생명력만을 끌어 썼었지요."
그렇게 변명하듯 말해봤자 그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당장 생명력을 갈취당한 아서의 경우에는 명백한 적대감이 떠오른다.
도와줄 사람이라고 데려왔더니 사악한 이능력자라고 생각이라도 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보실 것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한 적도, 또 몬스터의 생명력을 원해서 흡수한 적도 없으니."
그들의 시선에 슬슬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그렇게 말하니 그들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지현의 기력을 갈취한 적이 있으니 스스로 찔리는 감이 없진 않았지만 일단 말을 이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아서 경의 상태를 치유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일 텐데요?"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나는 내 계획을 설명했다.
"안타깝구만. 마스터 킴이라면 엑스칼리버와의 계약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서와 만나고 돌아온 나를 기다리던 베오울프의 첫마디였다. 등급조차 불명확한 전설의 아티팩트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영국의 아티팩트인데 제가 가져간다면 손실이 크지 않겠습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니 베오울프가 대꾸한다.
"이제 와서 과거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도 아니고. 그런 구시대의 유물따위 필요 없소. 성질도 뭣 같아서 계약자도 제 멋대로 선택하는 그런 건방진 아티팩트따위. 이쪽에서 사절이라오."
딴에는 어차피 손에 넣지 못할 물건이니 나에게 주고 환심이나 사자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태도가 너무 수상했다.
하지만 내가 캐물을만한 사안도 아니라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여보였을 뿐이다.
"에잉. 다른 대체할만한 아티팩트를 찾아봐야겠구만."
전설의 무구인 엑스칼리버는 주지 못해 안달이더니 다른 아티팩트는 아까워하는 기색이다.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도전적이라고까지 할 만큼 드셌는데 원체 성격이 호쾌한 듯 해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보아하니 보이는 모습 그대로 솔직한 인물로 보이기도 하고.
"엑스칼리버는 안 아깝고, 다른 건 아깝습니까?"
그의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아깝지 안 아깝겠소? 엑스칼리버야 어차피 주인도 못 찾을 애물딴지고, 피 같은 아티팩트를 넘겨야 할 판인데."
역시나 예상대로 솔직한 대답이다. 점점 이 베오울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민용모 같은 인사다. 저돌적이고 솔직한 인물. 이런 인물은 남을 속이는 법이 없지.
"일단 아쉬운 건 우리니 서두릅시다. 바로 보고로 가봅시다."
화통한 성격의 인물답게 엑스칼리버와의 계약이 실패하자 바로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 성큼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 작품 후기 으아아아. 후기 자꾸 날라가서 짜증남. 몹시 화남.
흥. 치. 펫.
생각해보니 전달 이번달 휴재가 너무 많았으니 당분간 연참모드로 그간의 분량 벌충하겠습니다.
포풍과 같은 선추코쿠로 저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