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04화 (104/223)

<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방안을 가득 밝힌다. 나를 겨냥한 빛이라 생각했던 덩어리가 뭉쳐지더니 간달프의 지팡이 끝에 뭉쳤다.

"허. 진정하시구려. 사소한 보안절차였을 뿐이니."

막 주먹을 뻗어가려던 나는 그의 여상스러운 말투에 움직임을 멈췄다.

"워낙에 보안이 필요한 이야기라 잠깐 방음막을 쳤을 뿐이라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구려."

그의 말에 나는 내뻗었던 주먹을 겸연쩍게 내렸다. 괜한 호들갑을 떨었다는 생각에 무안해졌지만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그리고 한가지 더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협조해주시구려."

그의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지팡이에 대고, 지금부터 나누는 대화는 절대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겠다고 해주시구려."

보안, 보안 그러더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지 나에게 비밀유지 서약을 요구한다.

"뭘 그렇게 우려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요. 지금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간달프의 지팡이 끝에 어린 빛이 내게 달려들었다. 바짝 경계하고 있던 와중에 생긴 일이라 바로 몸을 물렸지만 빛덩어리는 집요하게 나를 뒤쫓는다. 빛덩어리가 내 뒤를 쫓아 방향을 틀자마자 나는 주먹을 내질렀다.

"합!"

붉은 기운이 잔뜩 뭉쳐 주먹 끝에서 빛덩어리와 충돌한다. 파식 거리는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빛덩어리가 소멸했다.

"허허허허."

내가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간달프가 헛웃음을 쳤다. 허탈한 표정에 숨겨진 경악이 절로 드러나는 모양새라 나는 사납게 말했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난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온 몸을 긴장시켰다.

"아. 오해요. 오해. 그저 마스터 킴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조금의 도움을 주려던 건데."

손사례를 치며 말하는 모양새가 아직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약의 마법이오. 마스터 킴께 해가 되는 마법은 아니라오. 그저 마스터 킴이 다른 곳에서 실수로라도 말을 꺼내게 되면 다른 단어로 바뀌도록 하는 마법이였소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한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간달프가 부리나케 부연설명을 했다. 그의 설명에도 나는 석연찮은 기분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템플러에서는 손님 접대가 원래 이런 식입니까? 도움 요청을 받고 찾아온 손님에게 설명도 없이 대뜸 뭐하는 짓입니까."

날카롭게 내뱉으니 간달프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젓는다.

"아. 아니오. 그런 식으로 느꼈다면 사과하리다.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템플러들에겐 워낙 익숙한 마법이라 습관처럼. 기분이 상했다면 내 사과하리다. 정말 미안하오."

얘기를 듣고 보니 보안을 위한 당연한 절차였다는 말인데, 매 행동마다 설명도 없이 이러니 짧은 시간동안 긴장이 가시질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았지만 템플러들의 행태에 기분이 상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돈을 받고 하는 의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전이라는 것은 자살과 다름이 없고, 거기에 더해 이런 푸대접이라니. 화가 부글부글 끌어오른다.

"상황이 급박하여 내 이해하려고 했지만 하는 행태를 보아하니 저를 얼뜨기 취급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모두 대한민국의 검맥을 대표하는 수장으로써 대우해주시길 요청합니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나갔어야 했다. 과거 보잘 것 없던 시절의 악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해 이런 꼴을 당하다니. 간달프와 케이트를 향한 분노가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먼저 당신들에게 묻겠습니다. 당신들은 대한민국과 검맥을 대표하는 저와 대화를 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까?"

미리 오기 전에 지현에게 귀뜸을 받은 이야기를 뒤늦게 꺼냈다. 게으르고 수동적인 내 성격을 걱정해 혹여 가서 홀대나 받고 이용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 그녀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수까지 나에게 알려줬다.

내 말에 아니나 다를까.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는 간달프와 케이트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케이트와는 달리 간달프란 작자의 위치는 비교적 고위직이었는지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2등급 템플러이자, 열명의 원탁 위원 중 한명인 간달프 곤도르니안이오. 이 정도면 그리 격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진 않으시겠지."

그의 말에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등급 이능력자이며 50명의 3등급 이상 능력자들로 이뤄진 검맥의 수장 김형준입니다. 당신의 격이 제게 맞습니까?"

내 말에 한발 앞으로 나섰던 간달프가 도로 물러났다. 아무리 템플러를 이끄러가는 핵심 중 한명인 간달프라도 명색이 한 단체의 수장인 나를 대하기에는 손색이 있다. 게다가 본신의 능력 역시 격차가 있었으니 그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기엔 충분하리라.

"템플러의 수장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에 따라 다르지요. 당신들이 나를 방금 전처럼 얼뜨기 취급을 한다면 일개 하급 템플러를 불러와도 될 것이겠지요. 다만 그 뒤에 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제가 할 말은 이게 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내 말을 들은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심히 기대된다. 그렌델의 퇴치를 위해서 내 힘이 꼭 필요할 터,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지 않자니 뒤가 심히 걱정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리 했어야 했는데. 때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일은 틀어졌다. 가뜩이나 불투명한 케이트의 설명 탓에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노인의 장난질을 겪고 나니 심사가 잔뜩 꼬여버렸다.

"먼저 템플러의 원로로써 무례를 사과하오. 부디 내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템플러 전체에 악감정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오."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간달프와 케이트가 정중하게 사과를 해온다.

"10인 원로회의 7번째 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간달프 곤도르니안이 정식으로 사과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킴."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사과를 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경로우대를 위해 영국에 온 것도 아니라 애써 무시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만 차후 이 일에 대해서 한 번 더 꺼낼 일이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니 간달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다. 케이트는 여전히 주눅이 든 얼굴이었는데 간달프의 몇마디를 듣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넓은 실내에 나와 간달프만이 남았다.

"기분 푸시구려. 절대 귀하를 얕잡아 보거나 해서 벌인 일이 아니었소."

딱히 할 말도 없어 그저 무료하게 발만 까딱이고 있는데 간달프가 말을 걸어온딱히 할 말도 없어 그저 무료하게 발만 까딱이고 있는데 간달프가 말을 걸어온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꺼내고 싶은 화제도 아니군요. 다만 이 일은 차후 공식적으로 항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내니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흠. 흠."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는 모양새가 내 이런 공격적인 태도가 자신의 무례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음. 일단 격에 맞는 분이 오시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격에 맞는 상대는 아니라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시간이 아까우니 그저 노인의 푸념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길 바라오."

대답은 역시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 대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템플러에는 세명의 1등급 템플러들이 있었다오."

그렇게 서두를 뺀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었다. 둘로 알려진 1등급 템플러들이 원래는 셋이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 절로 호기심이 생겼달까.

그의 행동에 꽤나 기분이 상했었지만 사과도 받았고 차후에 템플러에 항의하여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낼 구실도 챙긴 마당이니 못 이기는 척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서 팬드래건, 멀린. 그 두분이 가장 유명한 템플러들이라오. 그 두분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니 마스터 킴도 아실 것으로 생각하오."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아시는 구려. 그분들이야 템플러의 역사이자 우리의 자랑 그 자체이오만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오."

아서왕과 대마법사 멀린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만큼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원탁의 기사들과 멀린이 아서를 도와 카멜롯이라는 왕국은 건국했다는 이야기였지.

"이런 말을 지금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 끝을 흐리는 모습이 아까 전에 시도했던 언약의 마법이라는 것이 실패한 탓에 나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아서인 듯 했다.

"1등급 이상의 힘을 얻게 되면 말에 언령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을 경우 힘이 이능 자체가 약해집니다."

그 뒷내용이 궁금했지만 내심을 숨기고 불퉁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설명했다.

"호오. 그런 것이 있었구만. 그래. 따지고 보면 그 두 분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제 멋대로 감탄한 간달프가 설명을 이어간다.

"그럼 믿고 말하겠소. 아서경과 멀린경 말고도 다른 템플러가 있다고 했었는데 혹시 귀네비어라고 들어보셨소?"

그의 말에 나는 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귀네비어라면 아서왕의 전설에서 나왔던 왕비의 이름이 아닌가. 세간에는 원탁의 기사 중 한명이자 아서왕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랜슬롯과의 불륜으로 유명한 이름이기도 하고.

"역시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들어 봤나보오."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설이후의 스토리, 그는 그 뒤를 이야기했다. 결국 카멜롯은 무너지고 아서와 원탁의 기사들중 몇, 그리고 멀린과 귀네비어는 그 뒤로 몸을 숨기고 쭈욱 살아왔다고 한다. 어떨 때는 보통사람들처럼 사람들 틈에 섞여서 지내왔고 어떨 때는 산속에 숨어 살기도 한 그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과 같은 이능력자들이 많음을 깨닫고는 그들을 규합하여 템플러란 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음지에서 자신의 이름도 못 내걸고 살아왔던 이들이 한 단체의 수장이 되어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동류를 모았을 뿐인지. 어쨌

건 그렇게 시작된 템플러는 오랜 시간을 이어져 내려왔다.

크고 작은 문제들도 있었지만 큰 탈 없이 이어져 내려오던 그들의 결속이 깨어진 건 멀린 때문이었다.

아서와 멀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힘을 지니고 있던 원탁의 기사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고 육체의 재구성을 얻은 아서나 주술적인 힘을 빌어 생을 연명하고 있던 귀네비어와 달리 그저 진리를 탐구했던 멀린의 수명이 다 된 것이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오. 멀린경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흑마법에 손을 대었다오. 처음에는 그저 죽어가는 이의 육신을 빌려 영혼을 전이하는 것이, 나중에 가서는 점점 적합자를 찾기가 힘들게 됐소."

나는 침을 꿀떡 삼키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다시 수명이 다 됐음을 느낀 멀린경은 영혼의 전이에 적합한 인물들을 찾아보려고 애써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소."

흥미진진하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인물인 줄 알았던 멀린과 아서왕의 이야기. 그 뒷이야기라니.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내가 흥미를 보이자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금단의 비술에 손을 대었지. 멀린경은 스스로를 죽어도 죽지 않는 자, 아니 죽었으나 살아 있는 자로 만들었소. 세간에서는 리치라고 하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해골바가지 마법사?"

게임이나 영화 또는 만화, 소설에서 들었던 이름이라 그렇게 물으니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오른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맞소. 언데드가 된 것이오."

그 한마디가 어찌나 쓴지 나도 모르게 침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일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능력자들 중에도 경지에 이르러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도로 빠져든 이들이 제법 있었다고. 그런데 이야기속의 대마

법사로 알려져 있던 멀린이 그런 결정을 했다니.

"물론 우리 입장에서도 멀린경의 생존이 반길만한 일이긴 했으나,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오."

처음에는 생전의 인성을 유지하고 있던 멀린이 조금씩 괴팍해지다가 나중에는 상대하기 곤란할 정도로 성격이 변해버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이따금씩 보이는 광기 탓에 아서와 귀네비어까지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결국 사단이 일어났소. 사악한 금단의 비술에 손을 댄 대가로 멀린경은 결국 인성을 상실 했소.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귀네비어님이었다오."

============================ 작품 후기 전날 휴재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한편 더 투척합니다.

낄낄. 멀린 아서 다 나옵니다. 껄껄. 영국편은 그렌델편과 멀린편으로 후다다닥 진행하겠습니다. 독자님들이여 포풍과 같은 선추코쿠로 제게 연참욕구를 불어넣어주소서!!!

영혼까지 탈탈 털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문피아는 연재 접고 탈퇴했습니다. 몇가지 트러블이 생기면서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요. 사과박스도 문피아도 그렇고... 역시 제 고향은 조아라인가봅니다. ㅎㅎ가봅니다. ㅎㅎ*일전에 진행했던 서평이벤트 참가하신 분들께 상품권 보내드렸습니다. 노블 이용권은 선물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결제 가능하신 딱지 상품권 발송했습니다. 발송이 늦은 점 사과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는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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