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03화 (103/223)

< --  2-3. 늪지대의 거인과 사악한 마법사.  -- >

"잘 들리십니까?"

입술이 움직인다. 그리고 의미를 알아듣는다. 단순한 일이었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아티팩트에는 소통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 입술의 움직임과 내게 들려오는 소리가 묘하게 어긋난다. 마치 더빙영화를 보는 듯 맞지 않는 입모양이 기괴하기만 하다.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도 통역이 가능합니다. 한 번 말해보시겠습니까?"

뭔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나를 채근하는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갑자기 말을 하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뭔가 유창한 영어가 나올 거라 기대한 것과는 달리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한국

어다. 입모양이 어긋나던 그녀를 바라보며 했던 기대가 무색하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작동하고 있군요."

여전한 위화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티팩트 자체가 언어를 바꿔주는 것은 아니에요. 상대방의 언어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들리게 하고, 마스터 킴이 자국어로 이야기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줄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통역의 아티팩트라니,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다. 이 아티팩트라는 것이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물이라 부르는 것들 같은데 꽤나 쓸모 있지 않은가.

"7등급의 아티팩트입니다. 착용자와의 계약 없이 바로 사용이 가능한 물건이라 저희측에서 꽤나 유용하게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마스터 킴이 영국에 머무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줄 겁니다."

내가 감탄을 하는 기색이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등급도 굉장히 낮

다. 만약 그들이 아티팩트의 등급을 희소성으로 나눈다면 그 수량 또한 적지 않을 터, 정말 탐이 나는 아티팩트다.

"이런 게 많아요?"

서양인에게 한국말로 묻는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지만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음...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적진 않아요. 제가 알고 있는 수량만 해도 200개는 넘을 걸요."

역시나 내 예상대로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무려 통역이 가능한 아티팩트가 최소 200개 이상이라니.

내가 고개를 거듭 끄덕이며 감탄하자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마스터 킴은 이런 아티팩트를 처음 보시나요? 저희가 알고 있기론 꽤나 고등급의 아티팩트와 계약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물, 여기서는 아티팩트라고 하는 모양이죠? 하여튼 저도 고등급의 아티팩트

를 갖고있긴 하고 이런 저런 아티팩트를 보긴 했지만, 이런 기능적인 아티팩트는 처음 봤습니다.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아티팩트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거든요."

내가 구경한 유물이라고 해봤자, 죄다 전투에 관련된 기능을 갖고 있는 것들 뿐이었다.

"아. 알아들었습니다."

무언가 이유라도 떠올랐는지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에 나는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다.

대한민국의 유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일본에 빼앗기거나 전란 중에 사라졌거나. 그 덕에 남아있는 유물들의 수가 타국에 비해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유물들도 전부 전투계열이다.

그녀는 이런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예 모르진 않는지 덩달아 침울한 얼굴을 해 보인다. 내게 브리핑을 해줘야 할 그녀가 저리 입을 닫고 있으니 나 역시 할 말이 없다.

"케이트?"

그녀를 부르니 그제야 그녀가 정신을 차리곤 설명을 계속한다. 이런 사교성 부족한 여자를 작전 브리핑 담당관으로 하다니.

"죄송해요.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방금 전의 침울한 얼굴을 단번에 날려버린 그녀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일단 언어 문제는 해결 됐으니 바로 설명 드릴게요. 지금 저희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하지만 쾌활한 어조와는 다르게 그녀의 설명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렌델. 런던에 나타난 몬스터의 이름입니다. 등급은 1등급으로 책정됐으며, 신장 10미터 이상에 속하는 초대형 몬스터입니다. 전투 스타일은 힘을 이용한 육박전입니다만 그 외에 일정 지역을 늪으로 만들 수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늪지대에서는 이런 저런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능력으로는 늪과의 동화, 은신, 짧은 거리의 순간 이동등입니다만. 이 정도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4등급 이상의 템플러들이 수십명 이상 희생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정확한 전력까지야 모르겠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4등급 이상의 이능력자 수십명은 절대 허투루 소모할 전력이 아니다.

"지금도 그 희생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나름 침착한 태도로 설명을 하는 그녀.

"그렌델이 만들어낸 늪지대는 지금도 계속 넓어지고 있는데, 런던을 중심으로 하루에도 동,서,남,북 사방 5키로미터씩 그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영국 전역이 늪지대로 변할 판이라 마스터 킴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할 시간도 드리지 못함을 미리 사과드립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애초에 시급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렌델의 단단한 외피 탓에 타격을 주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쩌다가 타격을 입혀도 치명상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에 성공한 템플러들이 희생되는 판국입니다."

이건 상황 브리핑이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울 정도로 구구절절 우울한 사실들

뿐이다.

"그럼 지금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겁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역시나다.

"네. 처음 그렌델과 조우한 날처럼 전면전을 펼치고 있진 않습니다만 런던을 경계하는 템플러들이 수시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런던에 파견 나가 있는 템플러들의 숫자는 약 400명 정도이며 전원 4등급 이상의 이능력자입니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마치 일산에서 있었던 괴수와의 전투에 동원 된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수와 비슷하지 않은가.

"1등급의 몬스터와의 전투라면 4등급 정도의 능력자들로는 방법이 없을 텐데요?"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 말을 긍정한다.

"안타깝지만 마스터 킴의 말이 사실입니다. 3,4등급의 템플러들은 단순한 초병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 그렌델의 견제는 40명의 2등급 이능력자들

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케이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나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2등급 능력자 40명이요? 1등급 이능력자는 없습니까?"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영국의 1등급 이능력자는 현재 연락이 닿질 않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잠깐만요. 그럼 그렌델과의 전투에 참가하는 1등급 이능력자가 저 하나라는 겁니까?"

설마 설마 하며 물었더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지금으로썬 그렇습니다."

쾅!

테이블이 박살이 나며 튀어 올랐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차라리 화가 날 지경이다.

"장난합니까! 1등급 몬스터와의 전투에 저 혼자라니. 이 먼 곳까지 와서 자살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과격한 내 반응에 그녀의 얼굴이 헬쓱해진다.

"2등급 이능력자 40명이 뒤를 받칠 겁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어조라 분노가 더욱 커진다.

"1등급 이능력자 둘, 2등급 이하 4등급 이상 이능력자 300명. 이게 대한민국의 1등급 몬스터 토벌전에 동원되었던 이능력자들의 수예요! 그런데도 생존자는 50명도 안 되고 전투는 패배했다고요! 근데 2등급 이능력자 40명에 저 하나로 1등급 몬스터와 싸우라고요!"

어이가 없다. 수백의 이능력자들과 두명의 1등급 이능력자가 포함된 일산 괴수 토벌전조차 처참하게 실패했건만 비교하기조차 초라한 전력으로 1등급 몬스터와 전투를 하라니.

나도 모르게 불끈 거리는 주먹에 가까스로 힘을 풀고, 숨을 몰아쉰다.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는데 케이트가 다시 변며하듯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에 등장한 몬스터는 1등급 중에서도 최상급이고 그렌델은 상대적으로 약체로..."

간신히 가라앉던 분노가 다시 한 번 치솟아 올랐다.

"당신! 1등급 몬스터랑 싸워본 적 있어? 상대적으로 약체라고? 그런데 왜 수십의 템플러들이 어쩌지를 못해! 고작 나 하나 낀다고 상황이 바뀔 것 같아?"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 멀리 영국까지 왔더니 임무라는 게 자살과 다름이 없다.

"1등급 이능력자들 찾아와요. 나 혼자선 죽어도 못 가니까."

내 말에 그녀가 울상을 하며 애원한다.

"마스터 킴, 화를 가라앉히세요. 저희야말로 그분들이 가장 절실한 사람입니다."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분들도 없는데 이제 와서 마스터 킴마저 그러시면 저희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마스터 킴만이 저희를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에 나는 코 웃음 쳤다. 그깟 말 몇마디로 날 추켜세운다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사한 말 몇마디로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안 좋아진다.

변함없이 차가운 내 표정에 그녀가 입술을 씹어댄다. 무언가 갈등이라도 하는지 그녀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침내 고민이 끝났는지 비장한 표정을 한 그녀가 나에게 당부한다. 대답할 것도 없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1등급 이능력자들이 때로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나 하나에 2등급 이능력자 40명? 차라리 죽으라고 절벽에서 밀어버리지.

문득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을 뜨니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방을 정리하고 있다. 탁자 위에 있던 꽃병이니 뭐니 잡다한 것들이 탁자가 부서지면서 바닥에 흘러내리고 깨져 엉망이다. 약간 두려운 기색으로 방을 정리하던 이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케이트와 템플러의 만행에 화가 나긴 했지만 이런 일반인들에게까지 분노를 표케이트와 템플러의 만행에 화가 나긴 했지만 이런 일반인들에게까지 분노를 표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청소하기 편하게 자리를 비켜줬다. 딴에는 배려였건만 내 움직임에 자꾸만 움찔거리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한참만에 나타난 케이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백발이 탐스러운 초로의 노인과 함께 방에 들어선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한다. 그녀의 사과를 무시하곤 턱짓으로 노인을 가리켰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 삐딱선을 타니 걷잡을 수가 없다.

"아.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제 권한 이상의 보안사항들이라 부득이하게 템플러의 원로분을 모셨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이 한발 앞으로 나선다.

"처음 뵙겠소. 템플러의 원탁 원로회의 간달프라고 하오."

머리도 희끗희끗한 노인이 워낙에 정중하게 인사를 해오는지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마주 인사를 했다.

"대한민국의 김형준입니다."

삐딱하게 선채로 건성건성 인사를 해오는 내 모습에 케이트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간달프라는 원로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걸로 알고 있소. 아마 저 아이가 권한 밖의 보안사항이라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 하구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초지일관 건방진 태도를 보였건만 간달프는 그저 사람좋은 얼굴을 해보일 뿐이다.

"일단 마스터 킴의 기분을 풀어드리려면 왜 1등급 템플러 두분이 전투에 참가를 못하시는 지부터 이야기해야겠구려."

그렇게 말한 간달프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지팡이를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지팡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순식간에 피바라기를 몸에 둘렀다. 그리곤 생명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어디서 이런 헛수작을!

============================ 작품 후기 하루 늦었습니다. 벌충하는 의미로 오늘은 두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간달프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보신 것 같은 기분이시라면, 그저 기분 탓일겁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감사드리며, 쿠폰 코멘트 선작 추천 모두 감사드릴 뿐입니다!

탓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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