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00화 (100/223)

< --  2-2. 비상.  -- >

조종석에서 처음만난 파일럿들은 갑주를 두른 김형준의 등장에 적지 않게 놀란듯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혼비백산해서 소리치는 그들에게 쥬디가 몇마디를 하니 곧 잠잠해진다.

"Hello. How are you."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 김형준의 서툰 영어를 들은 조종실의 사람들이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한참만에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아준다.

괜스레 멋쩍어진 그가 잠시 쥬디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통역해줘요."

무안한 탓인지 김형준의 음성이 쓸데없이 우렁차다.

"공군의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여러분들은 저를 따라 탈출합니다."

동시통역이라도 하듯 바로 곁에서 빠르게 통역하는 쥬디에게 사람들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탈출이라는 말에 승무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김형준이 다시 입을 열자 이내 조용해진다.

"먼저 우리 의도대로 괴물체가 따라줄 경우 가능한 한 지상 가까운 곳에서 여러분들은 저에게 매달린 채로 뛰어내리면 됩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계획이다. 사람들이 소란을 피워도 할 말이 없다. 김형준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작전이 실패할 경우, 기체가 동강나기 전에 뛰어내립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저를 붙잡고 뛰어내리시면 됩니다."

실패할 경우를 가정하고 말했지만 계획 중 크게 달라지는 부분은 없었다. 이리 되든 저리 되든 김형준을 의지해 전세기에서 탈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해요. 당신을 믿고 어떻게 탈출하냐는데요?"

쥬디가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녀 스스로도 묻고 나서는 염치없다 생각했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그대로 있던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군요."

구해놓고 나니 보따리 내놔라. 이능력자로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많이 당했던 경우라 새삼 놀랍지도 않다. 다만 투구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복잡하다. 누군가는 의심의 눈빛을, 누군가는 선망의 빛을, 또 다른 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을. 그 복잡한 눈빛들만큼이나 김형준의 심사도 복잡해진다.

아랫입술을 슬쩍 깨문 김형준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조종실의 입구에 가까웠던 그가 몇걸음 움직이자 입구에 다다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갑자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몇걸음 다가서며 소리치고 누군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행동에 깜짝 놀란 그가 영문을 몰라 쥬디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사람들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쥬디?"

딱딱한 영국식 영어가 와르르 쏟아지는 가운데 김형준이 쥬디를 부르니 한참만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 때문에 미스터 킴이 자존심이 상해서 떠나려고 했는지 알아요. 대충 들어보면 사과하는 말인데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쥬디의 설명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니 그들의 소심함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그런 질문을 했는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해주세요. 사실 이런 일 익숙합니다."

황당한 어조 가운데에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절로 드러난다. 쥬디는 그의 말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먹먹했다.

사실 그녀는 김형준을 처음 봤을 때, 이능력자라고 꽤나 거들먹거리는 유형의 사람일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세기의 실내 시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순박해 보이던지. 비행기가 이륙하자 금세 몸을 베베 꼬던 그와 대화를 해보고 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세기를 이용하는 다른 저명인사들처럼 권위의식에 쪄들지도 않았으며, 또한 허영또한 없는 듯 보였다. 솔직하게 전세기를 처음 타본다고 고백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  좋은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 그래도 이능력자라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뭔가 영화배우 같은 삶을 살 거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 한마디에 불과하지만 방금 전의 한마디에 왠지 모를 회한이 담겨 있는 듯 해 갑자기 왈칵 올라오는 게 있다.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그들이 제각각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인다. 그 꼴이 그녀가 보기에 어찌나 보기 싫던지 괜히 심통이 날 지경이었다.

"그럼 혹시라도 탈출 중에 저를 놓칠 수가 있으니 묶을 것을 찾아주세요."

금세 평소의 음성으로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그의 말을 통역한다. 하지만 왜인지 그 통역이 상당히 길다. 짧디 짧은 한마디였건만 그녀의 통역이 이어지자 김형준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끼리 뭔가 대화를 하겠지 싶어 그대로 신경을 끄고 기체의 움직임

에 촉각을 세웠다. 전투기를 처음 발견한 괴조 탓에 요동을 치던 기체는 조금은 잠잠해져 있었다.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전투기들 덕에 괴조가 진정한 모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계획의 성공률을 타진해보고 있던 김형준은 기체가 조금씩 하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하강인지 모르겠지만 그 움직임이 지극히 부드럽고 안정적이라 그는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군이 생각보다 작전을 잘 수행해주고 있나보다 하고 생각한 그가 마침 로프를 구해온 남자 승무원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허리를 묶어주세요."

그의 말에 사람들이 허겁지겁 자신의 허리를 밧줄로 묶는다. 아까 전의 행동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자기 먼저 묶는다고 난리라도 칠 줄 알았던 이들이 제법 침착하게 순서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기장의 허리를 묶은 밧줄의 끝을 김형준이 손목에 감아쥔다.

"이제 대충 준비는 끝났는데..."

당장이라도 기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혹시라도 괴조를 자극할까 염려되어 차마 그러지 못하는 김형준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체는 매끄럽게 하강하고 있었다. 간혹 느껴지는 진동은 괴조의 날개짓 탓이리라.

"8000ft!"

기장의 조금은 들뜬 목소리가 조종실을 울린다. 내심 걱정했던 상황이 일어나지 않고 기체가 원만하게 하강을 하자 스스로도 약간은 안심을 한 모양이다.

"7000ft!"

그렇게 얼마나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기장이 다시 고도 칠천피트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허술한 계획이나마 희망이 보이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기장의 음성을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고 있다. 아무리 영국정부에서 전세기를 내어줄 정도로 대단한 이능력자라고 하지만, 한 번도 본적 없는 이능력을 믿고 당장 수천피트 상공에서 뛰어내린 다는 것은 절

대 피하고 싶던게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6500ft!"

기체의 진동이 조금씩 심해지다가 이내 요동을 친다.

"꺄악!"

괴조의 날개짓이 거세지기라도 했는지 상하로 쉴새없이 요동치는 기체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6000ft..."

힘차게 고도를 보고하던 기장의 음성이 이내 잦아들더니 한참을 떠들어댄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억센 억양의 영어 탓에 이번에도 쥬디를 바라본다. 이제껏 성실하게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녀는 이번만은 그의 기대를 져버렸다.

"Please god...."

누군가 신을 찾는다. 쥬디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의 여승무원은 패닉에 빠진 듯

길게 비명을 질렀다. 그 곁의 동료 역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쥬디! 쥬디!"

그렇게 몇 번이나 쥬디의 이름을 불렀을까, 망연자실하게 있던 쥬디가 고개를 들었다.

들었다.

"쥬디!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8000ft!"

천천히 하강하던 고도가 단숨에 상승해버린다. 비명처럼 길게 이어지는 기장의 고함소리에 김형준이 쥬디를 다그쳤다.

"공군의 작전은 실패했어요! 괴물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지금 안에서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저희 기체의 허리부분이 거의 동강나기 직전이래요!"

뒤늦었지만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 그가 침음성을 내뱉는다.

"공군 소속 전투기 중 한 대는 괴조의 공격으로 격추된 상태고, 다른 전투기들

역시 공격권 밖으로 빠르게 물러나는 중이랍니다."

괴조의 공격이라니. 어떤 식의 공격이었길래 그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전투기의 손실까지 생긴 걸까.

"쥬디! 공군측에 연락해서 자세한 설명을 요청해요! 잘못 하다간 저희도 탈출하다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11000ft!"

계속되는 기장의 보고에 김형준이 버럭 소리쳤다.

"다들 진정하라고 해요! 어차피 얼마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느냐의 차이지 결국 탈출하는 건 같아요!"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그 음성에 담긴 힘이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종식시킨다. 거듭되는 기체의 요동과 굉음을 제외하고는 조종석이 비교적 조용해졌다.

김형준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본다. 염려와 공포, 또는 분노가 서린 눈빛들을 하나하나 마주한 김형준이 입을 열었다.

"살 수 있습니다. 제발 소란들 떨지 좀 말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리 없는 이들이 통역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김형준의 어조에 서린 강력한 의지를 읽기라도 한 모양인지 다들 이를 악다물고 있다.

김형준이 한발 뒤로 물러선다. 다시 한걸음 물러선 그의 모습에 동요하려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날개가 조종석을 가득 채울 듯 퍼져 나온다. 마치 신화속에서 튀어나온 듯 거대하고 강인해 보이는 날개가 지독스럽게 비현실적이다.

"이러면 믿겠어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위력시위라도 한 모양인지 김형준이 말했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 중 몇몇이 갑자기 엎드려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쥬디가 그들의 말을 통역해준다.

"미스터 킴이 천사래요."

말을 한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지은 그녀를 따라 사람들 역시 어

이 없는 헛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비록 계기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만 바짝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 이들을 보고 조금이나마 진정한 기색의 사람들의 모습에 김형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종석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붉은 날개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사람들이 왠지 아쉬움이 담긴 탄성을 내뱉었다.

"13000ft!"

오직 기장만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게 비명과도 같은 보고를 한다.

============================ 작품 후기 대기권 벗어날 기세. ㅎㅎㅎㅎ항상 읽어주신 독자님들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도 감사드리 ㄹ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리리플은 안하고 있지만 독자분들의 코멘트는 항상 몇번씩

읽어보고 있습니다. 제게 사실 가장 힘이 되는 건 코멘트입니다. 물론 쿠폰이나 추천도 큰 힘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코멘트 하나 하나가 가장 소중하다라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글 쓰면서 독자분들의 코멘트를 지침삼아서 글이 엇나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기탄없는 지적과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스테리 오컬트 판타지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울부짖는 새벽'이라는 제 다른 글을 읽어봐주심이 ㅎㅎㅎ 나름 공들여서 쓰고 있는 글입니다만, 읽어보시고 많은 피드백 부탁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노블연재가 아닌 일반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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