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그래.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구만. 마스터 킴의 말대로 아무리 멀린 경이 리치가 되어 사악한 지혜가 늘었다고 해도 귀네비어님이 그렇게 쉽게 당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었어. 언령이라는 제약이 있었구만."
귀네비어의 희생에 관해 말하던 간달프가 갑자기 무릎을 친다. 아무래도 귀네비어란 사람이 멀린에게 당한 과정에 의문이 있었던 듯 한데 이제야 의문이 풀린 모양이다.
나는 혼자 자문자답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 떠들어대던 그가 뒤늦게 이야기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차. 이거 마스터 킴께 또 결례를 취했소. 나이가 들면 늘 이런다오. 부디 얹잖아 마시고 이해주시오."
혹시 내가 또 화를 낼까 제법 걱정하는 표정이라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차피 화를 낼만한 문제도 아니고, 또 할 말은 아까 다 했던지라 이제 와서 다시 화를 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소? 옳지. 그래. 귀네비어님이 그 첫 희생자였다오."
음성 가득 안타까움이 어찌나 절절한지 사정을 모르는 나조차 덩달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지경이다.
사악한 리치가 되어 아서와 귀네비어의 경계를 받는 멀린이었지만, 귀네비어는 결국 멀린의 함정에 빠졌다고 했다. 그 자세한 사정이야 그네들만 알겠지만 뭔가 평소의 믿음을 미끼로 그를 유인했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간달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귀네비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술사이며 그만큼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엮어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아마 사악한 리치가 되면서 그간 언약에 억눌려왔던 거짓된 이기심이 발현된 것이겠지.
"아마 마스터 킴의 말대로 언약의 제한을 받고 있던 세분들이라 미처 상대의 거짓을 눈치 채지 못했을 거요.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
귀네비어를 꽤나 따랐던지 간달프가 다시 한 번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리치가 된 멀린이였지만 막상 리치가 되고 나자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스스로의 영생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은 탓인지, 귀네비어가 긴 생을 유지하던 근원을 욕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귀네비어가 희생되기 전에도 이따금씩 그런 탐욕을 보였다고 하니 아마 간달프의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소. 귀네비어님의 희생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서 경이 멀린 경을 찾아갔소."
그의 말에 의하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귀네비어와 함께 보낸 아서였던지라 멀린의 만행을 알아챈 그의 분노는 대단했다고 한다. 템플러의 근간을 받치고 있는 그들의 분쟁을 우려한 원로들이 극구 만류했으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멀린 경을 찾아갔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리치가 된 멀린 경이라고 하나 아서 경의 분노를 피해갈 순 없었소. 아서 경의 엑스칼리버는 등급 조차 측정할 수 없는 아티팩트거든. 그런데 이변이 일어난 거요. 그저 아서 경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뒤늦게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소."
아서의 폭주를 우려한 템플러의 인물들이 뒤늦게나마 중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는데, 이미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아서 경과 멀린 경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단다.
"당연히 아서 경이 멀린 경을 제압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대경실색할 수 박에 없었소. 그저 아서 경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빨리 풀리길 기다리고 있던 템플러들의 입장에선 통탄할 일이었다오."
사악한 리치 멀린이 1등급 템플러이자 강대한 주술사인 귀네비어를 언데드로 만들었다고 한다. 언데드가 되며 지닌 힘의 태반을 잃은 귀네비어였지만 아서가 홀로 견디기에는 멀린과 귀네비어의 협공이 아마 무리였으리라. 거기에 더해 귀네비어를 차마 베지 못한 그는 결국 멀린과 서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거기까지 이야기 한 간달프가 간절하게 나를 바라본다.
"들으신 데로요. 우리 템플러에 1등급 이능력자는 더 이상 없소. 그것이 우리가 마스터 킴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이유요."
마치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기분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다시 현실로 돌
아왔다.
"만약 아서 경이 멀쩡했다면 맹세컨대 그렌델이 저리 날뛰진 못했을 터, 그저 시기가 좋지 않았음을 통탄할 뿐이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보았던 최강자인 지현 조차도 불과 수백년의 수행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천오백년이 넘게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아서 팬드래건은 등급조차 측정이 안 되는 아티팩트까지 갖고 있다니, 그 힘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겠지만."
여지껏 중에 가장 길게 한숨을 내쉰 간달프가 간절한 눈빛을 내게 보내온다.
"다시 말씀드리오. 영국을 도와주시오. 일전의 내 무례가 그대의 결정을 방해한다면 내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사죄하겠소. 부디 도와주시오."
입맛이 썼다. 필요 이상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이미 맡은 의뢰였지만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이런 자신들의 치부마저 드러낼 정도라니 그들의 간절함은 상상 이상인 듯 하
다.
간달프의 거듭되는 사과와 애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턱없는 작전을 꾸리고 나를 사지로 밀어넣으려나보다 하던 그들의 상황은 끔찍하리만치 처참했다.
템플러의 근간을 받쳐주던 세 기둥이 동시에 무너진 격이니 그들 입장에서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리라.
그들의 상황이 어려움을 알았고, 거기에 더해 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사정이 내가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이유가 될 순 없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니 생소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시오. 마스터 킴. 귀한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대접이 소홀해서 죄송할 뿐이오."
카랑카랑한 음성에 눈을 뜨니 낮선 남자가 과장된 미소를 짓고 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잔뜩 주름진 얼굴. 강인한 얼굴에 어울리는 거대한 덩치.
"템플러 원탁의 일좌를 맞고 있는 베오울프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모의 남자가 호탕하게 손을 내밀어온다. 템플러 원탁 위원회의 첫 번째라면?
"아서와 멀린이 없는 지금은 수좌에 앉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될 것이오. 마스터 킴에 비해 격이 그리 떨어지진 않을 거요."
호기롭게 말하는 남자, 베오울프의 말에 나는 마주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손아귀가 주는 강인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베오울프경. 아무리 그분들이 부재중이라고 하나 그리 오만한 말투라니. 일좌의 체면을 지키시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간달프의 말투가 날이 서 있다. 그런 간달프의 말에도 베오울프는 코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베오울프라는 작자는 멀린과 아서를 부를 때 간달프와는 다르게 존칭을 생략했다.
"흥. 대충 꼴을 보니 부끄러움도 모르고 다 토설한 모양인데, 마스터 킴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구만."
명백한 비아냥거림에 간달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들이 하는 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내심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나는 그들이 하는 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내심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힘들게 영국에 도착했더니 나를 지원해줘야 할 템플러는 콩가루 꼴이다. 당장 1등급 능력자들끼리의 상잔도 그렇고 위원회의 인물들이라는 사람들이 외부인인 내 앞에서 서슴없이 이를 드러낸다.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하니 베오울프가 호탕하게 내게 말을 건네온다.
"이거 못난 꼴을 보였소이다. 템플러의 최상급자가 왔으니 이제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요?"
비록 내게 실수를 하긴 했어도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간달프와는 달리 이 베오울프는 다분히 도전적인 말투다. 능력은 떨어지더라도 수천의 템플러를 대표하는 자라고 하니 더 이상 트집을 잘을 수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1등급 이능력자이자 검맥의 수장 김형준이오."
그의 말투를 따라 나 역시 조금은 삐딱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렇게 말을 던지고 그의 반응을 보니 도전적인 내 말투에도 그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반갑소. 2등급의 템플러 베오울프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부디 몸 건사하시고 성하게 돌아오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지현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간의 피로가 단번에 날아간다. 전세기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템플러의 복잡한 상황을 듣고 난 뒤의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감돈다.
"뭐 할 말 없어요?"
그렇게 물으니 수화기 저편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 건강하시고..."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그거 말고요."
잠시 전화기에 침묵이 감돈다. 하지만 나는 바라는 바가 있었던 탓에 기꺼운 마음으로 그 침묵을 감내했다.
"... 해요."
모기만한 음성이 수화기 저편에서 속삭였다. 나는 짓궂게 다시 되물었다.
"사랑해요."
좀처럼 듣기 힘든 그녀의 고백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내 미소가 그녀에게 보일리는 없겠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고백에 응했다.
"나도 사랑해요. 금방 돌아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생각 이상으로 수즙은지 그녀가 어물쩡 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이나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나는 침대로 몸을 날렸다.
베오울프와 간달프. 그들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지금 템플러의 귀빈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긴시간 머물게 될 것 같진 않았지만 꽤나 신경을 많이 쓴 듯 이런저런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진 곳이다.
작전은 변경되지 않았다. 다만 작전 이전에 한가지 추가사항이 생겼는데 그 추가사항을 들은 나는 그들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칼리버.
내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놀랍게도 베오울프는 아서의 엑스칼리버를 내게 보상으로 내걸었다. 아서가 비록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고는 하나 주인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보상을 결정하다니. 물론 간달프의 격렬한 반대가 있긴 했지만 왜인지 간달프는 베오울프에게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하는 듯 했다. 말로는 비난하고 반대한다지만 정작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엑스칼리버는 그 계약자를 스스로 선택한다니 그저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내민 미끼를 덥썩 무는 수밖에 없었다. 등급조차 측정이 안 되는 유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고작 4등급에 불과한 가시찔레 꽃만 해도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는데 등급 외 유물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엑스칼리버와 계약이 성공한다면 그렌델 뿐만 아니라 일산에 웅크리고 있는 괴수 놈과도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만약 엑스칼리버와의 계약이 실패한다고 해도 그에 상응하는 유물을 보상으로 받기로 했으니 그렌델과의 전투도 그리 비관적이진 않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다른 나라에 등장한 1등급 몬스터에 비해 상대적 약세라는 평가가 있으니. 정 불리하면 내 한 몸 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원대로 결정된 40인의 2등급 이상 템플러들 중에는 10인의 원탁 위원회의 인물들이 전원 포함된다니. 아무리 2등급에 불과한 이들이라지만 오늘 만난 베오울프만큼만 되도 큰 힘이 괼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영국에 도착한 첫날이 어두워진다.
============================ 작품 후기 헐. 이게 뭔가요. 올렸더니 내용은 뚝 끊기고 후기는 날아가고. ㅜㅜ장문의 후기였는데. 다시 쓰기 짜잉나서 그냥 올립니다.
엉엉. 선추코쿠로 제 영혼까지 털어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털려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후기 날아가서 심기불편. 몹시 화남.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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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쿠로 제 영혼까지 털어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털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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